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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현의 바둑경영] 대마는 쉽게 잡히지 않는다

[정수현의 바둑경영] 대마는 쉽게 잡히지 않는다

프로기사들은 흔히 여성들의 바둑이 남성보다 더 공격적이라고 한다. 중국의 철의 여제 루이 나이웨이 9단은 호전적인 스타일이다.
한 판의 바둑에서 본격적인 싸움의 단계를 ‘중반전’이라고 한다. 초반의 준비 단계인 포석이 끝난 다음부터 마무리 단계가 될 때까지의 과정이 중반전이다. 바둑의 승부는 대개 중반전을 어떻게 치르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경영이나 인생에서도 중반전이 중요한 것은 마찬가지다. 아동기나 노년기보다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중년기가 메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반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희한하게도 바둑의 꽃인 중반전에 관한 바둑 이론은 별로 없다. 중반전에 관한 책도 많지 않다. 다만 개별적인 요령이나 기법은 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대마사냥’에 관해 얘기해보기로 한다.



사활을 건 싸움:
중반전을 본격적인 전투 단계라고 하는데 무엇을 위한 전투일까? 바둑은 집 차지 싸움이므로 당연히 집, 즉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중반에는 내 영토를 지키고 상대편 집은 깨뜨리는 전술이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바둑의 전투는 집을 차지하려는 것보다 돌의 사활을 건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다. 즉 바둑돌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실제 전쟁에서 영토를 취하려고 싸우지만, 전투의 결과는 병사들의 생사로 결정되는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바둑은 영락없는 영토전쟁이다.

[1도]는 포석이 대충 끝난 후 흑1에 뛰어든 장면이다. 이것은 하변의 백진을 깨뜨리려는 침입수다. 중반전은 대개 이런 침입수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이 전투는 분명 집과 관련된 것인데, 침입군의 생사가 필연적으로 관련을 갖게 된다.

[2도]에서 백2로 공격하면 살기 위해 흑3으로 뛰어 달아난다. 백4로 쫓으면 다시 흑5로 뛰어 탈출한다. 이런 싸움은 마치 바둑돌이 살아서 움직이듯 다이내믹한 느낌을 준다. 이 싸움에서 돌이 잡혀 버리면 영토를 확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포로로 잡히면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아니라 나중에 몸값을 내야 한다. 포로 1명당 1집씩 몸값을 내게 되어 있다. 만일 10개의 돌이 포로로 잡힌다면 나중에 10집을 상대방에게 줘야 한다. 돌을 잡으면 포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잡아낸 곳이 자신의 영토가 된다. 따라서 10개의 포로를 잡으면 소득은 더블이 되어 20집이다. 이 외에도 플러스 알파가 있다. 이렇게 보면 돌을 잡는 것이야말로 엄청나게 수지 맞는 장사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둑을 둘 때 집을 지으려고 하기보다 상대방의 돌을 잡으려는 데 더 신경을 쓴다. 이런 메커니즘으로 인해 중반전은 자연히 돌의 사활을 건 싸움의 성격을 띤다.


대박사업 대마사냥:
적군을 잡는 것성 기사 중에는 신산 이창호 9단이나 컴퓨터 이시다 9단처럼 차분하게 계산적인 바둑을 두는 기사가 거의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대마를 공격할 때 상쾌감을 느낀다. 이때 일이나 삶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이런 체험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바둑 두는 사람은 공격성을 바둑판 위에서 쏟아내므로 실제생활에서 폭력을 쓸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3도]는 ‘현대의 기성’으로 불린 우칭위안 9단과 힘바둑으로 유명한 일본의 가리가네 8단이 둔 바둑이다. 중반전 초기에 공격의 찬스를 잡은 우칭위안이 백1에 씌워 흑돌을 공격했다. 가리가네가 흑2로 달아나자 백3으로 포위하고, 흑4로 달아날 때 백5로 공격한다. 마치 폭격기로 공중에서 공격하듯 이런 전술을 구사할 때 누구나 형언할 수 없는 통쾌감을 느낀다. 이처럼 대마사냥은 막대한 이익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엄청난 쾌감을 수반하기 때문에 바둑에서 가장 매력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바둑팬의 로망이자 대박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대마불사의 신화:
그런데 대마사냥을 좋아하는 바둑팬의 기분을 씁쓸하게 만드는 말이 하나 있다. 바로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격언이다. 대마불사는 대기업의 운명을 비유하는 시사용어로도 종종 사용된다. 즉 대기업이 도산한 것을 ‘대마불사의 신화가 깨졌다’라고 표현한다. 대마불사는 대마가 쉽사리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박을 내기가 쉽지 않듯이 대마를 잡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건 대마를 포위하는 것보다 달아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또한 덩치가 큰 돌은 살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대마불사라는 특징 때문에 바둑의 공격자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는 수가 많다. 신나게 쫓았는데 대마가 달아나버려 아쉬움을 느끼는 것이다. 심한 경우 공격하던 쪽이 역습당해 잡히는 일도 일어난다. 이 경우 대마사냥은 패배를 불러오는 독이 된다.

대마사냥은 통쾌하나 대마는 잘 잡히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수들의 행태에서 요령을 배울 수 있다. 고수들은 대부분 다음과 같은 방법을 쓴다. 첫째, 고수들은 함부로 대마사냥을 하지 않는다. 아마추어들은 공격 목표만 보았다 하면 즉시 칼을 뽑는다. 그러나 고수는 절대 이런 ‘묻지마 사냥’을 하지 않는다. 둘째, 착실하게 집으로 우위를 확보하려고 한다. 대마를 잡으면 이익이 크지만 대마를 잡았다고 반드시 바둑을 이기는 것은 아니다. 바둑이란 결국 집으로 승부가 난다. 그래서 고수들은 집 차지 면에서 앞서려고 한다. 집으로 앞서 있으면 상대방이 무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 대마를 잡을 기회가 오는 경우가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대마를 잡지 않으려는 전략을 쓸 때 오히려 대마를 더 잘 잡을 수 있다는 논리가 된다. 대박을 내려고 하지 않고 착실하게 전진할 때 대박의 기회가 온다고 할까. 실제로 비즈니스에서도 대박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대박을 낸 경우가 많다. 바둑을 소재로 한 웬툰 <미생> 은 윤태호 작가가 힘이 들어 빨리 5편까지 완성하고 끝내려고 했는데, 공전의 히트를 치고 드라마로까지 방영됐다.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인터넷, 세계인을 친구로 만든 페이스북은 원래 단순한 소통의 도구로 만들었던 것이 대박을 낸 케이스다.

중반전의 대마사냥을 보면 대박을 기대하며 대드는 것은 별로 현명치 않은 것 같다. 무턱대고 대마사냥을 했다가는 쪽박을 찰 가능성이 많다. 착실하게 경영해 가며 내실을 다질 때 대박의 기회가 찾아올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자.

정수현 - 1973년 프로기사에 입단한 후 1997년 프로 9단에 올랐다. 제 1기 프로신왕전에서 우승했다. 한국프로기사회장, KBS 일요바둑·바둑왕전의 해설자를 역임했다.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바둑 읽는 CEO』 『반상의 파노라마』 『 인생과 바둑』 등 30여 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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