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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23) 한명회의 두 가지 장면] 공이 많은 참모의 오만, 그 쓸쓸한 최후

[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23) 한명회의 두 가지 장면] 공이 많은 참모의 오만, 그 쓸쓸한 최후

한명회, 오만에 젖어 왕의 권위에 도전 … 보스의 비밀·약점 아는 참모가 때론 가장 무서운 적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천안시 수신면에 있는 한명회의 묘.
# 장면 1. 1467년(세조 13) 5월 16일, 회령 절제사를 지냈던 함길도의 토호 이시애가 절도사(군사령관) 강호문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켰다. 강호문이 한명회, 신숙주, 노사신, 김국광 등 조정 대신들과 짜고 역모를 도모했기 때문에 자신이 먼저 처단했다는 명분이었다. 이시애는 당시 조정의 실세들을 모두 거론했는데 이는 조정에 혼란을 주기 위한 것으로 일종의 기만전술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세조는 이것이 이시애의 농간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함께 거명된 다른 신하에게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유독 한명회와 신숙주는 가둬버린다. 병을 앓고 있던 한명회는 가택 연금되었고 신숙주는 투옥된 것이다(세조13.5.19). 이는 세조가 두 사람에게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함길도는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해 조선에서도 가장 강력한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이다. 한명회와 신숙주는 모두 함길도 도체찰사(정승이 맡는 임시관직)를 역임한 바 있는데다 신숙주의 아들 신면이 현재 함길도 관찰사(도지사)로 재임 중이다. 두 사람은 사돈지간이고 절친한 친구 사이이기도 하다. 만에 하나 이시애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에게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보름여가 지난 6월 6일에야 풀려났다. 신숙주의 아들 신면이 이시애의 반군에게 피살되는 등 두 사람이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 뒤였다. 세조도 참소(거짓으로 헐뜯는 말)만 듣고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신하들을 가뒀다며 사과했는데 한명회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일선에서 물러난다. 상당군(上黨君)의 군호를 가진 공신으로 국정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세조가 승하하는 이듬해 9월까지 관직을 맡지 않은 것이다. 세조의 의심을 받은 이상 철저히 자세를 낮춰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 장면 2. 1481년(성종 12) 6월, 한양에 온 중국 사신이 한명회가 한강변에 지은 압구정(狎鷗亭)을 구경하고 싶다고 청했다. 압구정의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중국 사신을 따로 영접하는 것은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사안으로 한명회는 이 사실을 성종에게 아뢰며 압구정이 좁아서 사양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성종도 동의했는데, 하지만 한명회의 속마음은 달랐던 것 같다. 바로 다음날 그는 압구정에서 중국 사신을 위한 연회를 열겠다며 임금이 사용하는 보첨만(補簷幔, 처마에 잇대어 펼치는 장막)을 쓰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에 대해 성종은 “경이 이미 중국 사신에게 정자가 좁다고 말했다면서 이제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 내 생각으로는 이 정자는 헐어 없애야 마땅할 것이다. 중국 사신이 중국에 가서 이 정자의 풍경이 아름답다는 것을 말하면, 앞으로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오는 사람마다 모두 가서 관람하려 할 것이니 이는 폐단을 여는 일이다. 또 강가에 정자를 꾸며서 경치를 관람하는 곳으로 삼은 자들이 많다고 하는데 나는 아름다운 일로 여기지 않는다. 내일은 제천정(濟川亭)에서 사신을 접대하라”(성종12.6.25)고 명령했다. 신하가 사사로이 지은 정자에서 중국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여는 것은 옳지 못하니 국가 소유인 제천정으로 장소를 옮기라는 것이었다. (지금의 한남동에 위치해 있던 제천정은 이곳에서 바라보는 한강과 달빛이 아름다워 한양의 열 가지 절경 중 하나로 꼽혔다고 한다).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의 위세를 드러내고 싶었던 한명회에게 경고를 보냄과 동시에 권세가들이 한강변에 앞 다투어 정자를 지으며 사치를 일삼는 풍조를 바로잡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자 한명회는 “정자가 좁고 더위가 심하기 때문에 그리 아뢴 것입니다. 신의 아내가 본래 고질병이 있는데 이제 또 악화되 었으므로 그 병세를 보았다가 만약에 심하면 신은 제천정 행사에 가지 못할 듯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자신의 압구정에서 잔치를 열겠다고 할 때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다가 성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아내의 병을 이유로 중국 사신 접대에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아 언짢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신하로서 용납될 수 없는 발언이었다. 때문에 한명회를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고 진노한 성종은 나라에서 공식적인 행사를 여는 제천정과 희우정(喜雨亭, 지금의 합정동)을 제외한 모든 정자를 헐어버리게 했다. 그리고 한명회를 국문하도록 명한다(성종12.6.26). 성종은 이 일로 한명회의 직첩(職牒, 국가에서 내려진 관직 임명장)을 회수했는데, 한명회가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 한씨의 아버지이자, 정난(靖難)·좌익(佐翼)·익대(翊戴)·좌리(佐理) 1등 공신 등 신하로서 최고 영예인 1등 공신의 칭호만도 4개나 가진 원훈(元勳)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에 그칠 수 있었다. 이후 한명회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으로서 조정에 출사하기는 했지만 정치적 영향력을 거의 대부분을 상실하게 된다.
 자신의 이익 위해 왕명 거역한 한명회
이상 한명회의 두 가지 장면은 큰 공을 세운 최측근 참모의 처신은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참모가 보스를 위해 많은 공을 세웠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보스가 그 참모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는 의미다. 참모가 보스의 최측근, 핵심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보스의 비밀을 많이 알고 보스의 약점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 참모가 게임의 판을 뒤흔들고 보스를 최고권력자로 옹립할만한 지략과 실력을 가졌다면, 그 참모는 보스에게 꼭 필요하지만 어렵고 불편한 참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의심스러운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자기편일 때는 가장 든든한 참모지만,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그만큼 무서운 적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조가 반란군의 허무맹랑한 주장만 듣고 한명회를 연금시킨 것은 그래서이다. 더욱이 세조는 의심이 많기로 유명한 군주로서, 한명회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세조의 재위기간 내내 세조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며 살얼음판을 걷듯 몸조심해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조심하던 한명회가 오만에 젖어 선을 넘어선 순간 그는 급격히 몰락하게 된다. 성종에게 한명회는 세조에게 한명회 못지않게 중요한 신하였다. 정치적인 비중에서만큼은 그보다 더 컸을지도 모른다. 수양대군을 도와 세상을 뒤엎고자 했던 아웃사이더 책사는 삼정승을 두루 거치고 네 번의 1등 공신이라는 광휘를 등에 업은 노회한 재상이 되었고, 두 딸을 왕비로 출가시킨 임금의 장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왕위 계승 서열에서 뒤로 밀려 있던 자을산군(성종)이 보위에 오르는 데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런 위상에 취했기 때문일까. 한명회는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잘못을 저질렀고 결국 권세를 잃고 쓸쓸함을 탄식하며 눈을 감게 된 것이다(성종18.11.14). 공이 많은 참모일수록 보스에게 더욱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것, 자신의 공을 믿고 보스의 권위를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이 교훈을 전해주면서 말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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