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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엔 ‘폴리매스 융합형’ 전문가·기업이 살아남는다 [유웅환 반도체 열전]

한국식 인정주의 서구식 개인주의 접목해
새 조직문화 창출, 공조·협력 시너지 발휘

 
 
2021년 8월 아스펜 벨리 폴로 클럽에서 열린 폴로 경기 한 모습. 영국의 서식스 공작 해리 왕자(오른쪽 두 번째)가 동료들을 격려하고 있다. [사진 Sentebale ISPS Handa Polo Cup 2021]

2021년 8월 아스펜 벨리 폴로 클럽에서 열린 폴로 경기 한 모습. 영국의 서식스 공작 해리 왕자(오른쪽 두 번째)가 동료들을 격려하고 있다. [사진 Sentebale ISPS Handa Polo Cup 2021]

필자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모교 은사님으로부터 두 가지 조언을 받았다. “햄버거 사주는 걸 아까워 말라” “때때로 공격적이어도 된다”는 것이었는데, 그 뜻을 필자가 짐작하기로는 서구의 합리적 조직 문화의 빈틈을 공략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한번은 ‘러스’라는 측정 분야 전문기술자와 업무상에서 갈등을 빚은 적이 있다. 그에게 측정을 요청하는 대기자 명단이 항상 가득 차 있어 데이터를 넘기면 길게는 일주일, 짧아도 사나흘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대학원 과정 내내 측정·모델링·시뮬레이션 등을 모두 직접 경험해본 필자로서는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세 시간이면 끝날 일이 왜 오래 걸리는지 조목조목 따지던 끝에 실험실에서 직접 측정을 했다.  
 
필자의 이 돌발행동에 회사에는 작은 소란이 일었다. 러스는 20년 넘게 해당 분야만 담당해왔던 터라 자신의 업무에 자부심이 강했다. 그는 자기 고유의 업무 권한을 침해 받았다는 생각은 물론이고, 경쟁 구도에서 밀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매니저는 나를 호출해 귀중한 시간을 측정 아닌 본연의 업무인 설계에 쓰라고 당부했다.  
 
이때 필자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서구의 조직 문화에서도 관료적인 절차를 중시한다는 점, 이곳이 한국보다 경쟁 구도가 덜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노동의 효율성을 중시하는 테일러주의(Taylorism)와 대량생산을 위한 분업체계를 중시하는 포드주의(Fordism)가 꽃핀 곳이 미국이었음도 잠시 잊었다. 필자가 은사님의 조언을 일차원적으로만 해석해, 정작 내 주변의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기본적인 노력이 부족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필자는 새로운 도전의식이 생겼다. 한국식 인정주의와 서구식 개인주의를 접목해 새로운 조직 문화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작은 일부터 시작했다. 동료들과 점심 식사를 하거나 커피를 마실 때 가급적 계산은 내가 했다. 처음에는 그들 대부분이 부담스러워 했지만, 누군가가 전체를 위해 호의를 베풀면 자연스레 그 모임이 더 끈끈해진다는 걸 차츰 이해하게 됐다. 나중에는 그들에게도 동양식 베풂의 문화와 그걸 몸소 보여주는 나의 태도가 퍼졌다.
 
러스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단순히 데이터를 전달하고 측정 결과를 받는 사무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그의 재능을 살피고 활용해 과정과정마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결하는 파트너가 됐다. 필자는 그에게 비즈니스적 목적과 나의 철학 등을 설명하는 한편, 그의 기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여 논문과 특허에 이름을 올려주기도 했다. 서로의 장점을 교환하고 결합해 누구도 예상 못했던 시너지 효과를 빚어낼 수 있었다. 이처럼 엔지니어들은 기술적으로 각자 전문 분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개인이 서로의 능력과 자질을 공유할 때 현 시대가 요구하는 ‘융합’을 선도해나갈 수 있다.
 
그렇게 입사 후 2년여의 시간이 흘렀을 때, 회사 구성원들 간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려는 노력이 인정받는 분위기를 느꼈다. 필자는 그 리더십을 인정받아 만 35세가 되던 2006년, 마침내 인텔에서 임원 직전의 지위인 수석매니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햄버거를 사주라던 은사님의 말씀은 곧 인정(人情)을 중심으로 동료들 간에 공조와 협력의 장을 만들어가라는 가르침이었으리라.
 
노트북을 보는 남성 모습에 컴퓨터 이진법 코드를 투영한 일러스트. [로이터=연합뉴스]

노트북을 보는 남성 모습에 컴퓨터 이진법 코드를 투영한 일러스트. [로이터=연합뉴스]

전문성 T형+융복합 π형=폴리매스형  

실리콘밸리의 전문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 역시 필요하다. 애플은 철저하게 분업화된 생산 방식 속에서 다양한 전문가들을 배출해내기로 유명하다. 그들은 디자이너·엔지니어 등에게 자신이 속해 있는 세부 분야에서 최고가 되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애플에는 각 분야의 고수들이 만들어낸 창의력을 인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하나로 이어주는 스티브 잡스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의 상상력과 창의성이 아니었다면 각각의 전문성들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질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지식산업의 관건은 개별 분야들 간의 조화를 어떻게 달성하느냐에 달려 있다.
 
내가 몸담았던 인텔의 경우 여러 지식과 기술을 교차시킬 수 있는 산업 인력 양산을 위해 T형 전문가를 추구해왔다. T는 생김새 그대로 수직선과 수평선이 만나는 건축적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때의 수직선은 세분화된 영역의 전문성을 의미하며, 그 위의 수평선은 타 분야에 대한 대략적인 지식과 이해의 정도를 가리킨다. 직급이 올라가면서 각 개인은 자신의 역할에 걸맞은 전문성을 습득해나가는 동시에 타 분야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야 한다. 다만 아쉬움은 있다. 여러 기술을 융합해 독자적으로 제품을 생산해낼 역량 말이다.
 
따라서 필자는 4차산업혁명 시대 실리콘밸리의 역동적 산업 변화에 주목하면서, T형을 넘어 파이(π)형 또는 폴리매스(polymath)형 전문가를 제안하고 싶다. T형에서 전문성이 하나 더, 그리고 그 이상 추가된 형태이다. 즉, 한 분야의 전문가가 T형이라면, 그 상태에서 다른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고, 기존의 전문성과 새로이 획득한 전문성을 융합하는 단계에 이른 사람이 파이(π)형 전문가다. 수직으로 내려가는 두 선은 각각 서로 다른 전문성을 의미하고, 상부의 수평선은 두 전문성을 이어주는 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그 교각이 더 늘어나 탄탄해진 것이 폴리매스형 전문가인 것이다. 야구로 치면 치고, 던지고, 달리는 데 모두 능한 올라운드 플레이어의 자질과 함께 경기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선수를 가리킨다.
 
실리콘밸리를 이끌어갈 새로운 인재들은 국제적 수준의 복합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파이형-폴리매스형 전문가는 단순히 한 분야의 이론적 지식이나 기술적 역량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지식과 기술을 응용하고 조합하여 회사 차원에서 기술 전략 계발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동반 성장을 추구했던 실리콘밸리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오늘날 각광받고 있는 자동차 산업처럼 여러 분야의 고도화된 전문지식을 융합할 수 있는 자들, 즉 남들이 갔던 길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퍼스트 무버인 것이다. 이는 전문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업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잡스 애플의 성공은 이를 잘 말해준다.
 
※ 필자는 27년 경력의 반도체 열사(烈士)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석·박사를 취득한 후 인텔에서 수석매니저를 지냈고,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에 스카웃돼 최연소 상무로 재직했다. 현대자동차 연구소 이사, SKT 부사장(ESG그룹장) 등을 거쳐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으로 활동하며 반도체 정책 보고서 등을 작성했다. 반도체 분야 90여 편의 국제 논문과 Prentice Hall과 고속반도체 설계에 관한 저서를 출간했다.
 

유웅환 전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인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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