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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신하 '분노의 논쟁', 백성에겐 행복?

[김준태의 호적수(21) 세종대왕과 허조]
사사건건 반대한 “아니되옵니다” 허조
그를 품어 국정의 완결성을 높인 세종

TV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한 장면. 세종과 허조가 부민고소금지법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 모습. [사진 SBS드라마]
신하가 임금의 적수가 될 수 있을까? 언뜻 어려워 보인다. 막강한 힘을 가진 권신이 임금을 억누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임금이 신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신하는 임금의 눈치를 보고 임금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 이색적인 사례가 있다. 국정의 거의 모든 사안마다 충돌하고 의견대립을 보였던 임금과 신하. 한데 임금은 사사건건 비판하는 신하를 중용하고 힘을 실어줌으로써 그를 자신의 적수로 키웠다. 임금에게 주저 없이 반대하고, 자신과는 다른 관점을 말해주길 기대하면서. 세종대왕, 그리고 그가 ‘만든’ 호적수 허조(許稠)의 이야기다.  
 
링컨이 정적 슈어드를, 오바마가 라이벌 힐러리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한 것이 놀라운 미담으로 전해져 오고 있지만, 세종대왕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세종은 장인 심온을 죽이는 데 앞장선 ‘중전의 원수’ 박은을 집현전의 총책임자로 삼았고, 자신이 세자가 되는 것을 결사반대해 ‘임금의 원수’로 불린 황희를 영의정에 임명했다. 그 외에도 자신과는 다른 입장, 다른 견해를 가진 신하들을 대거 발탁하여 요직에 임명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허조다.  
 
여말선초의 대학자 권근의 제자로, 인사업무와 예법에 두루 밝았던 허조는 세종 대에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 등 핵심 최고위직을 역임했다. 그런데 이 허조는 재상으로서 소수의견을 많이 냈다. [세종실록]을 보면 ‘허조만 혼자서 다른 의견을 냈다’라는 뜻의 ‘許稠獨曰’, ‘獨許稠曰’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예컨대 다른 신하들이 모두 동의한 파저강 유역 여진족 정벌에 대해서 허조는 “이들은 미련하고 완강하니 한번 원수가 되면 시시때때로 보복해 올 것입니다. 경솔히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라며 유일하게 반대했다. 이 파저강 정벌 자체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이후 조선은 허조의 우려대로 끊임없는 여진의 도발에 시달려야 했다.  
 
세종 대에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 등을 지낸 허조(1369~1439년). [사진 네이버 블로그]

억울한 백성을 위한 신문고 설치에도 세종과 대립한 허조  

 
허조는 세종의 역점 사업들에 대해서도 툭하면 반대하고 제동을 걸었다. 이른바 ‘부민고소금지법(府民告訴禁止法)’ 논쟁을 보자. 당시 조선에서는 ‘부모=스승=임금(또는 임금이 임명한 고을수령)’이라는 유교윤리에 입각해, 고을 수령의 잘못으로 피해를 봤더라도 백성이 그 수령을 고발할 수가 없었다. 백성이 수령을 고소하는 것은 자식이 부모를 고소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 법은 ‘위민(爲民)’이라는 또 다른 유교윤리에 위배된다. 무릇 ‘백성이 곧 나라의 근본’이고, ‘백성의 마음이 곧 하늘의 뜻’이다. 그런 백성이 피해를 입고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국가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에 세종은 “백성의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을 살펴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정치를 행하는 도리이겠는가?”라며 부민고소금지법의 개정을 추진한다. 대다수의 신하들도 “이 법을 그대로 두면 관리들의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고, 고의로 잘못을 저지르는 자들도 나타날 것이다”라며 동조했다.
 
그러나 허조가 반대한다. 세종과 직접 여러 차례 논쟁을 벌이면서도 그는 끝까지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이 법을 폐지할 경우 윤리기강이 흔들릴 뿐 아니라, 사람들이 사소한 일을 가지고도 앞 다투어 고소를 남발하게 돼 행정력이 낭비되고 나라의 풍속이 어지럽혀진다는 이유였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세종의 견해가 전적으로 타당해 보이겠지만, 당시 유교 윤리관에서는 허조의 우려 역시 정당한 것이었다. 결국, 백성이 수령을 고발하면 나라가 반드시 해결해주되 고발당한 수령의 죄는 원칙적으로 묻지 않으며, 고의로 사건을 은폐하거나 왜곡한 경우에 한해서만 수령을 처벌하는 것으로 합의점이 도출된다.  
 
이 밖에도 허조는 백성이 이해하기 쉽도록 법률을 이두(吏讀, 신라의 설총이 만든 것으로 훈민정음 창제 전까지 우리말을 표기하던 방식. 한자의 음과 훈을 빌리는 형태다)로 번역해 나눠주라는 세종의 명령에 대해 “백성이 법에 대해 잘 알게 되면 법망을 교묘히 피하고 법을 제 멋대로 가지고 노는 무리들이 생겨날 것”이라며 비판했다. 신문고(申聞鼓)를 백성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세종의 결정에 대해서도 홀로 반대한다. 신문고를 칠 수 있는 조건과 절차를 엄격하게 규정해 놓지 않으면, 백성들은 하급기관에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일까지도 무조건 임금에게 가져와 해결하려 든다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공법(貢法)개혁, 불교혁파 과정에서도 허조는 세종과 정면에서 충돌했다.  
 
이처럼 허조는 임금의 뜻에 반대하고, 임금의 지시를 비판하는 일에 거침이 없었다. 그는 다른 신하들이 모두 동의해 결정이 난 사안에도 끝까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의 집요한 반대에 진저리가 난 세종이 종종 진노하고, “허조는 정말 고집불통이다”라며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했을 정도다.  
 
[효경(孝經)]에서 말하기를 “군주와 논쟁하는 신하가 있으면 설령 군주의 도리를 지키지 못하는 임금이라도 나라를 잃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 신하가 있다면, 효경의 말처럼 설령 임금이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나라를 올바로 이끌어갈 수가 있다.  
 
세종대왕 어진 [중앙포토]

숙적 허조를 중용 경청해 정책의 부작용을 예방한 세종

 
상황이 이와 같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으로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종이 수준 낮은 군주였다면 허조를 해임하거나 어떤 이유로든 죄를 뒤집어씌워 유배 보냈을 테고, 보통의 군주였다면 그를 꺼려하고 멀리했을 것이다. 한데 세종은 허조 때문에 자주 마음이 상했으면서도 그를 끝까지 곁에 둔다. 허조가 세종의 개혁노선을 저지하는 반대세력의 영수로 떠오르고, 허조의 반대 논리에 막혀 자신의 뜻을 꺾어야 하는 일들이 벌어져도 말이다. 아니, 단순히 옆에 두는 것이 아니라 정승으로 제수해 힘을 실어주었고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일찍이 나폴레옹은 “작전을 세울 때 나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위험과 불리한 조건을 과장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국정운영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발생 가능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미리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세종은 허조의 집요한 반대를 수용함으로써 앞으로 초래될지도 모를 정책의 피해를 선제적으로 예방하고 정책의 완결성을 기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반대론의 장점과 정당성까지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서 그의 의견을 경청한 것이다. 또한, 강력한 반대와 만나야 리더는 비로소 자신의 판단에 의문을 갖게 된다. 집단사고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편견을 극복할 수 있도록, 그래서 보다 나은 대안을 도출할 수 있도록, 허조와 논쟁과 반박, 재반박의 고단한 과정을 감내한 것이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허조는 세종이 ‘만든’ 호적수라는 점이다. [효경(孝經)]에서 말하기를 “군주와 논쟁하는 신하가 있으면 설령 군주의 도리를 지키지 못하는 임금이라도 나라를 잃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말은 좋다. 그러나 임금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스스럼없이 임금에게 반대한다는 것, 반론을 펼치며 임금과 치열하게 논쟁한다는 것, 신하로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먼저 그런 신하를 육성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주저 없이 임금을 비판하고 임금과 논쟁을 벌일 수 있는 임금의 호적수를 키워내야 한다. 그런 신하가 있다면, 효경의 말처럼 설령 임금이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나라를 올바로 이끌어갈 수가 있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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