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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비서는 왜 모두 여자 음성일까

가상비서는 왜 모두 여자 음성일까

영화 속에서 여성 인공지능은 대개 순종적인 노예 같은 역할로 많이 그려져 성에 관한 고정관념 고착화한다
인공지능을 종속적인 여성으로만 상상할 때 위험하고 구시대적인 고정관념이 강화된다. / 사진:ELAINE THOMPSON-AP-NEWSIS
가상비서의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면서 우리의 일상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오고 있다. 실생활에선 알렉사(아마존)·코타나(MS)·홀리(구글)·시리(애플)로, 영화에선 서맨사(‘그녀’), 조이(‘블레이드 러너 2049’), 마블 영화의 인공지능들, 프라이데이(‘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카렌(‘스파이더맨: 홈커밍’) 등이다. 이들 이름은 차량 네비게이션부터 시리까지 가상 비서의 음성이 여성이라는 가정을 뒷받침한다. 이는 인공지능의 미래에 관한 성(gender) 고정관념·기대·가정을 강화한다.

물론 픽션의 세계에 남자 목소리도 존재하지만 요즘엔 크게 줄었다. 할-9000이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 음성 인공지능이다. 50년 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통해 대중의 상상 속으로 들어왔으며 지각 능력을 갖고 인간을 위협하는 인공지능 컴퓨터다.

전에는 특히 신기술이 사악해지거나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스토리에 (할처럼) 남자 인공지능이 더 흔히 등장했다. 반면 여자 인공지능은 대개 순종적인 노예 같은 역할로 많이 그려진다. 또 다른 패턴은 픽션 속 인공지능의 체현(體現) 여부와 관련된다.

신체를 갖게 될 때는 터미네이터로부터 ‘아이, 로봇’의 써니,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슈퍼악당 울트론에 이르기까지 남자로 체현하는 경향을 띤다. 체현한 인공지능 리스트에서 눈에 띄는 예외로는 ‘엑스 마키나’의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 정도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창조자를 죽인 뒤에도 통제를 벗어난 위협이라기보다 피해자로 비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마블 스튜디오가 제작한 영화 시리즈의 영화적 세계관) 특히 토니 스타크(아이언맨), 그리고 2017년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인공지능들은 그 미래에 관해 흥미로우면서 다소 문제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 미래의 인공지능이 주로 여성으로 그려지는데 이들 상상 속 인공지능의 미래에선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마블 비서들
칠레에서 시위 중인 페미니스트 여성의 등에 ‘가부장제·도덕·국가를 불태워라’는 문구가 적혔다. / 사진:LUIS HIDALGO-AP-NEWSIS
적어도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3)에서 스타크의 지각 능력 인공지능 자비스가 죽은 이후 픽션 속 인공지능은 거의 여성의 전유물이 됐다. 스타크는 자신의 어릴 때 집사를 인공지능의 모델로 삼아 그의 이름을 따서 자비스로 불렀다. 자비스는 울트론과의 싸움에서 파괴된다(나중에 새로 체현된 인간형 로봇 캐릭터 ‘더 비전’의 일부가 된다). 스타크는 그 뒤 자비스의 백업이나 또 다른 남자 음성 인공지능이 아니라 프라이데이(케리 콘던의 음성 연기)로 자신의 운영체제를 대체한다. 프라이데이는 훨씬 주목도가 떨어지는 캐릭터다. 스타크가 자비스에 부여했던 복잡한 동반자 역할과 달리 비서나 다름없는 훨씬 더 부차적인 역할로 밀려났다.

마찬가지로 ‘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서 스타크는 피터 파커(톰 홀랜드)에게 여자 음성의 이름 없는 가상 비서가 딸린 슈퍼 수트를 선물한다. 피터는 처음에는 그녀를 ‘수트 레이디’로 부르다가 뒤에 카렌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피터는 자신의 수트에 이름을 부여해 개성과 정체성을 불어넣지만 더 나이 든 남자 목소리였다면 자신을 돌봐주는 동반자로 수트를 상상하려 했을지 의구심이 든다.

카렌은 피터를 훈련시켜 능력을 키우도록 설계된 스파이더-맨 수트용 가상 도우미다. 그러나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카렌은 피터의 친구 역할을 맡게 된다. 학교에서 그가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접근하도록 권하기도 한다. 여기서도 그 여자 음성의 인공지능은(어머니 또는 누이로서) 그를 보살피는 역할을 맡는다. 카렌 인공지능을 또 다른 제한적인 여성 스테레오타입의 틀에 끼워 맞춘다. 여자 음성 또는 육체의 인공지능은 남자 인공지능과 역할이 다르다는 기대를 유발한다. 이는 여성은 과학자보다 비서 역할에 더 어울린다는 사고를 고착화시킨다.
 블레이드 러너의 조이
인공지능의 또 다른 고전적인 사례는 ‘블레이드 러너(1982)’와 그 바이오 로봇 안드로이드인 레플리컨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복제인간은 위험한 외계행성의 식민지화부터 성노동자 역할까지 미래의 인간이 원치 않는 일을 하도록 설계·제조됐다. 이들은 인간 창조자보다 더 강하고 종종 더 똑똑하기도 하지만 수명이 짧아 말 그대로 어떻게 주도권을 잡을지 알아낼 만큼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다.

더 최근에 나온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복제인간 기술을 발전시켜 조이(아나 디 아르마스)라는 판매용 지능형 홀로그램 동반자를 선보인다. 영화에 등장하는 조이는 에이전트 K(라이언 고슬링)의 동반자다. 처음에는 그의 자택 프로젝터에 갇혀 지내지만 그 뒤 K가 에머네이터라는 휴대형 기기를 구입하면서 어느 정도 자유를 얻는다(하지만 여전히 K의 움직임으로 조종된다). 조이는 오늘날 디지털 비서의 논리적인 확대판이며 스토리의 전면에 등장하는 극소수 여자 인공지능 중 하나다.

그러나 결국 조이도 ‘여러분이 듣고 보기를 원하는 모든 것’으로 판매되는 기업의 개발품이다. 소비용으로 만들어지고 개조되고 판매되는 상품이다. 홀로그램 육체 덕분에 약간 더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그녀의 목적은 여기서 거론된 가상 비서와 다르지 않다. 대체로 남자 주인을 모시는 일이다.
 종속적인 여성들
인공지능을 종속적인 여성으로만 상상할 수 있게 될 때 위험하고 구시대적인 고정관념이 강화된다. 우리의 신기술 이상뿐 아니라 현재의 경험 속에 순종적인 노예 같은 여성의 모습을 불어넣을 때 어떤 편견이 고착화될까? 공상과학이 과학의 미래에 대한 우리의 희망과 두려움을 반영할 뿐 아니라 그 밑거름이 된다는 점에서 이는 중요한 문제다. 영화 속에 그려지는 미래상은 IT업계 종사자들이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면서 픽션의 세계에서 형성된 기대를 구현하려 힘쓸 때 그들에게 영감을 준다.

영화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실세계에서 기본 설정된 가상 비서도 여성인 경우가 많다(시리, 알렉사). 그러나 어느 정도 변화의 가능성도 보인다. 구글은 지난 5월 구글 어시스턴트의 음성 6종을 새로 추가하면서 기본 설정 음성에 ‘홀리’라는 여성의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최근 발표한 업데이트에선 이름 대신 무작위로 색깔을 부여했다. 특정 색상에서 남자 또는 여자를 연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는 발전적인 방향이지만 기술 개발과 관리를 똑같은 사람들이 담당하는 한 기술의 진보는 불가능하다. 어쩌면 실리콘밸리에 여성 종사자가 늘어나면 기술의 상상·개발 방식 그리고 사운드와 외양에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인류에 가능한 미래를 제시하는 방식을 개선하고 미래의 창조자들에게 영감을 주기 위해서는 할리우드 영화 출연진과 제작진의 다양성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 에이미 체임버스



※ [필자는 영국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 영화학과 부교수다. 이 기사는 온라인 매체 컨버세이션에 먼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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