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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중의 사진, 그리고 거짓말] 해석의 가능성 열어둔 제목 붙여야

[주기중의 사진, 그리고 거짓말] 해석의 가능성 열어둔 제목 붙여야

작가와 감상자의 상호작용 속에서 작품의 새로운 가치 생성
Nostalgia, 2016
이미지는 글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하고 미묘한 감성이 달라붙어 있습니다. 이미지가 예술작품의 형식으로 나타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낯선 이미지를 보면 글의 문법으로 이를 해석하려 듭니다. 작품의 제목과 작가노트를 읽어 보고 힌트를 얻습니다.

제목이 구체적인 대상을 지시하면 해석이 수월해집니다. 그러나 숫자나 기호 등 모호한 표현으로 돼 있을 때는 미로 속을 헤매게 됩니다. 오히려 ‘무제’가 마음은 편합니다. 어땠거나 이미지에 제목이나 설명이 붙는 순간 그 해석은 텍스트의 ‘감옥’에 갇히기 쉽습니다. 해석의 문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목·설명 붙이면 텍스트의 감옥에 갇히기 쉬워
사진에 제목을 붙이는 일이 참 어렵고 조심스럽습니다. 찍는 일보다 제목 다는 일이 더 부담될 때도 있습니다. 단순한 지시 대상을 붙이기에는 무성의 한 것 같고, 그렇다고 내 느낌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려니 강요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미지 속에 숨겨진 속마음을 들키기 싫을 때도 있지만, 속을 몰라줄 때는 서운하기도 합니다. ‘낚시성’ 제목으로 감상자의 눈길을 잡으려 애쓰기도 합니다. 가끔은 난해한 제목으로 감상자와 해석의 게임을 벌이기도 합니다. 제목 달기의 정답은 뭘까요.

예술은 시대정신을 반영한다고 합니다. 제목을 다는 것은 작품 해석과 관련이 있습니다. 미학이론을 잠깐 들여다볼까요. 과거에는 작품의 해석이 ‘생산자(작가)’ 중심이었습니다. 작품의 주체로서 작가의 의도를 중시합니다. 작가와 작품 사이를 추적해 작품을 풀어냅니다. 이를 ‘생산미학’이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그 반대 개념인 ‘수용미학’이 중심이 됩니다. 1960년대 후반 독일의 비평가 야우스가 주창한 이론입니다. 작품과 수용자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춥니다. 쉽게 말하면 작품의 해석을 독자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일리 있는 얘깁니다. 작품은 감상자가 있어야 존재가치를 갖는 것이니까요. 이 수용미학은 예술뿐 아니라 산업, 즉 생산자와 소비자 관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수용미학의 ‘원조’는 플라톤이라고 합니다. 플라톤은 마구와 마부, 대장장이를 예로 들며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마구(馬具)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이를 만드는 대장장이가 아니라 사용자인 마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대장장이는 마부의 의견을 존중하고, 마부에게 배워야 된다고 합니다. 듣고 보니 그럴 듯합니다. 마구가 좋은지 아닌지는 마부가 가장 잘 압니다.

우리나라의 기업인 삼성과 LG가 세계적인 전자 업체로 거듭난 것도 AS시스템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합니다. 소비자(사용자)의 의견을 제품에 충실하게 반영하며 더 나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거꾸로 사용자가 생산자가 되기도 합니다.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스팀 청소기’는 사용자인 주부가 창업해서 만든 것입니다. 사진은 정도가 더 심합니다. 수용자 입장에 있던 사람들이 ‘디카’가 등장하면서 너도 나도 생산자 대열에 합류합니다. 누구나 부담 없이 사진을 즐기는 디지털 시대입니다. 사진은 ‘민주화’가 됐습니다. 전국민의 작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작품은 더 이상 작가의 독점적인 전유물이 아닙니다. 작품은 감상자가 있어야 존재가치가 있습니다. 작가와 감상자의 상호작용 속에서 작품의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진에 제목을 붙일 때는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좋습니다.
 작품이 작가의 전유물 아닌 시대
사진은 2016년 개인전을 할 때 출품했던 ‘Nostalgia’이라는 작품입니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수종사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해돋이를 보고 절을 나오다가 분홍빛 꽃이 눈에 꽂혔습니다. 흔한 꽃인데도 눈길을 잡아 끄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기억을 자극합니다. 한참 동안 바라보며 기억의 데이터베이스를 돌렸습니다. 순간 어릴 때 봤던 어머니의 분갑이 생각났습니다. 화장할 때 바르던 동그란 분갑에 있던 꽃이 생각났습니다. 저고리 문양도 떠오릅니다. 이불 호청에서도 본 듯한 꽃입니다. 노스탤지어가 느껴지는 꽃입니다.

처음에는 사진 제목을 ‘분갑의 꽃’이라고 붙였습니다. 분갑이라는 말은 요즘은 쓰지 않습니다. 40, 50대 이상이 돼야 그 뜻을 압니다. 분갑의 기억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작품 해석의 실마리를 주기 위해 구체적인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전시회 리플렛에 작가노트까지 붙였습니다. ‘두껑을 열면/엄마 냄새가 나는/분갑의 꽃/노스탤지아의 향/엄마는 ‘꽃가라’를 좋아했지.’

친절하게 해석까지 붙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을 감상자들에게 강요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미지에 대한 감성은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진 제목을 ‘분갑의 꽃’에서 좀 더 넓고, 큰 개념인 ‘향수’를 뜻하는 ‘Nostalgia’로 바꿨습니다(계속).

※ 필자는 중앙일보 사진부장을 역임했다. 현재 아주특별한사진교실의 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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