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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웨어의 카멜레온

스포츠웨어의 카멜레온

폴로 셔츠는 테니스·골프 등의 운동복뿐만 아니라 일상복으로도 꾸준한 사랑 받아
스포츠웨어로 시작한 폴로 셔츠는 편안한 이미지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지도자들과 뒷마당 바비큐장의 아버지들에게 폭넓게 사랑받는 아이템이 됐다.
작은 칼라가 달린 피케(벌집 모양으로 올록볼록하게 가공한 면직물) 원단의 반소매 셔츠. 스포츠웨어 중에 이렇게 널리 사랑받는 아이템이 또 있을까? 요즘 이 셔츠는 여러 스포츠 종목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골프장의 카트와 잔디밭에서는 골프 셔츠가 되고, 켄타우로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마의 괴물) 같은 스포츠맨들이 말을 타고 타구봉을 휘두를 때는 폴로 셔츠가 된다. 랠프 로렌의 고객도 폴로 셔츠라고 부른다. 또 매년 6월 런던 퀸스 클럽의 잔디 코트와 윔블던 센터 코트에 영국인의 이목이 집중될 때면 이 셔츠는 테니스 셔츠로 둔갑한다.

하지만 이름을 뭐라고 부르든 이 셔츠는 세계 지도자들이 격식에 얽매이지 않은 편안한 인상을 주고 싶을 때 입는 옷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아이템은 재계에서도 사랑받는다. 회사 로고가 새겨진 배낭과 폴로 셔츠는 기업의 1박2일 세미나와 연례 단합대회의 상징이 됐다.

이 셔츠는 또 아버지들의 여름 옷장에 없어서는 안 될 아이템이다. 주말이면 집집마다 열리는 바비큐 파티에서 맥주병을 손에 들고 폴로 셔츠를 입은 아버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정도로 보편화되다 보니 이 셔츠가 원래 정식 스포츠웨어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운동과 그에 적합한 의상이라는 개념이 매우 현대적으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진지함의 중요성’에 나오는 부유하고 게으른 독신남 앨저넌은 이렇게 말한다. “운동이라고? 맙소사! 신사는 운동을 하지 않는다네.”

와일드는 1895년 그 희곡을 썼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13년엔 운동(특히 테니스)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러시아 발레단이 테니스 경기를 주제로 한 발레 ‘유희(Jeux)’를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했다. 의상은 디아길레프와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레옹 박스트가 맡았다.

2010년 가을 런던의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에서 러시아 발레단에 관한 전시회가 열렸다. 미술사학자 존 볼트는 카탈로그 에세이에 이렇게 썼다. “ ‘유희’에서 테니스 선수들이 입은 단색의 기능적인 스포츠웨어는 아방가르드 미술가 류보프 포포바와 구성주의 디자이너 바르바라 스테파노바가 제안한 간편의상과 흡사했다.”

디아길레프는 구성주의 스타일의 스포츠웨어를 문화의 선봉에 세우기로 마음먹었던 듯하다. 1924년 초연한 발레 ‘푸른 기차(Le Train Bleu)’에서도 그런 의상을 채택했다. ‘푸른 기차’는 장 콕토가 만든 유명한 단막 발레(당시에는 댄스 오페레타로 불렸다)로 제목을 코트 다 쥐르행 특급열차의 이름에서 따왔다. 이 발레는 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무용수들은 코코 샤넬이 스포츠웨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디자인한 의상을 입었다. 이것은 테니스와 골프, 수영 등 당시의 개인 스포츠 열기를 반영한다.

그해 20세의 테니스 선수 르네 라코스트가 프렌치 오픈에서 우승했다. 샤넬은 패션쇼 무대에서, 라코스트는 테니스 코트에서 의상의 선풍을 일으켰다. 라코스트는 요즘 프로 스포츠 선수들처럼 훈련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경기에 적합한 의상을 선택했다. 거추장스런 긴 소매 버튼업(위부터 아래까지 단추로 잠그는 스타일) 셔츠 대신 단추가 윗부분에만 몇 개 달리고 칼라가 부드러운 반소매 셔츠를 입었다.

라코스트가 1926년 미국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할 당시 입었던 이 헐렁하고 편안한 셔츠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30년대 초에는 니트 제조업자 앙드레 질리에가 라코스트의 디자인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제품은 ‘테니스, 골프, 해변’ 어디서 입어도 좋다는 문구로 홍보됐다.

벌집처럼 올록볼록하게 가공한 피케 원단이 이 디자인에 안성맞춤이었다. 신축성이 좋고 부드럽고 가벼우며 편안하고 통기성도 좋다. 디자인 역시 실용적이었다. 뒤쪽이 더 긴 스타일은 바지 안에 넣어 입었을 때 격렬하게 움직여도 빠져 나오지 않는 장점이 있다. 또 골이 지게 짠 칼라는 세우기가 쉬워 목이 햇볕에 타는 걸 막을 수 있다.

가슴에 있는 작은 악어 로고는 매우 훌륭한 마케팅 효과를 냈다. 이 로고는 라코스트의 경기 결과를 놓고 악어가죽 여행가방이 걸린 내기가 벌어진 뒤 그에게 붙은 별명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설이 있다(라코스트의 경기 스타일이 과감해서, 혹은 그의 코가 커서 악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라코스트는 악어 로고가 새겨진 테니스 셔츠를 입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셔츠는 캐주얼하면서도 고급스럽고 깔끔한 스타일의 상징이 됐다.

이 셔츠는 클래식한 스포츠웨어에서 라이프스타일을 상징하는 아이템으로 재빠르게 탈바꿈했다. 1930년대 중반에는 프랑스 유명 휴양지 리비에라 해안의 공식 복장이 되다시피 했다. 1935년 한 신문 기자는 이렇게 썼다. “폴로 셔츠가 성별의 구분을 없애고 계층간의 평등을 이룩했다. 넥타이가 사라지고 개성이 자취를 감췄다. 리비에라 해안은 소련이 선망하는 공산주의를 구현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기자는 폴로 셔츠가 소련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괴로웠을 듯하다. 게다가 윔블던 테니스 대회에서도 딸기와 크림, 소나기처럼 여전히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

- 니컬러스 포크스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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