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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삼의 ‘테드(TED) 플러스’] 왜 한국의 기업은 100년을 못 가나

[박용삼의 ‘테드(TED) 플러스’] 왜 한국의 기업은 100년을 못 가나

생물 면역시스템에서 배우는 장수기업 비결 …단기 수익보다 장기 안정성 고민해야
ⓒted.com
일본의 곤고구미(金剛組)는 세계에서 가장 장수한 기업이다. 백제에서 건너온 장인이 오사카 시텐노지(四天王寺) 등을 만들면서 시작되어 무려 40여 대를 이어져 왔다. 서기 578년에 설립돼 2006년에 망했으니 무려 1428년을 살았다. 망한 이유가 허망하다. 섣불리 부동산 사업에 나섰다가 대출금을 못 갚아서 다른 회사에 인수되고 말았단다. 백제의 자취가 사라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일본에는 이 외에도 오래된 기업들이 많다. 1000년 이상 된 기업이 7개, 200년 이상이 3000개, 100년 넘은 기업이 1만 5000개(개인 자영업을 포함하면 5만 개)에 달한다고 한다. 일본인 특유의 신중함과 대대로 이어진 장인정신 때문인 듯하다. 독일이나 네델란드 같은 유럽에도 몇백 년 된 기업들이 수두룩하다. 이해 비해 한국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1위 두산(설립년도 1896)에 이어 동화약품(1897), 몽고식품(1905), 광장(1911), 보진재(1912), 성창기업(1916)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조선 말기의 쇄국정책, 일제 강점, 한국전쟁 등이 원인이겠지만 케케묵은 사농공상 문화 탓도 크지 싶다.
 생물 면역시스템의 6가지 특징
12월 6일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1차 청문회에 출석한 9명의 대기업 총수들(앞줄). / 사진: 중앙포토
기업의 경쟁력이 국부를 좌우하는 시대다. 기업이 버는 돈은 직원의 월급이 되고, 그게 시장에 풀려 경제(소비지출)와 국가(조세)가 움직인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태극 마크를 단 우리 기업들이 100년, 200년 잘 버텨줘야 하는 이유다. 허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시니어 파트너인 마틴 리브스의 말에서 힌트를 찾아보자. 그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면역 시스템에서 터득한 100년 장수기업의 비법을 얘기한다.

생물의 면역 시스템은 6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림프구와 백혈구 같은 면역 세포를 미리 수백만 개씩 만들어 놓고 예상치 못한 사태에 대비한다(잉여, redundancy). 둘째, 백혈구뿐 아니라 B세포, T세포, 자연살해세포, 항체 등 다양한 세포들을 구비해 놓고 상황에 맞게 조합해서 대처한다(다양성, diversity). 셋째, 표면 방어막인 피부, 빠르게 반응하는 선천 면역계, 특정 목표에 특화된 적응면역계 등 모듈로 설계돼 있어 한 부분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부분이 대신한다(모듈화, modularity). 넷째, 사전에 겪어보지 못한 낯선 위협에 대해서도 적절히 맞춤 항체를 만들어 낸다(적응성, adaptation). 다섯째, 아무리 작은 위협도 미리 감지해 내고 한번 겪은 위협들은 나중을 위해 꼼꼼히 기록한다(신중, prudence). 마지막으로, 독립적으로 작동하기보다 신체라는 더 큰 시스템에 내장되어 신체의 다른 부분들과 조화를 이루며 기능한다(착근성, embe ddedness).

보통 사업을 한다고 하면 일종의 ‘기계적인’ 사고방식을 떠올리게 된다. 목표를 정하고 문제를 분석한 다음 계획을 수립하고 효율적으로 추진해서 최고의 성과를 내자는 식이다. 물론 좋다. 특히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서 단순한 문제를 다룰 때는 이런 사고방식이 아주 유용하고 효과적이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글로벌화와 정보기술(IT)의 발달로 비즈니스 환경이 매우 유동적이고 예측할 수 없게 바뀌었다. 미국 상장 기업들의 기대 수명은 30년에 못 미치고, 멀쩡했던 회사가 5년 후에 사라질 확률도 32%나 된다고 한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이라면 단기적 효율성 너머의 그 무엇이 필요하다. 이때 필요한 것이 면역체계가 가르쳐주는 6가지 원칙에 근거한 ‘생물학적’ 사고방식이다.

얼핏, 생물의 면역 시스템은 복잡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계획성이 약하고 낭비적이며 과잉 반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이런 방식이 더 효과적이다. 목표를 향해 공을 던지는 것보다 길들인 새를 풀어 날리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는 말이다. 공은 목표를 향해 최단거리로 날아가지만 갑자기 바람이 불거나 장애물이 나타나면 속수무책이다. 이럴 때는 비록 시간이 더디더라도 주변 상황에 맞춰 날아가는 새가 더 효과적이다. 로마 제국이나 가톨릭 교회가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생물학적으로 사고하라
‘100년 기업의 면역시스템’ 강연 동영상.
2012년 1월, 화학필름의 대명사였던 코닥이 파산했다. 이상한 것은 같은 시기, 같은 제품에, 똑같이 디지털 기술의 압박을 받았던 후지필름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후지는 화학, 재료공학, 광학 분야의 기존 지식을 가지고 화장품부터 의약품, 의료 시스템, 바이오 물질까지 여러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이중 몇몇 분야에서는 실패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생존과 성공을 위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넓혀 놓은 것이다. 신중함, 다양성, 적응성의 원칙이 후지를 살렸다.

1997년 2월, 거의 모든 도요타 차량에 장착되던 P밸브(브레이크용 부품)를 생산하던 아이신 세이키 공장이 화재로 전소했다. 도요타도 자동차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놀라운 것은 시장의 우려(그리고 경쟁사들의 표정관리) 속에서 도요타가 단 5일 만에 생산을 재개했다는 점이다. 부품 공급망 내의 업체들과의 협조로 최단 시간 내 설계 도면을 공유하고 대체 생산 라인을 확보해 낸 것이다. 모듈화된 공급망, 통합된 체계로의 착근성, 공급부족을 메운 잉여 능력이 도요타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다.

1849년에 설립된 프랑스의 에실로는 안경렌즈 업계의 선두 주자이다. 오랜 세월 여러 파괴적 신기술의 도래에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이득을 내며 성장하는 점이 놀랍다. 에실로는 경쟁 환경을 면밀히 조사해 혁신적인 신기술 후보들을 추려낸다. 그리고 경쟁사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자체 개발을 감행한다. 개발이 실패하거나 신기술이 제 살을 깎아먹을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말이다. 신중함과 적응성의 원리가 에실로의 160여 년 역사를 설명해 준다.

모든 스타트업들은 자연스럽게 생물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환경을 자기 마음대로 바꿀 만한 자원과 힘이 없고, 변화 충격을 완화해 줄 만큼 규모도 크지 않기 때문이다. 대기업도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하지만, 중간 성장 과정 어딘가에서 생물학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능력을 잃어버린다. 단기 성과에 매몰되면서 점차 관료화되어 가는 것이다. 장사 하루 이틀 하고 말 것이 아니라면 단기적 효율 못지 않게 장기적 안정성을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맞는 지배구조, 리더십,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지금과 같이 시계(視界) 제로의 상황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얼마 전 국회 청문회장에 우리나라 대표 기업들의 총수들이 한꺼번에 증인으로 호출된 적이 있다. 현장에 일렬로 앉아계신 총수들도, TV 생중계를 지켜보는 시청자들도 마음이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어긋날 착(錯) 섞일 잡(雜), 착잡(錯雜)이다. 사전에 보면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뒤섞여 어수선하다’는 뜻이라고 나온다. 재단 출연금의 대가성 여부는 국회나 법원에서 판단하겠지만 또 다른 궁금증이 든다. 과연 TV에 비취진 9개 기업 중 100년을 채울 기업이 몇 개나 될까. 미래를 예단할 수는 없지만, 미국 통계를 참고해 보면 반타작도 어려울 수 있다. 앞으로도 정경유착의 짐(혹은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확률은 더 우울한 쪽으로 기울고 만다. 해당 기업과 협력업체의 임직원들, 그 가족들, 인근 지역상인들의 운명을 떠올리면 머리가 아득해진다.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서 우리 기업들의 만수무강을 간절히 기원한다.

박용삼 - KAIST에서 경영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전자 통신연구원(ETRI)을 거쳐 현재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신사업 발굴 및 기획, 신기술 투자전략 수립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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