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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의 혁신우혁신] 문혁기 제주맥주 대표 “혁신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Interview] 문혁기 제주맥주 대표
유통공룡 선점한 맥주 시장 도전해 코스닥 상장 성공
“한국의 크래프트 맥주 문화 주도” 뚜렷한 목표점 설정







김홍일 전 디캠프 센터장(왼쪽)과 문혁기 제주맥주 대표가 만나 혁신을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김경빈 기자]
“몇년 만에 연매출 수백억 신화” “고졸이 대박집 사장이 되기까지” “유명 대기업에 수백억 투자 받은 비결” “스타트업, 나처럼 하면 성공한다”…. 창업 관련 기사를 수놓는 미디어의 헤드라인이다. 가시밭길을 밟아온 창업가의 역경 드라마를 소개하고,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장밋빛 전망을 늘어놓는 식이다.
스타트업의 숱한 곡절을 생생하게 목격한 김홍일 케이유니콘인베스트먼트 대표(전 디캠프 센터장)는 창업 시장이 일률적으로만 묘사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창업가의 성공에 박수만 치고 끝낼 게 아니라, 그들의 혁신 비법을 우리 사회가 함께 공유하자.”
[이코노미스트]가 ‘김홍일의 혁신우혁신’을 연재하는 이유다. 창업 요람의 리더 역할을 하던 VC 대표와 현직 기자가 스타트업 CEO를 만나 진중한 질문부터 가볍고 짓궂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침체에 빠진 한국 경제를 살릴 새 성장 동력을 찾을 지도 모를 일이라서다. 첫 번째 타자로 문혁기 제주맥주 대표를 만났다.[편집자]
 
“이런 얘긴 맥주 한잔 하면서 나누는 게 좋을 텐데요.” 지난 8월, 서울 중구 서소문로에 위치한 중앙UCN 제2 스튜디오에선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맥주회사 대표도 술을 마시고 실수한 적이 있느냐”라는 물음에 “물론 있다”는 솔직한 입담이 오갔기 때문이다. 김홍일 대표가 질문을 던졌고, 문혁기 제주맥주 대표가 재치 있게 받아넘겼다.
 
두 사람의 이력을 살펴보자. 김홍일 대표는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디캠프 센터장을 역임하면서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 조성에 기여했다. 금융업계에선 잔뼈가 굵은 베테랑 경영인으로도 통한다. 1991년 산업은행을 통해 금융업에 발을 담근 뒤 홍콩에서 유럽계 ABN AMRO, 미국 리먼브라더스 홍콩지점 전무이사, 일본 노무라증권 홍콩지점·서울지점 전무이사, IBK 자산운용 부사장·대표이사 대행을 거쳐 우체국금융개발원장을 지냈다.
 
수십 년간 쌓아온 금융권 네트워크 덕분에 난관에 부딪힌 스타트업 CEO의 ‘든든한 심부름꾼’ 역할을 자처할 수 있었다. 최근엔 ‘케이유니콘인베스트먼트’란 벤처캐피털을 창업해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김홍일 대표와 마주 앉은 문혁기 제주맥주 대표는 스타트업 업계의 스타 CEO로 통한다. 제주맥주는 첫 제품을 출시한 지 4년 만에 크래프트 맥주 시장의 대표주자로 떠오르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지난 5월엔 코스닥에 상장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난맥상에 빠진 한국 사회가 혁신할 수 있는 발판을 스타트업 창업가의 아이디어에서 찾고 싶다는 김홍일 대표가 먼저 문혁기 대표에게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김홍일 케이유니콘인베스트먼트 대표(이하 김홍일) :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주종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뻔한 답변이 예상되지만요.
문혁기 제주맥주 대표(이하 문혁기) : 뻔한 답변, 맥주입니다. 물론 고집스럽게 맥주만 마시는 건 아닙니다. 막걸리도 제법 즐깁니다.
 
김홍일 : 맥주와 막걸리, 둘 다 곡류로 만들어지는 술이군요. 언젠간 제주맥주가 막걸리를 파는 날이 온다고 봐도 될까요.
문혁기 : 제주맥주의 아이덴티티는 맥주회사입니다. 하지만 스타트업은 항상 다양성을 추구해야 하고, 또 열려있어야 하죠. 막걸리를 파는 날이 오지 않으리라 장담하긴 어렵겠네요.
 
김홍일 : 스타트업은 제품 출시에 성공했더라도 살아남기 쉽지 않습니다. 시장의 터줏대감들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승부를 벌여야 하기 때문이죠. 특히 맥주 시장은 공룡급 기업이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왜 맥주를 선택했습니까.
문혁기 : 미국에서 유학하던 중 크래프트 맥주를 접하게 됐고, 혀끝에서 느껴지는 청량함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곧바로 의문이 뒤따랐죠. 한국 맥주는 왜 ‘소맥’으로만 소비가 되는가. 미식에 일가견이 있는 우리 국민에게도 크래프트 맥주 아이템은 충분히 통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문혁기 대표의 판단은 적중했다. 제주맥주는 맥주업계를 통틀어 처음으로 코스닥에 입성하면서 높은 기업 가치를 인정받았다. 개성 있는 맥주 맛과 톡톡 튀는 마케팅으로 성장을 거듭해 온 덕분이다. ‘맥주’의 설명을 들었으니, 다음은 ‘제주’에 호기심을 가질 차례였다. 김홍일 대표가 화제로 올렸다.
 
김홍일 : 집객을 생각하면 서울도 있고 수도권도 유리해 보입니다. 왜 하필 제주도에서 창업한 겁니까.
문혁기 : 비즈니스를 처음 계획했을 때부터 제주도를 염두에 뒀습니다. 단순히 제품을 만들어서 파는 것만으론 크래프트 맥주의 매력을 어필하기 힘들 거라고 봤기 때문이죠. 제주맥주가 제주도에 체험형 양조장을 구축한 이유입니다. ‘쉼’을 찾기 위해 국내외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 바로 제주도 아닙니까. 물론 물류비나 인프라 같은 걸 따지면 육지에서 사업을 하는 게 훨씬 더 수월했겠죠. 하지만 그런 비용을 뛰어넘는 고객 경험을 전달할 수 있는 데 만족합니다.
 
김홍일 : 체험을 통해 고객의 눈을 집중시키겠단 전략이었군요. 맥주 맛이 없으면 그런 체험도 무용지물일텐데, 자신감이 꽤 있나 봅니다.
문혁기 : 맥주의 품질을 결정하는 건 물입니다. 제주도는 물이 맑기로 유명하죠. 제주맥주의 대표 상품은 제주감귤피를 동결건조해서 소재로 씁니다. 지역의 신선한 특산물과 결합해 제품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맛과 품질 경쟁에선 밀리지 않습니다.
 
김홍일 대표는 ‘혁신우혁신’ 기획을 통해서 창업가의 깊은 속내를 엿보고 싶다고 강조했다.
 
김홍일 : 술의 의미는 시대적으로 많이 변해왔습니다. 약재로 쓰이기도 했고, 제사상에도 자주 올랐죠. 현대사회에선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이 술을 음미하고 있습니다. 문 대표에게 술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문혁기 : ‘스트레스를 잊기 위함’이 큽니다. 맥주 한 캔에도 작지 않은 위로를 받습니다. 중요한 일이 마무리돼 기쁜 자리가 되거나, 축하를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함께 즐거워하며 마시기도 하죠. 그래서 저는 맥주도 하나의 문화로 보고 있습니다.
 
김홍일 : 그렇게 이미지를 개선하다 보면 제사상에 제주맥주가 올라가는 날도 올까요.
문혁기 : 전통적인 상차림 대신 피자, 치킨 같은 고인이 좋아했던 음식을 올리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생전에 제주맥주를 좋아하셨다면, 언젠가 오르지 않을까요.
 
김홍일 : 제가 몸담았던 금융권에선 시선이 곱지 않았을 텐데요. 술이나 도박, 담배처럼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미치는 사업을 영위하는 이들을 두고 ‘죄악 사업’으로 묶고 있습니다.
문혁기 : 개인 취향에 맞는 주종을 찾아 가볍게 마시는 문화가 20~30대를 중심으로 점차 퍼지고 있습니다. 음주의 폐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상대적으로 개선되는 추세입니다. 제주맥주 역시 그런 흐름에 기여할 작정입니다.  
 
문혁기 제주맥주 대표는 혁신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김경빈 기자]
김홍일 : 물론 음주에 낭만은 있는 건 많은 이들이 동의할 텐데, 돈 얘기가 나오면 달라집니다. 투자자들의 깐깐한 시선을 어떻게 누그러뜨렸습니까.
문혁기 : 고생 좀 했습니다. 회사의 첫 직원이자 창립 멤버인 조은영 상무가 안 만나본 VC가 없었으니까요. 특히 맥주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설득하는 게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겐 허무맹랑하게 보인 청사진이 또 누군가에겐 그럴듯한 미래로 보였나 봅니다. 제주맥주를 믿어준 특별한 투자자들 덕분에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김홍일 : 그렇게 ‘국내 맥주의 혁신’이 시작됐군요. 문 대표는 어떻게 평가합니까. 스스로 혁신을 이뤄냈다고 생각하는지요.
문혁기 : 따지고 보면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진짜 맛있는 맥주를 한국에서 선보이겠다는 제 간절함이 원동력이었죠. 제주맥주가 이뤄낼 과업이 한참 남았기에 ‘혁신했다’는 자평은 성급합니다. 다만 혁신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아이비리그를 누빈 특별한 엘리트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저처럼 평범하게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요.
 
김홍일 : 사람이 혁신의 원동력이란 의미인 건가요.
문혁기 : 맞습니다. 저는 회사를 경영할 때 항상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현재 제주맥주는 여러 경영진이 자율적으로 각각의 부서를 담당하는 중이죠. 이들에게 최대의 권한과 책임을 쥐어주고, 대신 저는 회사가 성장할 수 있다는 신뢰를 주려 애쓰고 있습니다. 창업 이후 지금껏 경영진이 한 명도 퇴사하거나 바뀌지 않았다는 건 저의 큰 자부심입니다.
 
문혁기 대표가 말을 끝내자 김홍일 대표가 제주맥주의 앞날을 응원했다. “한국의 제주맥주가 세계에서 맛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문 대표가 답했다. “금방 다가올지도 모를 미래입니다. 아시아 지역과 유럽엔 이미 제주맥주를 수출하고 있고, 베트남엔 현지 법인을 설립할 계획입니다. 제주맥주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입니다.”
 

기자의 덧말

제주맥주는 스타트업계의 별종이다. 바이오, IT 기반의 아이템이 판치는 시대에 식음료 업계에 당당히 도전한 점도 그렇고, 증시에 입성해 코스닥 종목코드를 따낸 이력도 독특하다. 2017년에야 첫 제품을 출시했음에도 개성 있는 맥주 맛과 MZ세대를 겨냥한 마케팅 전략 덕분에 한국 크래프트 맥주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CEO의 추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성과였다.
 
불도저 같은 창업가라면 과업에 열중하느라 정작 주변을 챙기지 못하기 일쑤다. 그래서 문혁기 대표에게 물었다. “주변을 얼마나 희생했느냐”라고. 문 대표가 웃으면서 답했다. “회사 제품인 제주맥주가 소통의 허브 역할을 톡톡히 해 주변을 살뜰히 챙길 수 있었다.” 앙금이 쌓여도 맥주 한잔으로 풀어냈다는 얘긴데, 제품 평가를 위해 수백 잔을 들이켰을 텐데도 맥주가 질리지 않는 게 참 대단한 매력처럼 보였다.
 
문 대표는 김홍일 케이유니콘인베스트먼트 대표와 대담을 나눌 때도 술 한잔 걸친 듯 편안한 언어로 얘기를 풀어갔다. 창업을 꿈꾸는 후배에겐 “모든 창업에 고통은 디폴트(고정값)”란 다소 엄격한 조언을 했다. 김홍일 대표는 문 대표를 “확실한 자기 생각과 흔들리지 않는 행동력을 갖춘 CEO”라고 묘사했다. 기자 역시 동의했다. 

김다린 기자 kim.dar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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