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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잔인성의 끝은 어디인가

인간 잔인성의 끝은 어디인가

미드 ‘웨스트월드’, 미국 서부를 주제로 한 테마 공원의 로봇들과 무자비한 인간 손님들이 펼치는 섬뜩한 이야기
‘웨스트월드’에서 에반 레이철 우드(돌로레스, 오른쪽)와 제임스 마스던(테디)은 매일 모든 기억이 지워지도록 프로그램된 로봇으로 나온다.
미국 HBO의 새 드라마 시리즈 ‘웨스트월드: 인공지능의 역습’(국내 케이블방송 SCREEN에서 매주 금요일 밤 11시 방송)에서 돌로레스 애버내시(에반 레이철 우드)는 협곡과 절벽으로 둘러싸인 서부의 목장에서 살아간다. 그녀의 삶은 단순하다.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을 사랑하지만 바깥 세상이 늘 궁금하다. 가끔 잘생긴 청년 테디(제임스 마스던)가 말을 타고 나타나 “언젠가 당신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겠어”라고 말하지만 허황된 약속이다. 그는 툭하면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안 좋은 버릇이 있다.

어떤 날은 돌로레스의 목장에서 가슴에 총을 맞아 죽고, 어떤 날은 술집 밖에서 온몸이 총알 자국으로 벌집이 된 채 죽고, 또 어떤 날은 그의 시체가 햇볕 아래서 썩어간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돌로레스 앞에 다시 나타나 언젠가는 그녀를 그곳에서 데리고 나가겠다고 희망에 찬 약속을 늘어놓는다. 돌로레스는 “사람들이 ‘언젠가는’이라고 말할 때는 ‘그런 날이 절대 오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이 옳다. 사실 돌로레스는 거대한 테마 공원에서 ‘손님들’에게 만족감을 주기 위해 만든 로봇이다. ‘손님들’이란 주어진 대본에 따라 공원 안을 돌아다니며 로봇을 상대로 성폭행과 살인을 저지르고 가벼운 상처 하나 없이 돌아가는 인간 고객들을 말한다. 이 공원을 방문한 뒤 만족한 한 고객은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 혼자 와서 온갖 나쁜 짓을 다 해봤다. 내 인생 최고의 2주일이었다.”

이 섬뜩한 아이디어는 마이클 크라이튼 감독이 1973년 제작한 동명의 영화(국내 개봉 당시 제목은 ‘이색지대’)에서 따왔다. 리처드 벤자민과 제임스 브롤린이 테마 공원을 찾은 손님으로 나온다. 이들은 로봇(율 브린너)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크라이튼은 훗날 소설 ‘쥬라기 공원’에서 테마 공원의 오작동이라는 주제를 다시 다룬다). 마치 로봇이 만든 영화처럼 촬영도 전개도 어색한 이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인간 캐릭터에 대한 동정심을 전혀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로봇이 인간들을 빨리 없애주기만을 바라게 된다.하지만 드라마 ‘웨스트월드’[영화 ‘메멘토’(2000)와 ‘다크 나이트’(2008), ‘인터스텔라’(2014)의 대본을 공동 집필한 조너선 놀란이 각본을 썼다]는 크라이튼 감독의 영화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훌륭하다. 미국 서부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드라마는 인간들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우락부락한 인상의 에드 해리스가 가학성애에 사로잡혀 공원 깊숙한 곳으로 파고드는 손님 역할을 맡았다(그는 ‘이색지대’에서 율 브린너가 썼던 스테트슨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나온다).

‘웨스트월드’를 만든 로버트 포드(앤서니 홉킨스) 박사는 스릴에 목말라 하는 손님들에게 오락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왼쪽). 에드 해리스(오른쪽)가 가학성애에 사로잡혀 공원 깊숙한 곳으로 파고드는 손님 역할을 맡았다(오른쪽 사진).
이 드라마에 나오는 인간 캐릭터 대다수가 성폭행과 살인에서 기쁨을 찾는 냉혈한이다. 반면 수천 번 죽을 운명을 타고났으며 매일 모든 기억이 지워지도록 프로그램된 로봇들이 연민을 자아낸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1982)에 나오는 복제인간이나 기억상실증에 걸린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이들의 세계는 자신에게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을 기억해내지 않는 한 완벽하게 돌아간다.

놀란의 작품이 늘 그렇듯이 보르헤스(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수준의 자의식이 주제에서 오는 충격을 줄여준다. ‘웨스트월드’는 드라마라기보다는 메타픽션(작가가 독자에게 지금 읽고 있는 내용이 실제가 아니라 허구임을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쓰는 극이나 소설)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있다.

이 공원을 만든 로버트 포드(앤서니 홉킨스) 박사는 “손님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고 말한다. 포드는 ‘양들의 침묵’(1991)의 한니발 렉터처럼 부드러운 목소리 뒤에 사악함을 감춘 인물이다. 그는 스릴에 목말라 하는 손님들을 만족시킬 만한 오락거리를 주기 위해 노력한다. “손님들이 이곳을 다시 찾게 만들려면 뻔한 서비스로는 안 된다”고 그는 말한다. “자극적인 뭔가가 필요하다. 섬세한 차이가 그들을 이곳으로 다시 불러들인다.”‘웨스트월드’는 크라이튼 감독이 건드리지 않은 주제에 가까워지는 대목에서 가장 빛을 발한다. 로봇과 그것들을 제조한 인간들의 관계다. 한 수석 엔지니어(제프리 라이트)는 좋지 않은 기억 때문에 돌로레스와 일련의 테라피를 진행하는데 그 과정에서 돌로레스의 의식을 일깨우는 듯하다.

‘웨스트월드’의 디테일 묘사는 섬뜩할 정도로 완벽하다. 우유처럼 뽀얀 라텍스가 가득 찬 통에 로봇들을 빠뜨려 상처 투성이가 된 몸을 복구하는 장면이나 눈을 깜빡이지 않는 돌로레스의 얼굴 위를 날아다니는 파리에 초점을 맞춘 대목 등이다. 돌로레스는 앵그르의 목탄화에 그려진 여인처럼 얼굴이 부드럽고 아름답다. 그녀는 마치 마를렌 디트리히(1901~1992, 독일 태생의 미국 여배우 겸 가수)를 모델로 한 인조인간 같다.

감성적이면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는 우드의 연기는 으스스한 느낌마저 준다. 그녀가 슬픈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다가 “감정을 조절하라”는 라이트의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무표정해지는 장면은 압권이다. 강약 조절 능력이 기막힌 그녀의 연기는 커트 코베인의 파워 코드처럼 스릴이 넘친다.

- 톰 숀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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