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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황수신의 치부법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②]

변화에 대응하는 융통성과 신속한 대처의 값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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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체격이 웅장하고 성품이 관대하며 재상다운 국량이 있었다. 경전과 역사를 섭렵하여 이치(吏治)에 능했고, 정승이 되어서는 큰 얼개를 잡는데 힘썼다. 하지만 세상의 부침에 따라 쉽게 처세를 바꾸었으며 누대에 걸쳐 조정에 봉직했으면서도 볼 만한 업적이 없었다. 뇌물이 폭주하였으며 한 이랑의 밭을 탐하고 한 사람의 노복을 탐했기 때문에 대간으로부터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다. 하여 사람들이 말하길, ‘성이 황(黃)이니 마음도 누렇구나(黃)’라 하였다.”
 
1467년(세조 13) 5월 21일, 영의정을 지낸 황수신(黃守身)이 눈을 감았다. 세종 대의 명재상 황희의 셋째 아들이자, 형조참판·좌참찬·우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일찍이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좌익공신에 봉해졌다. 이 글은 황수신의 ‘졸기(卒記)’, 즉 실록의 사관이 남긴 일종의 부음기사(obituary)다.
 
그런데 졸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에겐 부정적인 평가도 많았다. 특히 그는 재산을 늘리는 일에 몰두하여 잡음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것이 토지다. 실록에 따르면 황수신은 공신이 된 혜택으로 “이개·심신·송석동의 충추 논밭, 최득지의 수원 논밭, 박중림의 과천 논밭, 조청로의 양천 논밭”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세조에게 반대했던 신하들을 제거하며 압수한 토지가 그에게도 할당된 것이다. 면적이 매우 넓었던 데다 세습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막대한 수입을 거둬들일 수 있었지만 황수신은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전국 곳곳의 비옥한 토지를 탐냈는데, 이를 위해 권력을 남용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1459년 1월의 일이다. 충청도 아산현이 폐지되고 셋으로 나뉘어 인근 온양·평택·신창현에 통합되는 과정에서 당시 진휼사(賑恤使)로 현장에 내려와 있던 황수신이 개입했다. 그는 아산현 소유의 관둔전(관청 운영경비를 보조하기 위한 토지)과 채마밭(채소밭)을 빼돌렸고, 아산현 관아로 쓰던 기와집 48칸을 초가 22칸이라며 서류를 조작해 헐값으로 사들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아산현으로 아내의 묘를 이장하겠다며 좋은 땅을 무상으로 불하받기도 했다. 2년 후, 해당 관둔전에서 농사를 짓던 관노의 고발로 진상이 드러나고 황수신은 탄핵 당했지만, 세조의 묵인 아래 유야무야된다. 이와 같이 부정과 탈법을 자행해가며 재산을 축적한 덕분에 황수신은 일약 거부로 떠올랐다.  
 

부정과 탈법 자행해 일약 ‘거부’로 떠올라  

같은 시대 ‘4대 부자(四富)’라 불렸던 정인지·박종우·윤사로·윤사균에 필적하는 수준이었다. 이들 네 사람은 왕실의 인척이고 집안 대대로 돈이 많았으니, 황수신의 치부 능력이 보다 뛰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네 사람과 황수신이 모두 세조 편에 서서 공신이 된 점도 부를 축적하게 된 중요한 기반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황수신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재산을 모으자는 것이냐? 결코 아니다. 개인의 사사로운 부를 위해 공적 권력을 남용하고, 더 많은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불법을 저지른 그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황수신에게서 주목해야 할 교훈은 이 부동산 투기가 아니라 “세상의 부침에 따라 쉽게 처세를 바꾸었으며” “한 이랑의 밭을 탐하고 한 사함의 노복을 탐”했다는 그의 태도에 있다.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처세를 쉽게 바꾼 점에 주목하자니 말이다. 흔히 처세란 일관되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상황이 달라졌다며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 아니라, 유리한지 불리한지, 이익이 되는지 아닌지에 따라 조변석개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에 따라 흔들림 없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는 선비의 처세일 수는 있어도 부자의 처세가 아니다.  
 
황수신은 원칙을 고수하기 보다는 변화에 대응하는 융통성을 강조했다. 그가 외교와 국방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했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졸기의 평가를 뒤집어 보면, 황수신은 시대의 흐름을 주목하고 상황 변화에 민감하였으며 신속하게 대처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그의 성향이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해준 동인이었을 것이다. 부의 기회는 변화 속에 담긴 채 찾아오는 법이니 말이다.
 
“한 이랑의 밭을 탐하고 한 사람의 노복을 탐했다”는 점도 공직자로서는 부적절하겠지만, 부자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자세다. 넓은 땅을 소유하고 수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있는 황수신이 자신의 부에 만족하지 않고, 한 이랑의 밭, 한 사람의 노비라도 더 얻기 위해 집착했으니 쫀쫀하고 인색해보일 수 있다. 큰 부자가 통이 작다며 못마땅해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성의 함정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방금 200만원짜리 고사양 노트북을 구입한 사람은 5만원짜리 워드 프로그램을 구입할 때 크게 망설이지 않는다. 그러나 평소에 이 프로그램을 구입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값이 비싸다며 다른 방법이 없는지를 고민할 것이다. 결혼식 비용으로 수천만원을 지불한 사람이 십여만원 하는 부대비용은 개의치 않는 것과 같다. 평상시라면 당연히 주저하겠지만.  
 
그런데 이는 비교대상 때문에 많거나 적다고 느껴지는 것일 뿐이다. 나가야 할 비용은 똑같고, 돈의 값어치는 그대로다. 상대성으로 인해 이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에 과소비가 일어나는 것이다. 결코 푼돈이 아닌데 푼돈이라고 착각하며 소홀히 대하고 함부로 행동하게 된다.
 

‘시대의 부침’에 주목하고, 신속하게 대응

다시 황수신으로 돌아가 보자. 그의 재산이 얼마건 간에 한 이랑의 땅, 한 사람의 노복은 그 자체로서의 값어치가 있다. 백만 평의 땅이 있어도, 열 평의 땅이 있어도, 1평은 똑같이 1평이고 똑같이 소중해야 한다. 홍콩 청쿵그룹의 리카싱 회장이 1센트 동전을 바닥에 떨어트리자 고집스레 찾으려 했다는 일화가 있지 않은가? 왜 월마트의 설립자 샘 월튼이 “부자들은 1센트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겠는가?  
 
황수신이 구두쇠 같고 인색해 보일지는 몰라도 한 이랑의 땅, 한 사람의 노복을 중시했기 때문에 그만한 부를 일군 것이다. 상대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작은 재화도 소중히 여기는데서 부자와 보통 사람이 갈라진다. 요컨대 황수신은 공직자로서 낙제점이다. 국가의 공신이자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쌓은 부는 결코 오래갈 수 없다는 점에서 본받아서는 안 된다.  
 
그는 선비답지도 못했다. 지조와 원칙에 입각해 일관되게 처세하기 보다는, 상황변화에 따라 계속 선택을 바꿔갔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부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세다. ‘시대의 부침’에 주목하고 신속하고도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작은 수익과 소소한 지출에도 민감했기 때문에 황수신이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김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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