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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액소작제로 소작료 수익 안정화 추구한 김요협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24)]

장인에게 받은 전답을 자산 삼아
줄포 일대 땅 사들이고 쌀 수출

 
 
김성수(1891~1955)와 김연수(1896~1979)의 생가. 이 집의 큰댁 안채·사랑채와 작은댁 안채는 조부인 김성수·연수 형제의 조부 김요협 옹이, 큰댁 사랑채·문간채는 김성수의 양부 김기중 옹이, 작은댁 사랑채는 형제의 아버지 김경중 옹이 각각 지었다. [사진 고창군청]
경성방직주식회사(현 경방)를 설립하고 동아일보를 창간하였으며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를 인수한 김성수(金性洙, 1891~1955)와 삼양사(현 삼양그룹)를 창업한 김연수(金秊洙, 1896~1979) 형제. 일제 강점기 호남의 대표적인 엘리트이자 기업가인 두 사람은 가문의 막대한 재산 위에서 성공을 일궜다. 그런데 불과 3대 전만 해도 그들의 집안은 가난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김요협(金堯莢, 1833~1909)이 일으켜 세우기 전까지는 말이다.  
 
김요협은 전라남도 장성군에 살던 선비 김명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애초 집안에 재물도 별로 없었지만, 장남에게 재산 대부분이 상속되던 당시 풍습상 유산을 물려받는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데 이런 그를 전라북도 고부 지역의 거부 정계량이 사위로 맞이한다. 김요협의 사람됨이 출중하기도 했지만, 그가 호남을 대표하는 대학자이자 문묘(文廟)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문묘에 배향된 학자는 우리 역사를 통틀어 불과 18명으로 엄청난 위상과 권위를 가졌으며, 그 명예는 후손들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호남을 넘어 조선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뼈대 있는 집안’이라 할 수 있다. 정계량은 김요협을 사위로 삼는다면 그가 가진 ‘사회적 명예’를 자신의 가문에 이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요즘도 돈 많은 부자 집안이 명망 있는 교육자 집안과 사돈을 맺듯이 말이다.
 
아무튼 정계량의 사위가 된 김요협은 처가 인근의 흥덕군, 현재의 고창군 부안면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장인으로부터 약간의 전답을 받았는데, 이것이 바로 김씨 가문이 쌓은 거대한 부(富)의 시작이었다. 자, 그렇다면 김요협은 어떻게 재산을 불려 나갔던 것일까?
 
우선, 안목이다. 김요협은 자신의 소유지를 넓힐 때 동북쪽의 평야 지대가 아닌 서북쪽 바다 방향을 택했다. 호남평야의 왼쪽 가장자리이다. 상대적으로 땅값이 싼 이유도 있었지만, 간척을 통해 토지를 확장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또한, 김요협은 줄포의 지리적 장점을 알아보고 주로 이 일대의 땅을 사들였다. 이후 1875년부터 줄포에 항만이 조성되고 줄포항이 전라북도 쌀 무역의 집산지로 성장하면서 김요협은 큰 이익을 거두게 된다(훗날 손자 김연수는 이곳에 정미소와 선착장을 세우고 선박을 운영하는 등, 본격적인 쌀 수출에 나섰다). 
 
김성수(1891~1955)와 김연수(1896~1979)의 생가. [사진 고창군청]
다음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은 소작농 관리 방식이다. 한국 근대사 연구의 권위자 카터 J. 에커트에 따르면 김요협과 그의 아들들은 소작농을 압박하여 소작료를 극대화하는 방식을 채택했다고 한다. 매년 소작농을 교체하면서 소작료를 인상하고, 소작료를 책임질 보증인을 내세우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김요협은 지주와 소작농이 일정한 비율로 수확물을 나눠 갖는 ‘분익소작제’(타조법)가 아니라 수확량과 상관없이 매년 일정한 소작료를 받는 ‘정액소작제’(도조법)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했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워낙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보통 ‘분익소작제’에서는 지주가 수확물에서 종자(種子)와 전세를 공제하고 수익을 나눴다. 이에 비해 ‘정액소작제’에서는 지대 징수율을 낮춰주는 대신 전세와 종자 비용을 소작인에게 부담케 한다. 각기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합리적이고 정상적으로만 운영한다면 두 제도 사이에 우열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정액소작제’의 경우 소작농이 추가로 얻게 되는 수확물은 오롯이 자기 소유가 된다. 열심히 일할수록 더 많이 벌 수가 있는 것이다. 즉, 김요협은 소작의 세습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하였고, 보증인을 세우게 함으로써 소작료를 안정적으로 거두었다. 대신 소작인에게는 수입을 늘릴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소작농의 생존권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냉혹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자본의 축적이라는 측면에서는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상인·공인과 접점 많은 이권 부서 두루 거쳐

마지막으로 김요협은 관직에 진출하여 정치적 위상을 확보했다. 그는 과거시험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1872년(고종 9) 선공감(繕工監)의 감역이 된다. 종 9품의 낮은 벼슬이었지만, 선공감은 토목과 영선(營繕)을 담당하는 관청으로 오늘날의 국토교통부 역할을 했다. 각종 이권이 몰려있는 부서의 실무자가 된 것이다.  
 
또한 이후에는 의금부 도사, 영릉 참봉, 상서원 별제, 사옹원 주부를 역임했는데, 앞의 세 자리는 명예직 개념이라지만 사옹원은 대궐에서 사용하는 식재료를 총괄하는 기관이다. 왕실용 도자기를 생산하는 광주요도 가지고 있다. 주부는 사옹원의 실무를 책임지는 자리로, 요컨대 김요협은 상인, 공인과 접점이 많은 이권 부서를 두루 거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얻은 정보와 인맥이 어떤 형태로든 그의 재산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본다.
 
김요협(1833~1909)의 손자이자 일제 강점기 시절 학생 모습의 김성수(왼쪽 1891~1955)와 김연수(오른쪽 1896~1979). [사진 위키원드]
그뿐만이 아니다. 김요협은 전라남도 화순군수, 전라북도 행(行, 품계가 관직보다 높을 때 붙인다) 진안현감, 경상북도 군위군수를 두루 역임했다. 당시가 매관매직이 성행했을 때이므로 그 역시 돈으로 관직을 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증거는 없다. 조선시대에는 선정(先正)의 자손에게 관직을 내리는 관행이 있었으니, 문묘에 배향된 김인후의 후손이라는 덕을 보았을 수도 있다.  
 
그는 뒤이어 정3품 비서원승(祕書院丞), 종2품 가선대부 시종원(侍從院) 부경(副卿) 등 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고위직에 올랐는데, 최소한 능력도 없이 매관매직한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김요협의 관계 활동은 그의 집안과 재산을 보호하는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었고, 지역사회에서 김씨 가문의 지위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상으로 살펴본 김요협은 미래에 대한 안목을 바탕으로 장기적이면서도 효율적인 이익을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력을 활용하고 냉혹하게 행동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변화의 방향을 감지하고 가장 유리한 방식을 선택하곤 했는데, 이러한 김요협의 기질은 그의 자손들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아들 김경중은 토지 가격의 폭락을 예측하고 대다수 지주가 토지를 매입하는 일에 혈안이었을 때 참고 기다렸다.  
 
그러다 지가가 폭락하자 매점에 나서 재산을 불렸다. 손자 김성수와 김연수는 섬유공업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이를 선도했다. 나아가 두 형제는 동아일보, 중앙학교, 보성전문학교, 경성방직, 남만방적, 삼양사 등 교육-언론-상공업을 아우르는 거대 집단을 구축하였는데, 바로 한국형 ‘재벌’의 시초로 불린다. 그 출발점이 김요협이었던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김준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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