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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사직상소에 비친 조선 선비의 경세관’ (23)] 우유부단한 고종의 태도 정면으로 비판

[김준태의 ‘사직상소에 비친 조선 선비의 경세관’ (23)] 우유부단한 고종의 태도 정면으로 비판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오늘날 정치의 갖은 폐단과 백성들이 겪고 있는 도탄을 폐하께서도 모르지 않으실 것입니다. 알면서도 바로잡지 못하시는 것뿐입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후 지난 40여 년 동안 말을 달리며 사냥 놀이를 즐기신 적이 없고 오로지 거룩하고 어진 덕을 베푸셨건만 정사는 뜻대로 되지 않아 이미 여러 차례 변고를 겪으셨습니다. 나라는 점점 쇠약해져 벼랑 끝에 선 듯 위태로운 지경입니다. 대체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곽공이 망했던 까닭은
1904년(고종 41) 3월 1일, 원수부(元帥府, 대한제국의 군 최고 통수기관) 군무국 총장 신기선(申箕善, 1851~1909)은 며칠 전 체결된 한일의정서(1904년 2월 23일 일본이 대한제국의 안전을 지킨다는 미명 아래 각종 이권 및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사용권을 보장받음) 체결을 막지 못한 책임을 통감한다며 사직 상소를 올린다. 그러면서 고종의 정치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폐하께서는 이치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번번이 사사로운 뜻에 가려지는 것이고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선정(善政)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베풀지 못하셨고, 그릇된 정사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거하지 못하셨으며, 백성들의 곤궁함을 알면서도 구휼하지 못하셨고, 신하의 간사함을 알면서도 배척하지 못하셨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선한 것을 옳게 여기고 악한 것을 미워하면서도 곽공(郭公)이 망했던 까닭입니다.’

여기서 ‘곽공이 망했던 까닭’이라는 것은 [관자(管子)]에 소개된 이야기로 춘추시대의 패자(霸者) 제환공(齊桓公)이 곽나라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를 가리킨다. 환공이 그곳 노인에게 “곽나라는 어찌하여 망하게 되었는가?”라고 묻자 노인은 “곽나라의 군주가 선한 것을 옳게 여기고 악한 것을 미워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러자 의아해진 환공은 다시 물었다. “만일 그대의 말과 같다면 곽나라 군주는 현명한 사람일진데, 어찌하여 망했단 말인가?” 노인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곽나라 군주는 선을 옳게 여겼지만 그 선을 쓰지 않았으며, 악을 미워했지만 그 악을 없애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망하게 된 이유입니다.” 좋은 점을 알면서도 활용하지 못했고 잘못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은 것, 즉 머리로만 알고 실천으로는 옮기지 않은 점이 망국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신기선은 고종의 태도가 바로 이와 같으며 이는 일의 이치를 분명히 알지 못해서라고 진단한다.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이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니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다는 것이다.

신기선은 ‘지금 이 나라는 이웃나라의 군사들로 들끓고 외국인들이 강성한 힘으로 주인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협약이 체결되어 나라의 권한은 남에게 넘어갔습니다. 500년 동안 내려온 종묘사직과 3000리 강토가 장차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탄식하면서도 ‘아직 나라가 망하지 않았고 백성들도 임금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조속히 정치를 바로세우고 국가의 기강과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특히 다음 3가지에 주력할 것을 강조했다.

우선 ‘옛것을 거울로 삼는 일’이다. 신기선은 역사의 흥망성쇠를 차례로 거론하며 ‘지나간 역사를 두루 고찰해 보건대, 공적인 도리를 시행하고 정치의 원칙을 바로 세웠는데도 나라가 흥하지 못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사사로운 욕망에 빠져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이는 일에만 애썼는데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임금이 자질구레한 일까지 직접 하고 멋대로 벼슬을 내리고서 나라를 잘 다스린 경우는 없었고, 무당을 신임하고 기도(祈禱)에 의지하고서 혼란을 바로잡은 경우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 사람이 천하를 다스리지만 천하를 가지고 한 사람을 섬기지 말라는 옛 가르침을 명심하라’고 당부했다. 임금은 지고무상의 자리로 온 나라와 백성들을 다스리지만 그렇다고 천하로부터 떠받듦을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 임금은 만물을 위해 존재하지만 만물이 임금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임금의 헌신과 의무를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의 운명 바꿀 신묘한 방책은 없어
다음으로 신기선은 ‘실속에 힘써야 한다’고 진언했다. 그가 보기에 당시 ‘옛것을 고수해야 한다는 자들은 오직 형식에 빠져 있을 뿐이고 개화를 주장하는 자들도 겉치레만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나라를 위해 계책을 세운다면서도 빈 말 빈 형식을 차리느라 옳게 처리하는 일이 한 가지도 없었다. 이에 신기선은 ‘실심(實心)으로 실사(實事)를 행함으로써 실효를 거두어야 한다’며 ‘한 가지 정사를 하거나 한 가지 명령을 수행하더라도 반드시 돌이켜 생각해서 이 일이 과연 나라에 이득이 되겠는가,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겠는가를 면밀히 따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물과 제도의 한 글자 한 글자, 한 마디 한 마디까지도 모두 반드시 실속이 있는 것인가를 따져야 하며, 무익하고 번거로운 형식을 제거하여 유용하고 실천적인 일만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신기선이 제시한 것은 소인배를 축출하고 군자를 등용하는 인적쇄신이다. 그는 율곡 이이가 성학집요에서 말한 ‘임금을 사랑하는 사람은 군자이고 작록(爵祿, 작위와 녹봉)을 사랑하는 사람은 소인이다’라는 대목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개 소인은 작록에만 마음을 쓰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롭다면 다른 것은 돌볼 겨를이 없으며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해치는 일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작록을 주는 권한이 임금에게 있으면 임금에게 아첨하고 권력 있는 신하에게 있으면 권력 있는 신하에게 빌붙고 외척에게 있으면 외척과 결탁하니, 심지어 적국과도 몰래 내통해서 제 임금을 물어뜯기까지 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이에 비해 ‘군자는 종묘와 사직을 위해 마음을 쓰고 백성을 위해 마음을 쓰기 때문에 임금을 바르게 할 수 있다면 다른 무엇에도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직무를 다하는 것이 의리라면 임금의 명령이라도 따르지 않고 바른 말을 다하는 것이 의리라면 임금의 위엄에도 굴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소인은 자신에게 권력과 부귀를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아첨을 바치는 자들로, 이를 충족시켜주지 못할 경우 임금이라도 언제든 배반해 버린다. 하지만 군자는 임금을 바로잡기 위해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고 임금의 뜻을 거역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태를 기준으로 소인과 군자를 구별하며 인사(人事)를 행하라는 것이다.

요컨대, 이상 신기선의 논의에 따르면 나라의 운명을 뒤바꿀 신묘한 방책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좋은 인재들이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으며 국가와 백성을 위한 실질적인 정책을 시행해 가는 것, 지극히 당연한 이 말이야말로 국가를 부흥하게 할 최고의 약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잘못된 전철을 밟으면서 경계할 줄 모르고, 겉치레를 없애지 않은 채 실속 없는 짓을 일삼으며, 어진 이와 간사한 자를 분별하지 않아 사도(邪道)가 정도(正道)를 이기게 한다면 위태로운 나라의 운명은 며칠을 못 가 끊어질 것이다. 다름 아닌 조선이 그랬던 것처럼.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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