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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이래 최대 호황’…풍요 향수 남긴 노태우

문 정부도 꺼냈던 토지공개념·공시지가제 시도
재벌들에게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 조치도 단행
주택 200만 가구와 수도권 신도시 건설 ‘첫발’
3저 흐름에 경제호황 일궈, 올림픽도 성공 개최
노동계 등 민간인 사찰 사건은 실정으로 꼽혀

 
 
1987년 12월 12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대선 후보 연설회에 참석해 청중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답하고 있다. [중앙포토]
 
26일 서거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향년 89세)이 대통령직을 떠난 지 28년이 넘었다. 하지만 그가 재직 당시 도입했던 경제 정책들은 역대 정부들을 거쳐 지금까지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요즘 국제무대에서 한국이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탈바꿈했다는 칭찬을 받고 있는데, 그 시작점이 노태우 정부 때였을 정도로 당시 한국 경제는 성황을 이뤘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누렸다는 노태우 정부의 경제 성과는 앞서 박정희·전두환 정부가 만든 토대에서 나온 과실이라는 시선과, 당시 동아시아의 3저(저금리·저유가·저달러) 흐름을 잘 이용했다는 시각으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국민에겐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한 시기로 기억되고 있다. 자가용 대중화, 주식시장 활황, 해외여행 급증, 1인당 국민총소득(GNI) 5000달러 등으로 풍요를 안겨준 정권으로 향수에 남아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대외 국격도 크게 상승해 자부심도 일깨워줬다.  
 
노 전 대통령은 전두환과 군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하고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탓에 대통령 임기(1988년 2월~1993년 2월) 내내 박정희·전두환의 바통을 이어받은 군사정권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하지만 안으로는 언론 자유화와 부동산시장 개혁으로 사회 분위기를 쇄신하고, 밖으로는 북방 정책과 대외교역 확대로 경제 성장을 이끌어 역대 정부와의 차별을 꾀했다. 
 
2018년 서강대를 정년 퇴임한 손호철 전 정치외교학 교수는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 “역대 정부들 중 가장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한 지도자”라고 평가한 말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이 1990년 4월 28일 경기도 안산시 군자동에서 열린 임대주택 착공식에서 시삽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혁신적 부동산 정책들 시도

특히 노 정권이 도입한 부동산 정책들은 오늘날까지 역대 정권들마다 차용했을 정도로 혁신적이었다. 그 중 하나가 ‘토지공개념’ 시도다. 토지공개념이란 토지는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재화지만 동시에 국토의 일부이기 때문에 공공복리와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 국가가 적절하게 규제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정권 초기인 2018년 3월 헌법 개정을 통해 추진하려 했으나 야권의 공세에 보류한 정책이다. 
 
1987~1988년에 경제 호황기에 접어들면서 시중의 풍부한 유동 자금이 부동산 투기로 몰렸다. 그 전까지 안정세를 보였던 땅값은 노 정권의 주택 200만 가구 건설 공약, 서울 올림픽 개최, 급격한 도시화·산업화 등의 여파로 급등하기 시작했다. 이는 토지 공급 제약, 건축 가능한 대지비율 감소, 소득불균형·불로소득 심화, 물가 불안 등을 부추겼다.  
 
이에 노 정부는 올림픽 직후인 1988년 8월 10일 부동산투기억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 때 토지공개념 3법(택지소유상한·개발이익환수·토지초과이득세 관련 법)을 꺼내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 했다. 개인 당 150평을 넘는 집을 갖지 못하게 하는 규제도 시행하려 했다. 
 
건설업이 국가경제를 떠받치던 때여서 경제계와 건설업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도 안 된다”며 격앙했다. 정치권도 크게 반발했다. 이후 토지공개념 법안들은 위헌 결정으로 점차 폐지됐지만 부동산 시장이 불안할 때마다 단골 정책으로 등장하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이 1990년 10월 29일 당시 경기도 고양군에서 열린 자유로 건설 기공식에서 발파 스위치를 누르고 있다. [중앙포토]
 
문재인 정권이 부동산 시장 규제책으로 지난해 12월 꺼낸 공시지가 현실화 정책도 1989년 노 정부에서 시작한 제도다. 공시지가는 정부가 땅값을 조사해 공시하는 제도로, 오늘날 국가가 국내 부동산을 관리하고 양도세·증여세·상속세·종합부동산를 매기는 중요한 척도로 자리잡았다. 
 
노 정부는 이와 함께 대기업을 향해 5·8 부동산특별조치도 내렸다. 법인들이 토지를 과잉 소유해 막대한 개발이익을 독점하자 대기업들이 갖고 있는 비업무용 부동산을 매각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부동산 폭등을 억제하기 위해 주택 200만 가구 공급과 수도권 1기 신도시 건설도 추진했다.  
 
이러한 부동산 정책들은 노 정권 말기 때 부동산 시장의 폭등세를 꺾는 성과로 이어졌다. 이 같은 정책 기조는 차기 김영삼 정권 때도 이어졌다. 
 
노태우 대통령이 1988년 9월 17일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중산층 확대 ‘마이카·주식투자·해외여행 시대’ 열어  

노 정권은 최저임금제를 처음 시행한 정부이기도 하다. 최저임금제는 1986년 법률로 제정됐으며 노 정권 초기인 1988년부터 시행됐다. 당시 최저임금은 노 정권 초창기인 1988년 약 462원에서 정권 말기인 1993년 1005원까지 올랐다. 상승률이 약 117%에 이른다.  
 
노 정권 시기는 경제 호황 덕에 중산층이 두터워졌다. 저금리·저유가·저달러라는 3저 흐름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한국 경제는 노 정부 임기 때 연 10% 안팎의 고도성장을 누렸다. 국제수지가 국가경제 틀을 갖춘 이래 처음 흑자를 기록했으며 실업률 2%대, 수출 600억 달러 돌파(1988년) 등을 나타냈다. 참고로 한국경제연구원(KDI) 조사 자료에 따르면 현 문재인 정부의 지난해 기준 전체 실업률은 4%, 청년 실업률은 9%를 나타냈다.  
 
이 덕에 당시 국민들은 피부로 느낄 정도로 부를 쌓게 되고 구매력도 증가했다. 자가용을 구입하는 인구가 급증하면서 마이카 시대가 열렸으며, 주식시장은 종합주가지수가 1989년 1000포인트를 넘고 주식투자 인구도 급증하면서 활황을 이어갔다.  
 
노태우 대통령이 1991년 서울에서 열린 제47차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 총회에서 개막연설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로 인해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당시 사회분위기는 국민들이 박정희·전두환 때 “우리도 잘 살아보세”를 외쳤다면, 노태우 땐 “나도 잘 살수있다”는 희망을 품었던 시기였다. 국가도 이 때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에 이르던 외채를 20% 밑으로 감축했다. 이와 동시에 그 동안 남의 나라의 도움으로 연명하던 빚쟁이에서 해외 빈국을 돕는 원조 국가로 탈바꿈하게 됐다. 
 
한편, 국민적 호응을 얻은 민주화 정책은 노 정권의 발목을 붙잡기도 했다. 철권통치를 앞세웠던 전두환 정권과 달리 노 정권 때는 권위주의를 내리고 자율과 타협을 내세우다 보니 사회 곳곳에서 기강 해이, 공권력 훼손, 친인척 섭정 등 부작용이 발생했다.  
 
특히 경제민주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노 정권의 경제정책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는 일이 이어졌다. 또한 공권력을 어지간해선 집행하지 않다 보니 노동계에선 불법 집회와 사건사고 등이 끊이질 않았다. 역대 정부의 억압정치를 갑자기 없애면서 일각에선 사회 혼란을 야기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민간인 사찰 사건도 노 정권의 실정으로 꼽힌다. 국군보안사령부와 국세청을 통해 정계는 물론 경제계와 노동계 주요 정적들을 사찰한 사건이 노 정권 중반기에 드러났다. 이 일로 정권 퇴진 운동이 연일 이어졌으며 국군보안사령부는 기무사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박정식 기자 park.jeongsi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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