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트럼프는 종이 호랑이?

트럼프는 종이 호랑이?

중국을 잘 모르면서 자신의 협상 능력 과신하면 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상 약화시킬 수 있어
시진핑 주석(오른쪽)과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4월 6~7일 플로리다 주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로 선거운동을 하면서 ‘윈(win, 승리)’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러나 그의 행정부가 실제로 중국과 처음 대면했을 때 승리를 거둔 쪽은 중국이었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지난 3월 취임 후 첫 아시아 순방으로 한국과 일본을 거쳐 중국을 방문하면서 미중 관계의 기반을 ‘윈-윈 협력 정신’으로 묘사했다. “미국은 중국과 충돌하거나 대치하지 않고 상호존중과 협력으로 ‘윈-윈’하고 싶다.” 그 말은 중국이 오래 전 기정사실화한 개념을 되풀이한 데 불과했다.

몇 주 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플로리다 주 마라라고 리조트 정상회의(4월 6~7일)를 앞둔 시점에서도 그 표현이 미국과 해외의 고위급 외교정책 논의에서 되풀이됐다. 중국의 입장에선 미국과의 ‘윈-윈’과 ‘상호존중’이란 아시아·태평양에서 중국이 독보적인 존재임을 확인해주는 암호와 다를 바 없다. 미중 관계에서 ‘초보자’라고 할 수 있는 트럼프 대통령과 틸러슨 국무장관 등은 별 생각 없이 내키는 대로 성명을 내고 협박조로 말할 수 있겠지만 중국 지도부는 표현 하나하나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틸러슨 국무장관의 방중 후 미국의 전통적인 동맹국들은 당혹스러워한 반면 중국은 아주 흡족한 미소를 띤 이유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이나 틸러슨 국무장관이 시진핑 주석의 방미 중 공개적인 언급에서 그 표현을 반복하진 않았다. 그러나 두 정상의 첫 대면에 관해 트럼프 대통령이 자화자찬했음에도(그는 짧은 성명에서 자신과 시진핑 주석과의 관계를 두고 ‘아주 좋다’고 표현했다) 구체적인 성과가 없다는 사실은 트럼프 행정부의 중국 정책을 둘러싼 불확실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트럼프는 대통령 당선 직후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 느닷없이 통화해 중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미국평화연구소의 아시아 프로그램 선임고문인 데릭 미첼(버락 오바마 1기 행정부에서 국방부 동아태 담당 수석부차관보를 지내며 아시아 안보정책을 총괄했고 나중에 미얀마 주재 미국 대사도 역임했다)은 “아시아 관측통과 동맹국들 사이에서 그처럼 많은 불안과 우려를 불러일으킨 정상회담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미중 관계를 둘러싼 혼란과 혼동 때문이었다.” 그가 말한 관측통과 외교관들이 우려한 점은 그 때문에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더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엄포성 발언으로 압박을 가하며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이 ‘아주 어려운 일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 건 사실이지만 그의 행정부는 중국 지도부의 생각을 잘 읽지도 못하면서도 순진하게 넘겨짚거나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에 자신 있다는 자만심이 앞서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얘기다.

중국은 트럼프의 대선 선거운동에서 본의 아니게 돋보이는 역할을 맡았다. 부동산 거물인 트럼프 후보가 세계화를 거세게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 부정적인 영향의 사례로 중국을 주연급 악당으로 띄운 것이다. 트럼프의 후보 시절 유세 연설과 트윗에 따르면 중국은 수십 년 동안 어리석고 무능한 미국 정치인들을 잔꾀로 속여 이용했으며, 공정하지 못한 무역 관행으로 미국 근로자들의 일자리를 훔쳤다.

그는 자신의 정부가 들어서면 그 모든 것이 중단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또 취임 즉시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는 한편 중국산 수입품에 45%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정작 대통령에 취임한 후엔 그 공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백악관 고위 참모는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그 두 가지 사안 모두 주요 의제가 아니라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환율조작 문제는 재무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고 백악관 측은 기자단 브리핑에서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만 문제에서도 입장을 번복했다. 그는 당선 직후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 느닷없는 전화통화로 중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런 행동은 곧바로 트럼프 정부가 대만 독립을 지지할 것이라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대만을 자국 영토의 일부로 주장하는 중국은 미국이 오랜 합의를 깨려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취임 직후인 지난 2월 트럼프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과 통화하며 ‘하나의 중국’ 원칙을 재확인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초기 중국 정책 대부분은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전략가와 피터 나바로 국가무역위원회(NTC) 위원장이 주창하는 강경 대치 접근법을 중심으로 했다. 그와 달리 양국 정부의 대화를 트고 긴장을 완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참모는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과 틸러슨 국무장관이었다.
틸러슨 국무장관.
오바마 대통령의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을 지낸 에반 메데이로스(백악관을 떠난 뒤 글로벌 리스크 컨설팅 업체 유라시아그룹의 아시아 실장으로 일한다)는 “여러 이유에서 중국은 미국과 적극 대화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정상 간의 개인적 관계를 최대한 활용해 불확실성을 줄이고 싶어 한다.” 여러 소식통과 보도에 따르면 쿠슈너 선임고문이 지금까지 주미 중국 대사와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조기 정상회담도 성사시켰다.

매튜 포팅어 NSC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도 중국과의 주요 교섭 담당자였다. 중국어에 능통한 기자 출신이자 참전군인인 포팅어는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회담에서 다뤄질 의제를 설정하는 데 깊이 관여했다고 알려졌다. 아시아 지역의 한 외교관은 그를 “분별력 있는 중국통”이라고 표현했다.

NSC의 선임보좌관이 트럼프의 백안관에서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역시 쿠슈너 선임고문과 틸러슨 국무장관처럼 덜 적대적이고 협력적인 중국 관계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메데이로스의 지적처럼 트럼프 정부의 중국 정책을 실용파와 강경파 사이의 주도권 다툼으로 묘사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외 다수는 미국의 중국 정책이 오락가락한다고 본다. 트럼프 정부가 구체적인 정책을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한 아시아 지역의 외교관은 “트럼프 정부에선 중국 정책과 관련해 실질적인 목표에 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하다”고 말했다.

미중 정상회담에 들어가면서 백악관은 양국의 무역 관계와 북한 핵프로그램이 주요 의제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참모들은 정확히 트럼프 대통령이 그 두 가지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밝히지 않았다. 백악관의 한 관리는 “각 의제에 관한 각본을 미리 짜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전임자들과는 딴판이다. 경험 많은 외교정책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런 정상회담은 대개 철저히 마련된 사전 각본에 따라 진행된다. 정상들이 머리를 맞대기 훨씬 전에 회담의 결과가 정해진다는 뜻이다. 이번 미중 정상회담과 관련해 가장 명확히 드러난 미국의 목표는 향후 양국의 논의를 위한 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정상회담이 끝난 4월 7일 백악관 관리들은 그 외에 더 추가할 사안이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시진핑 주석과 만났을 때 취한 그런 자유분방한 접근법으로 중국은 미국 정부의 생각이 과연 무엇인지 추측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절차와 의전을 중시하는 중국 정부는 불안해 했을 게 뻔하다. 그러나 일부 관측통은 정상회담과 미중 관계에서 미국의 정해진 목표가 없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미국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메데이로스는 “국제관계에서 불확실성과 모호성은 양날의 칼”이라고 설명했다. “약간 모호한 태도를 보이면 협상 파트너는 진전을 보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느낄 수 있지만 반면 너무 불확실하면 신뢰를 잃는 역효과가 난다.”
틸러슨 국무장관과 쿠슈너 선임고문(사진)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참모들은 경험이 부족해 미중 관계의 미묘한 성격을 잘 모른다.
명확한 전략이 없는 상태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거나 나중에 돌아올 모든 대가를 알지 못하고 중국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큰 문제다. 미첼은 “지금 트럼프 정부 관리들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있다”고 말했다. 쿠슈너 선임고문과 틸러슨 국무장관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참모들은 경험이 부족해 미중 관계의 미묘한 성격을 잘 모르면서 자신이 똑똑하다고만 생각하고 오히려 문제를 만들 수 있다고 그는 경고했다. “그처럼 무역이나 투자 거래에만 초점을 맞추면 돌이키기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

그처럼 모든 일을 거래와 협상으로 보는 사고방식의 좋은 본보기가 대만 문제에 관한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 번복이다. 처음에 트럼프 대통령은 대만 문제를 중국과의 협상에 이용하려고 했다. 무역과 관련해 중국으로부터 양보를 받아내기 위한 하나의 협상 카드로 생각했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중국과 대만 양측 모두 반발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그 노선을 포기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그런 행동은 중국의 이웃나라들을 불안케 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용하지 않아 중국의 거센 압박을 받고 있는 대만 정부는 중국과 미국이 대만을 양국관계 개선의 흥정물로 삼을 것을 경계한다. 특히 틸러슨 국무장관의 ‘윈-윈’ 관계 발언이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에 자유 재량권을 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주변국들은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미첼은 “아시아 지역 국가들은 미국과 중국의 협상 도구로 이용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정상회담 직전 틸러슨 국무장관은 “상호존중, 안보, 번영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미국은 중국과 협력하고 싶다”고 말하는 동시에 미국의 아시아 동맹국들을 향한 변함없는 지지도 강조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과연 그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느냐는 것은 해석하기에 달렸다.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는 국가들로선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들 모두가 잘 알듯이 때로는 ‘윈-윈’이라고 내세우는 것이 실제론 패배를 뜻한다.

- 에밀리 카데이 뉴스위크 기자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10만전자·20만닉스 간다더니 ‘뚝’…“반도체 비중 줄여야할까?”

2女 평균수명 ‘90세’ 넘었다…보험사들 새 먹거리는 ‘요양사업’

3LGD가 해냈다…‘주사율·해상도 조절’ 세계 첫 OLED 패널 양산

4‘전기차 올림픽’에 LG가 왜 출전?…“영향력 상당하네”

5“포르쉐 안 부럽잖아”...중국 시장 홀린 스웨덴 폴스타

6미국 주택에 스며든 삼성전자 가전…건설사 ‘클레이턴’에 패키지 공급

7포스코그룹, 이차전지소재 사업 강화…‘실리콘 음극재’ 공장 준공

8 서울대·울산대·원광대 의대 교수들, 주 1회 휴진…‘의료 공백’ 심화 조짐

9페퍼저축은행, 제2회 페퍼저축은행배 전국장애인양궁대회 성료

실시간 뉴스

110만전자·20만닉스 간다더니 ‘뚝’…“반도체 비중 줄여야할까?”

2女 평균수명 ‘90세’ 넘었다…보험사들 새 먹거리는 ‘요양사업’

3LGD가 해냈다…‘주사율·해상도 조절’ 세계 첫 OLED 패널 양산

4‘전기차 올림픽’에 LG가 왜 출전?…“영향력 상당하네”

5“포르쉐 안 부럽잖아”...중국 시장 홀린 스웨덴 폴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