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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세기의 담판(6) 사명당 유정, 맞춤형 특사] 불교 숭상하는 일본의 불교신자 적장 공략

[김준태의 세기의 담판(6) 사명당 유정, 맞춤형 특사] 불교 숭상하는 일본의 불교신자 적장 공략

왜장 가등청정과 네 차례 만나고 적진 정세 분석… 조선의 승군 지휘하고 당상관에도 올라
일러스트 김회룡
임진왜란 직후 한 승려가 적의 평화 의지를 확인해 오라는 임금의 명을 받았다. 일본으로 건너간 이 승려는 자신을 시험하려 든 왜의 관리들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비바람을 일으키는 등 신통한 도력을 보여주며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도일한 지 8개월 만에 조선 백성 3000여 명을 구출해 귀국했다(선조실록38년4월1일; 인원은 사료에 따라 다르다). 여기서 신력(神力) 부분은 야사에 등장하는 것으로서 물론 믿기 힘들다. 다만 당대에부터 이런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은 조선 사람들이 느낀 놀라움을 보여준다. 산중에 있던 수행자가 적국으로 건너가 담판에 성공하고 수많은 백성을 구해서 돌아온 것, 더욱이 그 적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 그에 대한 감탄이 신격화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스승인 서산대사 휴정(休靜)과 함께 승군(僧軍)을 일으켜 전장으로 나섰던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불교 배척한 조선에서 실직에 임명
임진왜란이 발발할 당시 금강산 유점사에 머물고 있던 유정은 왜군이 쳐들어오자 인근 고을의 백성들을 지켜낸 후 평양으로 가 평양성 탈환 작전에 참여했다. 이후 조정으로부터 선교종판사(禪敎宗判事), 도총섭(都摠攝)에 제수되며 연로한 스승의 뒤를 이어 조선의 승군을 총지휘하는 자리에 오른다(선조26.3.27). 유정이 세운 공은 눈부셨는데, 선조가 여러 차례 비망기를 내려 치하했을 뿐 아니라 파격적으로 당상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그것도 명예직이 아니라 실제 관직으로.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했던 조선에서 승려를 실직에 임명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는 유정이 조야를 막론하고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으로, 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사관조차 “강적이 충돌해오자 장수들은 정신이 아득하여 두려움에 떨었고, 적을 참하고 사로잡은 공은 도리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늙은 승려에게서 나왔으니 무사들의 수치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다(선조 26.4.12).

그런데 전쟁터에서 활약하던 사명당 유정은 1594년(선조 27년)부터 외교에 투입되기 시작한다. 그것도 잔인하기로 소문난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과의 교섭을 담당하게 됐다. 왜군의 제2군을 이끌었던 가등청정은 풍신수길(豐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는 인물로 1군대장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과 더불어 왜군 전체를 대표하는 위치였다. 함경도 방면을 담당하며 조선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기도 했다. 이러한 가등청정이 때마침 소서행장과 반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조정은 왜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내부를 이간시키기 위해 파견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외교에 능한 관리도 아니고 왜 승려인 유정이 그 임무를 담당하게 됐을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일본은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다. 그즈음 승려 센리큐는 일본 정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승려 현소는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했다. 승려가 곧 지식인을 대표하는 존재로 일본 전체에 승려를 존경하는 문화가 있었다. 특히 가등청정은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승려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인물이다.

그를 상대하기 위한 맞춤형으로 조선에서도 승려를 선택한 것이고, 그중에서도 지식인으로서의 소양, 수행자로서의 역량, 승단에서의 명망과 위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유정을 고른 것이다. 실제로 유정을 만난 가등청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금강산의 대선사(大禪師)가 왕림하셨으니 한없이 기쁩니다. 신불(神佛)과도 같은 분과 금석지교를 맺게 되었으니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가등청정의 말만 보면 두 사람의 회동은 화기애애했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유정은 가등청정을 호걸이라고 추켜세우고 정적 소서행장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여 그의 기분을 살려주면서도, 가등청정의 무리한 주장에 대해서는 면전에서 조목조목 반박했다. 심지어 이런 일화까지 있다. 가등청정이 유정에게 “귀국에는 무슨 보배가 가장 귀합니까?”라고 묻자 유정은 “우리나라에는 다른 보배는 없고 오로지 그대의 머리를 보배로 여깁니다”라고 대답했다. 가등청정이 “무슨 말입니까?”라고 다시 묻자 유정은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대의 머리에 황금 1000근과 식읍 1000호를 상으로 내걸고 있으니 참으로 귀하지 않습니까?”

그뿐만이 아니다. 부채에 글씨를 써달라는 가등청정의 부탁에 유정은 “올바름에 입각해 바르게 행동해야 하고 이익을 꾀해서는 안 된다. 밝은 곳에서는 해와 달이 내려다보고 어두운 곳에서는 귀신이 지켜보고 있나니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털끝만큼이라도 취해서는 안 된다”라는 글을 남겼다. 승려의 몸으로 혈혈단신 적진으로 들어온 처지에 적장의 머리를 운운하고, 조선을 침략한 왜군의 행동을 비판하고 있으니, 가등청정은 유정의 배포에 감탄하게 된다. 이것이 이후에도 계속 유정이 가등청정과의 교섭을 담당하게 된 두 번째 이유로, 가등청정은 “오로지 송운(유정) 대사만이 나를 속이지 않는다”라며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유정과의 통로를 열어두었다.

이처럼 가등청정과 신뢰를 쌓은 유정은 네 차례에 걸쳐 가등청정의 진영을 왕래하며 조선의 요구를 전달했고 왜군의 상황을 탐지해 조정에 보고했다. 그의 정세 분석이 얼마나 정확하고 뛰어났던지 명나라 군대의 도독(총지휘관)이 면담을 요청할 정도였다. 조선 조정도 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는데 실록에 보면 “유정이 적진에서 돌아오는대로”, “유정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이라는 표현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는 종전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도체찰사 이덕형은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거듭 반독해 생각해보아도 유정보다 나은 사람이 없으니” 그를 대마도로 파견하자고 주장했고(선조34.12.29), 일본에서 사신이 오자 비변사에서는 “적의 사신이 이르렀으니 관동지방에 머물고 있는 유정에게 빠른 말을 보내어 신속히 상경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할 정도였다(선조37.2.24).
 명나라도 인정하는 외교 경험과 정세분석 능력
그리하여 유정은 왕명을 받고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간다. 왜의 정세를 자세히 파악하고 혹시라도 저들이 재침략할 생각을 갖고 있진 않은지 확인하는 임무였다. 그에게 이 중차대한 역할이 맡겨진 것은 앞서 설명한 대로 유정이 조선을 대표하는 고승(高僧)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명나라도 인정하는 외교 경험과 정세분석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의 명성이 일본 전역에까지 알려졌기 때문이다. 가등청정이 존경한 인물이라는 아우라가 일본에서의 교섭 활동을 수월하게 만들어 주리라는 판단이었다. 기대한 대로 유정은 본래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고 여기에 더해 수많은 조선인까지 구출해 온다. 납치된 조선인을 귀국시키기 위해 유정이 벌였던 담판은 안타깝게도 그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상과 같은 유정의 신뢰자본이 성공에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담판은 그 자체의 내용과 전략도 긴요하지만 어떤 사람이 담판장에 나서느냐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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