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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 개개인의 가능성을 보고 장기 투자하라 [유웅환 반도체 열전]

자질·열정·조직 공통분모 찾아 삼박자
개인역량 계발계획, 괄목상대 만들어

 
 
어린이에게 권투를 가르치고 있는 코치. [AP=연합뉴스]
실리콘밸리에 종사하는 엔지니어들은 개인역량 계발계획(IDP: individual development plan)이라는 걸 설정한다. 연초에 매니저와 함께 계획을 수립하고 해당 매니저가 관리, 점검, 그리고 평가한다. 여기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일년치 프로젝트를 망칠 수도 있다. 이 때 크게 세 가지 사항을 생각해 보면 좋다.  
 
첫 번째, 개인의 자질이다. 자신이 어떤 분야에 적합한 사람인지 그리고 그 분야에 대한 나의 객관적인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을 때 업무 달성 확률이 높아진다. 두 번째, 개인의 열정이다. 그 분야에 대한 관심도가 높을수록 업무 효율성 및 업무 만족도가 높아진다. 세 번째, 회사 조직이다. 회사가 누군가를 뽑았다면 그가 회사를 위해서 어떠한 일을 해주기를 기대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자질·열정·조직의 공통분모를 찾는다면 본인에게 어울리는 최상의 업무를 찾을 수 있다. 쉽게 말해 좋은 업무 계획이란 내가 잘 할 수 있고, 내가 좋아하고, 회사가 원하는 일을 목표로 설정하는 것이다.
 
필자와 같은 부서에 ‘마리오’라는 측정 기술자가 있었다. 10여년 간 측정을 전담해온 그는 단순한 업무를 반복적으로 진행하면서 일 자체에 대한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 필자는 앞선 기준에 맞춰 마리오와 함께 수 차례의 면담을 통해 IDP 초안을 완성했다. 이후에는 분기별로 점검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IDP 세부사항을 재설정했다. 그의 개인역량 계발을 지속적으로 코칭했다. 필자가 새로운 직장에 가게 되면서 못 보게 되었는데, 수년이 지나 한 저명한 학회에서 재회하게 됐다.  
 
그가 직접 본인의 논문을 발표하러 온 것이다. 그와 같이 전문대를 졸업한 기술자가 박사급 인력들과 기술 토론을 하는 것은 미국에서도 쉬운 일은 아니다. 괄목상대(刮目相對)였다. 그가 성장한 모습에서 IDP의 성과를 봄은 물론 매니저로서의 보람에 뿌듯했다.
 
이때 목표 설정은 현실과 이상을 두루 고려해야 한다. 과제 및 프로젝트 설정 자체는 늘 매니저와의 상의 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직원들은 적극적으로 개인의 의사를 표현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능력치에는 문제가 없지만 개인적인 관심이 덜한 과제가 주어지는 경우라면, 추후 매니저에게 자신의 관심사에 가까운 일을 할당해 줄 것을 요구할 수 있다.  
 
반대로 관심은 많지만 현재 능력치에서 수행하기 힘든 과제가 있을 수도 있다. 이때는 일련의 교육 과정을 요구해볼 수도 있다. 자기 계발 계획의 성공적인 완수는 회사에 기여하는 결과를 낳지만, 그 출발점에는 항시 개인의 성장이라는 동기와 의지가 결부되어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을 알면 회사를 도울 수 있고, 나 자신이 성장하면 회사도 발전할 수 있다.
 
물론 계획을 세웠다고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업무는 날씨처럼 변덕스럽다. 예상보다 일이 늦어지거나, 역량 미달로 과제 수행이 어렵거나, 시장 상황이 급변하거나 그 외에 건강, 육아, 결혼 등 개인 신상의 변화로 업무 수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혼자서 진땀을 빼느니 즉각 멘토에게 털어놓고 함께 해결책을 모색하는 게 상책이다.
 
경기 중 다친 풋볼 선수의 건강상태를 점검하고 있는 코치와 의사. [AP=연합뉴스]
멘토는 수직적? 수평적인 멘토도 필요해
보통 직장 내에서 멘토라는 건 사적인 관계와 공적인 관계에서 동시에 만들어진다. 전자는 직장 내 동료들 사이에서 개인적인 친분을 바탕으로 업무상에 도움을 주고받는 경우이다. 후자는 실리콘밸리 회사들이 경영 시스템 속에서 조직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프로젝트가 진행되면 그 팀의 구성원들은 두 종류의 매니저와 함께 일한다. 우선 팀의 구성원들은 실무상에서 프로젝트 리더의 도움을 받는다. 이처럼 구성원과 리더가 대등한 관계에서 상호 협력하는 조직 문화를 ‘수평경영’이라고 한다. 한편 인사상의 여러 문제들에 있어서 팀원들은 인적 자원을 관리하는 업무를 주로 하는 피플 매니저로부터 관리를 받는다. 이러한 매니저는 회사 구성원들의 자기 계발 계획, 레벨 세팅, 과제 점검, 수행 평가, 그리고 승진 등과 같은 전 영역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와 같이 상하 관계 속에서 위계를 갖는 조직 문화를 ‘수직경영’이라고 한다.
 
좋은 조직이란 멘토들이 수평적으로도 많고 수직적으로도 많은 곳이다. 이러한 조직은 수평 경영의 장점과 수직 경영의 장점을 잘 응용해 매트릭스 구조와 같은 유연한 조직 문화를 지향한다. 여기서 말하는 유연한 조직 문화란 수직 경영에서 발생하는 상하명령 중심의 관료적 경직성을 극복하고 직원 개개인으로 하여금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도록 회사 차원에서 발 벗고 나서서 돕는 구조를 말한다.  
 
유연한 조직일수록 직원들이 비빌 언덕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 그들은 주변의 동료·선배·상사에게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을 수 있어 회사 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쉬이 줄일 수 있고, 또한 스스로 비전을 계발하는 과정에서 주변으로부터 실질적인 도움을 받는다.
 
실리콘밸리의 반도체 회사 중 하나인 브로드컴에는 유명한 매니저 한 명이 있었다. 한 번은 그가 아끼는 직원 중 하나가 집에서 사무실까지 통근하기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하자 해당 직원의 집으로 찾아가 재택근무에 필요한 모든 장비를 다 설치해주었다고 한다.  
 
새로 들어온 엔지니어가 처리한 데이터를 1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자신이 처리한 데이터와 비교 대조해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 전설적인 매니저의 일화는 멘토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배려와 신뢰라는 걸 일깨워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직장 생활의 만족도는 연봉과 같은 수치만이 아니라 개개인이 회사에서 느끼는 자부심이 중요하게 작동한다. 단기적으로는 좋은 연봉과 높은 직급이 나의 가치를 높여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직원 스스로가 자신의 직무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이나 그 스스로가 회사에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직업에서의 소명의식을 갖지 못할 수 있다.  
 
한 개인의 잠재력이 어떤 순간,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실리콘밸리는 직원 개개인의 가능성을 보고 장기적인 투자를 하는 곳이며 멘토들은 모두 그러한 성장을 견인하는 수레바퀴와도 같다. 내가 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동료가 인정해주는 곳, 그곳이 좋은 회사다.  
 
※ 필자는 27년 경력의 반도체 열사(烈士)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석·박사를 취득한 후 인텔에서 수석매니저를 지냈고,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에 스카웃돼 최연소 상무로 재직했다. 현대자동차 연구소 이사, SKT 부사장(ESG그룹장) 등을 거쳐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으로 활동하며 반도체 정책 보고서 등을 작성했다. 반도체 분야 90여 편의 국제 논문과 Prentice Hall과 고속반도체 설계에 관한 저서를 출간했다.
  

유웅환 전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인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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