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경의 ‘노벨경제학자의 은밀한 향기’ (22)] 당신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가 -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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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경의 ‘노벨경제학자의 은밀한 향기’ (22)] 당신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가

[조원경의 ‘노벨경제학자의 은밀한 향기’ (22)] 당신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가

상대적으로 경제가 괜찮지만, 과거 같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꿀 수 없는 미국에 당신이 산다고 가정하자.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이지만 누구나 폼 나게 살고 싶어 돈을 벌려고 하긴 마찬가지다. 당신이 잘나간다고 했을 때 당신의 목표는 무엇인가? 누구는 실리콘밸리로 가서 ‘기술 혁신’으로 창업하고자 할 것이다. 다른 누구는 월가에 가서 새로운 ‘금융공학 기법’으로 다양한 혁신상품을 만들어 실적을 크게 올리고 싶을지 모르겠다.

우스갯소리 하나 하자. 한국에 있는 시중은행에 가서 돈을 빌리고 싶으면 은행은 ‘집을 담보로 잡히면 돈을 빌려 주겠다’고 한다. 당신이 실리콘밸리에 가서 돈을 빌리고 싶다면 어떨까? ‘당신의 꿈을 말하세요. 그러면 그걸 사서 돈을 빌려 드리겠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단다. 돈 없어도 꿈을 꿀 수 있다는 건 돈 없는 젊은이에게는 행복이다. 그런 성공 신화를 쓴 인물들이 미국에는 그래도 많다.

그래서 ‘우리는 실리콘밸리나 월가로 간다’고 누군가 꿈을 외친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부자가 된 청년 ‘개츠비(소설 [위대한 캐츠비]의 남자 주인공)’의 이름을 딴 ‘위대한 개츠비 곡선’을 생각해 보자. 가난했던 개츠비는 남의 여자가 된 여인을 만나려는 욕심에 ‘위로 더 위로’ 올라가려고만 했다. 그는 부자가 되었지만 말로는 비참했다. 현대 사회에도 많은 사람은 개츠비처럼 부를 이루어 계층 이동을 꿈꾸나 소득불평등이 고착화돼 계층 상승은 어려워졌다.
 소득불평등 심화로 계층 간 이동 어려워

소득불평등이 심하게 되면 자포자기하고 사회적 갈등도 심해져 사회적 비용은 커지고 경제 발전도 저해된다. 해도 안 된다는 무력감으로 활력을 잃은 사회가 되어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복원시키려 하는 노력이 그래서 필요하다. 여하간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려운 시스템이라는 데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위대한 개츠비 곡선’에서 X축은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 계수이고 Y축은 부모의 소득에 따른 계층 간 소득 탄력성을 나타낸다. 부모 소득에 따라 자식의 소득이 변화할 수 있는 계층 이동 가능성을 표시한다.

중국을 포함한 개발도상국일수록 이 값이 높아져 (X값과 Y값이 상단에 위치) 부모 잘 만난 친구가 잘되는 경향을 보인다. 유럽 선진국일수록 이 값이 낮아 상대적으로 부모의 소득에 영향을 덜 받는다. 위대한 개츠비 곡선의 중간 정도에 있는 미국을 보면 아메리칸 드림이 사라졌다지만 실리콘밸리나 월가가 상대적으로 기회의 땅으로 인식된다. 누구는 지구상에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가 그래도 먹혀 들어가는 나라가 미국이라고 한다. 슘페터는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창조적 파괴로서의 기업가의 혁신을 중시했다. 이를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이 탄생하는 과정의 무한 반복으로 인식하고 자본주의 발전의 근본으로 여겼다.

대외 여건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금리 인하나 추경 편성이 실물경제를 견인한다는 보장이 없다면 우리는 죽은 슘페터를 관에서라도 끌어오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경기 침체와 소득불평등 심화로 세계 경제가 만성적 수요 부진에 빠져 장기 침체(secular stagnation) 상황에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지도 벌써 오래다. 경제가 성숙단계에 달하면 만성적인 수요 부족으로 기업들은 투자를 회피하고 과잉 저축이 세계 경제의 장기 정체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동안 빚을 지면서 소비를 늘려온 가계가 소비를 줄여 부채를 갚고 저축을 늘린데다 주요 선진국들도 금융위기 후 긴축기조로 전환하면서 소비와 투자가 위축됐다. 대안으로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인위적인 수요 창출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나 많은 선진국은 국가 부채의 늪에 빠져 있어 이 주장이 이상적으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지만 그런 방법으로 돌파구를 찾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본 사람이 있다. 바로 작은 혁신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에드먼드 펠프스이다. 우리가 펠프스를 따라 잃어버린 역동성을 찾아가는 ‘혁신 여행’을 하면 어떨까?
 근대 경제의 힘은 풀뿌리 혁신

활기가 부족한 시기에 누군가 나타나서 담대하게 ‘모든 이여, 활기를 찾아라’라고 외치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선동일까? 그는 경제 성장의 역동성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색다른 시각을 보인다. 현재 세계 경제에서 공급주의자의 감세도, 케인즈주의자의 복지 지출도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고 따끔하게 꼬집는다. 침체를 끝내려면 ‘대중의 희망과 꿈의 정신’을 회복시키는 것 즉 ‘혁신의 꿈’을 대중의 마음 속 곳곳에 심어 주는 것이 답이라고 주장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근대 경제가 역사에 제공한 경이로운 성취는 무엇이었나? 서구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였다. 개인의 힘을 중시하는 근대적 가치관과 국가의 힘을 중시하는 보수적 가치관 사이의 투쟁에서 근대적 가치관이 승기를 잡아 혁신이 일어나고 사회가 발전했다. 그에게서 ‘슘페터를 닮았지만 뭔가 다른 작은 풀뿌리 향기’가 난다. 그는 번영의 원천이 평범한 개인의 무수히 많은 ‘작은 혁신’에 있다고 주장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본 것이다.

작은 혁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이야기의 한 부분을 들어보자.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은 흔히 세상을 변화시킨 중대한 발견 가운데 열손가락 안에 꼽힌다. 증기기관이 18세기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에 따른 생산성 향상이 19세기 초 놀라운 경제 번영을 불러왔다는 건 정설에 가깝다. 놀랍게도 펠프스는 이와 좀 다른 견해를 보인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 실제로 경제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공정 개선에 따른 생산성 향상이 번영의 핵심 요인일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고 평가절하했다. 펠프스는 인류 역사상 번영의 화려한 꽃을 피운 시기를 1830년에서 1910년의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의 생산성 증가 시기로 말한다. 18세기엔 상상할 수 없었던 높은 생활수준을 평범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게 된 비결은 뭘까? 재능 있는 개인이 혁신적 아이디어로 무장해 상품이나 서비스를 시장에 내놓으면 이른바 ‘지식경제’ 기반이 구축되고 경제의 활기찬 번영이 가능했다. 번영의 원천이 몇몇 탁월한 혁신이 아니라 대다수 평범한 개인의 ‘작은 자생적 혁신’의 지속에 있었다고 한다.

상업 자본주의 시대의 혁신은 몇몇 귀족과 부르주아의 전유물이었다. 국가는 부유했지만 대중의 부에는 기여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19세기 초 참정권이 확대되고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자 도전과 모험, 혁신을 강조하는 ‘문화’가 힘을 얻고 대중의 대번영(Mass Flourishing) 시대가 열렸다. 펠프스는 국가의 번영은 경제적 풍요만을 뜻하지 않으며 다수의 개인이 도전하고 모험하며, 일로부터 만족을 얻고, 정당한 보상을 받는 ‘좋은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고 했다. 얼마나 가슴 벅찬 말인가. 우리는 지금 그런 대번영을 누리는 삶을 살고 있나. ‘일하는 보람’과 그로부터의 번영의 기쁨을 진정 고민하고 있나.
 코포라티즘 부각으로 자생력 저해
근대 경제의 혁신은 생산성 증대와 실질임금 상승을 야기했다. 더 나은 삶은 대중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고, 빈곤을 감소시키고 생활을 향상시켰다. 자본과 노동의 증가, 상업과 국가 간 무역 팽창의 결과가 아니라 작은 혁신의 결과가 번영을 초래했다는 펠프스의 주장에 우리는 동의하는가. 전례 없는 번영은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됐으나, 오늘날 번영은 수십 년에 걸쳐 약화되고 있다고 펠프스는 주장한다. 1972~2012년 기간 중 미국의 총요소 생산성이 2%대에서 절반 수준인 1%대로 감소하는 등 세계적으로 잠재성장률 저하가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럼 우리는 다시 어떻게 대번영을 이룰 수 있나. 펠프스는 사회 곳곳에 풀뿌리 혁신(grassroot innovation)이 확산되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왜 역동성을 이끄는 자생적 혁신이 저해되었을까. 펠프스는 근대 경제의 기반이 되는 근대적 가치관이 공동체와 국가를 개인보다 우선시하는 전통적 코포라티즘(협동조합주의) 가치관을 부상시킨 게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공동체와 국가를 개인보다 우선시하고 낙오자들을 선도자들로부터 보호하는 전통적 가치관이 강력해지면서 근대 경제가 전진하지 못하게 됐다고 한다. 유럽 대륙에서 1920년대 처음 등장한 코포라티즘은 모험·도전·혁신 같은 근대적 가치보다는 안정·조화·질서·연대 같은 전통적 가치를 옹호했다. 코포라티즘은 정부와 기업단체, 노동단체 간 합의를 바탕으로 경제를 운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개인주의나 돈에 대한 욕망같은 행태의 확산을 비판하고 대신 약자와 기득권 보호를 내세웠다. 이러한 ‘사회적 보호’는 보조금에서 복지 부조에 이르는 다양한 정책으로 나타났다. 펠프스는 이를 자생력을 저해하는 해악으로 봤다.

누군가는 양극화가 심해지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본주의의 위기 상황에서 자유와 활력을 중시하는 펠프스를 조롱할 수도 있겠다. 펠프스 주장의 근거를 좀 더 들여다보자. 기업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의사결정 구조의 효율성을 저해해서 역동성을 훼손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대기업의 관료적 의사결정을 싫어한다. 기업이 단기 성과주의와 경영자 그룹에 대한 과도한 보상에 몰두하다 보면 기업 경영의 장기적 전망은 어둡게 된다. 장기 비전 없이 단기 목표에 급급한 기업은 표류한다고 본다. 돈에 대한 과도한 탐욕도 자본주의의 쇠락에 영향을 미친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를 통해 수십억씩 버는 사람의 돈에 대한 탐욕은 혁신을 저해하는 암 덩어리라 본다. 그 돈이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비생산적인 곳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의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생각을 좀먹는 것으로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창의적인 풀뿌리 혁신 시스템을 바르게 인지하고 이를 존중하고 일하면서 발생하는 결과를 제대로 보상하는 것이다. 인센티브는 덩치가 큰 고래도 춤추게 한다. 개척 정신으로 대변되던 미국의 경제적 역동성은 코포라티즘이 강조하는 가치들이 도입됨으로써 ‘의존성’에 대체돼 힘을 잃었다고 그는 보았다. 국가가 개입해 규제를 통해 기득권을 보호하고 정치인·관료·이익집단의 3각 규제의 철옹성이 공고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쯤에서 그의 정의관을 한번 보자. 그는 일자리 문제와 좋은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 경제학자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후예들이 논의해 온 ‘좋은 삶의 향기’를 평생 동경했다. ‘정의로운 경제의 향기란 무엇인가’를 늘 생각하면서 경제가 돈과 이익의 문제라는 편견을 과감히 거부한 인물이다. 사회적 약자를 존중한 존 롤즈의 정의론을 사랑하면서 다수 이익의 합이 크다고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고 주장한 참 인물이다. 사회의 소득이 어떻게 분배돼야 하는가를 늘 생각하며 번영으로 이끄는 ‘좋은 삶’은 분배 역시 정의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왜 그는 코포라티즘적 분배를 보기 싫은 불의로 규정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에게 최저 임금에 보조금을 지급해 극단적인 양극화를 해소하는 분배는 많은 사람을 경제 활동에 참여하게 해서 ‘좋은 삶’으로 이끄는 정의로운 제도다. 이와 달리 코포라티즘의 영향을 받은 ‘사회 부조’의 확대는 경제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복지’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부를 분배한다.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혜택을 줘서 사회 역동성을 심하게 저해하기에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아직까지 펠프스의 주장에 동의하고 싶지 않은 복지론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일하지 않는 자에게도 소득을 주는 기본소득 논쟁이 한창이니 말이다. 그의 저서 [중산층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Rewarding work)]를 읽어 보자. 그는 일하는 저임금 근로자에게 생산성에 따라 차별화된 보조금이나 세제 혜택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가 도입한 근로 장려 세제가 그의 이론을 수용한 제도다. 일하는 보람을 앗아가서는 곤란하기에 사용자에게는 고용 비용을 줄여 주고, 일하는 사람에게는 제대로 된 임금을 제공하자는 게 그의 일관된 사고다. 그는 정부가 저임금 근로자에게 영구적으로 임금 보조금을 줘서 중산층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할 기회를 줘서 개개인의 참여와 도전정신으로 그들의 삶이 나아지고 국가 번영을 이끈다는 것이 그의 핵심 이론이다.
 부러운 중국의 창업 열풍
공식적인 한국의 혁신지수는 다양한 발표에서 상당히 높다. 연구개발과 높은 교육열이 한몫하는 것 같다. 그런데 풀뿌리 혁신의 열기는 뜨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요즘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창의성을 발휘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모험을 하는 대신 안전 지향으로 직업을 선택하는 경향이 오히려 높아 보인다. 금융업·교사·공무원·대기업 시험에 수많은 젊은이가 목을 맨다고 하니, 청년 실업을 생각하면서도 안타깝다. 우리는 아직도 중세나 있었던 특권의식, 순응주의, 체면치레 같은 전근대적 문화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가. 달라진 세상에서 역동성은 자유와 창의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집단주의에 빠진 역동성 고갈을 극복하는 것이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의 숙제라고 펠프스는 외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의 창업 열풍이 거세다. 리커창 총리는 ‘대중의 창업, 만인의 혁신’을 말하며 청년들에게 창업을 독려한다. 중국에서 제2, 제3의 알리바바와 텐센트, 샤오미가 나와 경제 부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드먼드 펠프스(Edmund S. Phelps, 1933년 7월~): 거시경제 정책의 장·단기 효과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해를 넓힌 공로로 2006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1960년대 말에 주류 경제학의 견해였던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사이의 안정적 역(逆)의 상관관계, 필립스 곡선을 반박해 경제학계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새로운 기술과 발전의 확산에서 ‘인적 자원’의 중요성을 분석하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고용이론의 대가로 합리적 기대를 하는 고용주들은 생산에 차질을 빚지 않고 재고용으로 인한 추가 비용을 고려해 노동자들의 이직을 막으려 한다고 했다. 그 결과 시장 임금보다 높은 수준의 임금을 제시해 임금은 균형 수준보다 높게 되고, 노동의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로 비자발적 실업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조원경 - 연세대(경제학과)와 미국 미시간주립대(파이낸스 석사)를 졸업했다. 행시(재경직) 34회 출신으로 재무부·재정경제원·재정경제부·기획재정부에서 관세, 물가, 복지, 소비자, 국제금융, 통상, 대외경제 분야에서 일했다. 미주개발은행 이사실에서 한국 대표로 근무했다. 현재 기획재정부 대외경제협력관(국장급)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명작의 경제] [법정에 선 경제학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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