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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호적수(18) 채제공과 김종수] 탕평책을 망가뜨린 붕당정치

[김준태 호적수(18) 채제공과 김종수] 탕평책을 망가뜨린 붕당정치

남인 채제공 VS 노론 김종수… 겉으론 견마지심 속으론 당리당략
채제공
정조 23년 1월, 정조 시대를 떠받쳤던 재상 김종수(金鍾秀)가 7일에, 또 다른 재상 채제공(蔡濟恭)이 18일에 눈을 감았다. 정조 역시 이듬해 승하하였으니 두 재상의 죽음과 함께 정조의 시대가 황혼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설명하면, 두 재상이 서로 긴밀하게 협력했던 동지로 오해할 수 있다. 이들은 서로를 제거하고자 극단적으로 대립했던 정적이었다.

먼저 채제공을 살펴보자. 그는 소수파인 남인(南人)이다. 남인은 숙종의 갑술환국으로 조정의 중심에서 배제된 이래, 영조 때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면서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나마 남인의 지도자 오광운이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우고 영조의 탕평정치에 적극 협조하면서 조정 내 남인의 명맥을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채제공은 이 오광운의 제자이자 조카사위로, 청요직을 두루 거치며 남인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영조의 총애를 받아 오랜 기간 승지로 재임하였는데, 도승지 시절 목숨을 걸고 사도세자를 보호한 바 있다. 이를 두고 영조가 세손인 정조에게 “ 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며 너의 충신이다”라며 채제공을 칭찬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정조에게 중용된 것은 이와 같은 인연 덕분이었다.

다음으로 김종수는 노론 벽파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영의정을 역임한 김치인이 그의 당숙이며 역시 영의정을 지낸 홍낙성이 그의 외사촌형이다. 한데 사도세자나 정조와 대립각을 세운 다른 벽파와는 달리 그는 친(親)정조 노선을 선택한다. 시강원의 필선과 겸문학, 보덕 등 세손을 교육·보좌하는 관직을 연달아 맡으면서 정조와 가까워진 이유도 있었지만, ‘군사(君師, 통치자이자 스승)’로서 임금의 역할을 강조하고 외척의 전횡을 비판하는 그의 정치 구상이 정조의 생각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김종수는 온 몸을 던져 정적들로부터 세손 정조를 보호하였는데, 그 공로로 인하여 동덕회(同德會)의 멤버가 된다. 동덕회란 정조가 즉위하는 데 크게 기여한 김종수, 홍국영, 서명선, 정민시, 그리고 정조 본인, 이렇게 다섯 명으로 구성된 모임이다.(홍국영이 몰락한 후에는 네 명) 정조는 매년 이 모임을 주최하며 네 신하를 각별히 예우했다.
 사도세자 죽음의 원흉을 척결하자는 남인의 상소
김종수 / 사진:위키백과
즉, 채제공과 김종수는 정조의 충신이자 은인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합심해 보좌해준다면 정조는 든든한 양 날개를 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정조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채제공이 8년간의 야인생활을 끝내고 1788년 우의정, 1790년 좌의정(영의정이 없는 좌의정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수석재상이다), 1793년 영의정을 맡으며 국정을 주도하자 김종수가 어깃장을 놓은 것이다. 신해통공으로 대표되는 상업개혁, 노비제도 개혁에서도 채제공은 찬성, 김종수는 반대로 충돌하는 등 정책갈등도 심화됐다.

그러던 와중에 채제공이 불난 데 기름을 부어버렸다. 1793년 5월 28일, 영의정 채제공은 “선대왕(영조)께서 이미 전하를 위해 큰 괴수로서 원수가 되는 자들에 대하여 이름을 들어 말씀하셨으니, 선대왕께서 확연히 깨닫고 계셨음을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선대왕께서 이와 같이 하셨으니, 전하께서는 속히 천토(天討·군주가 직접 악인을 토벌해 단죄하는 것)를 거행하시어 사도세자가 받은 모함을 깨끗이 씻어내는 것이야말로, 의심의 여지없이 마땅한 일입니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 사도세자가 죽음을 맞는 과정에서, 사도세자를 참소하고 모함한 무리들이 있었다. 훗날 영조는 아들을 죽인 조치를 후회하며 세손인 정조에게 이 무리들에 대해 언급했다. 이는 영조 역시 이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니, 선왕 때의 일을 뒤집는 것이라 하여 주저하지 말고 관련자를 응징하라는 것이다.

그러자 김종수가 발끈한다. 본인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소속 당파인 노론 벽파를 겨냥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세자가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면, 사도세자를 공격한 사람들은 모두 역적이 된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는 벽파가 멸절할 위기에 놓인 것이다. 김종수는 채제공을 “흉악한 역적”이라며 강력히 성토하고, “이미 저 사람과는 의리상 차마 한 하늘 밑에 있을 수 없는데, 어찌 어깨를 나란히 하여 동료가 될 리가 있겠습니까?”라며 사직상소를 올린다. 이때 두 재상은 서로를 비난하며 대질을 요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태가 악화하자 탕평정치의 붕괴를 우려한 정조가 개입했다. 정조는 6월 4일 두 재상을 해임하고, 9월에는 영조가 사도세자에 대한 처분을 후회한다는 내용의 문서 [금등(金縢)]을 공개했다. 채제공만 이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상소를 올리게 됐다고 설명함으로써 사태를 봉합하려 했다. 하지만 김종수는 수긍하지 않는다. 진즉에 언급하든가 아니면 완곡하게 돌려 말했어야지, 이제 와서 짐짓 강경하게 거론하는 것은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정적을 숙청하기 위한 불순한 의도라며 대립한 노론
사도세자의 죽음을 그린 영화 ‘사도’의 한 장면 / 사진:쇼박스
이후에도 채제공과 김종수는 사사건건 충돌했다. 한번은 정조가 경모궁(사도세자의 사당)을 참배할 때 슬픔에 겨워 몸을 가누지 못하자 채제공이 정조를 업고 내려온 적이 있었다. 김종수는 예법에 어긋난 것이라며 채제공을 비판했는데, 다분히 감정이 섞인 과도한 공격이었다. 정조는 “정상적인 사리나 떳떳한 본성을 가졌다면 할 수 없을 말”이라며 그를 삭탈관직 했다. 이 밖에도 채제공계인 이석하, 유운우와 김종수계인 신귀조가 정치적 공방을 벌이는 등 두 재상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1794년 12월 12일, 정조가 김종수를 정계 은퇴시켜 표면적인 갈등은 잠복했지만, 1801년(순조 1) 12월 18일 벽파에 의해 채제공의 관작이 추탈되고, 6년 후인 순조 7년 8월 8일에는 시파에 의해 김종수가 ‘정조의 역적’으로 규정되는 등 그 여진은 계속됐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채제공의 손을 들어주는 편이다. 채제공이 정조의 개혁을 앞장서서 추진한 반면, 김종수는 개혁을 저지하는 수구적인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채제공이 김종수와 대결한 이유가 오로지 순수한 충정의 발로였을까? 앞서 소개한 채제공의 상소는 노론 벽파의 강경세력뿐 아니라 온건파, 중도파까지 등을 돌리게 만들 수 있는 위험한 것이었다. 채제공은 남인의 입지 확보, 나아가 남인의 집권을 위해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또한 당파성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만약 두 사람이 싸우고 갈등할지언정 상대를 무조건 말살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두 사람이 호적수가 되어 조선을 조금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지 않았을까?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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