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자다움에 대한 오해
Becoming 'Real' Men at Last
로널드를 보자마자 나는 울며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며 ‘엄마, 엄마’를 되뇌고 흐느끼는 그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로널드의 등에 손을 얹었다.
그날 로널드를 만나기 전에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 거실에서 나를 기다리던 어머니를 봤다. 어머니는 옆집에 사는 로널드(진짜 이름은 아니다)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주셨다.
주초에 아주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모두 곧 회복되리라 낙관했다. 그래서 그 죽음은 충격이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붙박인 듯 꼼짝도 않고 앉아 아주머니를 언제 마지막으로 봤던가 기억해 내려 애썼다. 그리고 지난 5년간 함께했던 내 친구 로널드에게 생각이 미쳤다. “로널드하고 얘기는 해 보셨어요?”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못 들었니? 로널드가 전화로 널 찾았다고 했잖니”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계속 뭐라고 말씀하셨지만 내겐 입만 움직거릴 뿐으로 보였다. 로널드에게 뭘 해줘야 하나? 나는 이렇게 묻고 싶었다. “난 겨우 15살이에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하죠?” 하지만 어머니는 당신의 눈물도 감당하기 힘드셨다.
2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 인생에서 할아버지만큼 가깝게 지낸 남자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내 일상을 함께 나누는 가족 중에서 유일한 남자였다. 가장 슬퍼해야 할 상실이었지만 13살의 나는 할아버지 무덤가에 서서 남자라면 이래야 한다는 나름의 착각에 빠져 있었다. 덴절 워싱턴 같은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의 얼굴에 영원히 새겨질 그런 태연자약함을 잃지 않으려고 너무도 애를 쓴 나머지 정작 내 감정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로널드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날도 할아버지의 장례식 때 느꼈던 그 어리석은 감정이 다시금 찾아들었다. 나는 전화기를 들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리키니?”
“응, 무슨 일이야?”
“로널드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대.”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을 믿기 힘들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의 순간이 찾아왔다. “곧 갈게.” 리키가 말했다. 아니,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차례로 친구들에게 똑같은 전화를 했다. 한결같이 곧 오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로널드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나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변변찮은 인간이라고 느꼈다. 로널드의 얼굴에 드리워진 괴로움은 내가 지금까지 봐온 그 어떤 표정과도 같지 않았다. 한 남자가 다른 한 남자를 위로하는 모습을 한번도 못 봤기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로널드를 잡아끌자 로널드는 마치 내내 그렇게 하고 싶었던 사람처럼 허물어지듯 내 팔에 안겼다. 로널드를 품에 안고 같이 눈물을 펑펑 쏟아내면서 나는 내 사춘기적 존재가 지금껏 한번도 허락받지 못한 그런 해방감으로 충만해지는 느낌이 됐다.
방으로 들어온 친구들도 그 광경을 보고 모두 감정이 북받쳐 곧장 로널드와 내게 달려와 눈물을 흘렸다. 당시 십대였던 우리 흑인 소년 네 명은 전부 아버지가 없었고, 이런 식으로 개인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잠시 동안 그렇게 사랑과 위로로 친구를 감쌀 수 있었다.
오로지 흑인 남성들만 속 깊은 자기감정을 표현하기가 어렵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사실 모든 인종의 남성들이 몇 가지 정형화된 틀 속에서 진정한 남성성의 본질을 찾도록 강요받는다. 특히 흑인 남성들에게는 그 발견이 혼자만의 몫으로 남겨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으며, 본보기라고 해봤자 영화나 힙합음악에 나오는 일차원적 인물들이 전부다.
흔히 흑인 남성은 나이가 들수록 완고하고 무정해진다고 말한다. 아마도 대다수가 편모나 편부 슬하에서 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좀 딱딱해 보이지 않으면 유약한 사람으로 이해된다. 유약함은 남자에게 가장 해로운 품성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감정을 감추고 지내다보면 살면서 행하는 여러 가지 선택과 관계에도 영향이 간다. 내게 찾아드는 감정을 솔직히 받아들이고 의논하고 마주하기를 꺼린다.
흑인 아이들이 대다수인 고등학교를 다녔던 나와 로널드와 친구들은 복도에서 만나면 언제나 손을 들어 손바닥을 마주치거나(악수의 일종이다) 두 팔로 서로를 안곤 했지만 그 이상으로 깊은 감정을 나누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각자의 문제나 감정에 대해서는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로널드의 집에서 함께 울었던 그날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손바닥 부딪치기는 더 복잡해지지 않았고, 포옹도 더 길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옛날과는 또 다른 친밀감과 존중감이 생겨났다. 이처럼 새로 생긴 유대감에 대해서 우리는 한번도 얘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얘기를 하느냐 안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룻밤 동안 우리는 서로 뒤엉켜 눈물을 흘리며 남성다움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온몸으로 반박했다. 눈물은 옳았다. 그리고 눈물은 책임감 있는 행동이었다. 그날 흘린 눈물 중 많은 부분은 로널드와 그의 상실을 슬퍼한 것이고, 또 적지 않은 눈물은 내 할아버지를 위해 흘러내렸다.
(필자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산다.)
로널드를 보자마자 나는 울며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며 ‘엄마, 엄마’를 되뇌고 흐느끼는 그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로널드의 등에 손을 얹었다.
그날 로널드를 만나기 전에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 거실에서 나를 기다리던 어머니를 봤다. 어머니는 옆집에 사는 로널드(진짜 이름은 아니다)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주셨다.
주초에 아주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모두 곧 회복되리라 낙관했다. 그래서 그 죽음은 충격이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붙박인 듯 꼼짝도 않고 앉아 아주머니를 언제 마지막으로 봤던가 기억해 내려 애썼다. 그리고 지난 5년간 함께했던 내 친구 로널드에게 생각이 미쳤다. “로널드하고 얘기는 해 보셨어요?”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못 들었니? 로널드가 전화로 널 찾았다고 했잖니”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계속 뭐라고 말씀하셨지만 내겐 입만 움직거릴 뿐으로 보였다. 로널드에게 뭘 해줘야 하나? 나는 이렇게 묻고 싶었다. “난 겨우 15살이에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하죠?” 하지만 어머니는 당신의 눈물도 감당하기 힘드셨다.
2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 인생에서 할아버지만큼 가깝게 지낸 남자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내 일상을 함께 나누는 가족 중에서 유일한 남자였다. 가장 슬퍼해야 할 상실이었지만 13살의 나는 할아버지 무덤가에 서서 남자라면 이래야 한다는 나름의 착각에 빠져 있었다. 덴절 워싱턴 같은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의 얼굴에 영원히 새겨질 그런 태연자약함을 잃지 않으려고 너무도 애를 쓴 나머지 정작 내 감정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로널드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날도 할아버지의 장례식 때 느꼈던 그 어리석은 감정이 다시금 찾아들었다. 나는 전화기를 들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리키니?”
“응, 무슨 일이야?”
“로널드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대.”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을 믿기 힘들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의 순간이 찾아왔다. “곧 갈게.” 리키가 말했다. 아니,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차례로 친구들에게 똑같은 전화를 했다. 한결같이 곧 오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로널드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나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변변찮은 인간이라고 느꼈다. 로널드의 얼굴에 드리워진 괴로움은 내가 지금까지 봐온 그 어떤 표정과도 같지 않았다. 한 남자가 다른 한 남자를 위로하는 모습을 한번도 못 봤기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로널드를 잡아끌자 로널드는 마치 내내 그렇게 하고 싶었던 사람처럼 허물어지듯 내 팔에 안겼다. 로널드를 품에 안고 같이 눈물을 펑펑 쏟아내면서 나는 내 사춘기적 존재가 지금껏 한번도 허락받지 못한 그런 해방감으로 충만해지는 느낌이 됐다.
방으로 들어온 친구들도 그 광경을 보고 모두 감정이 북받쳐 곧장 로널드와 내게 달려와 눈물을 흘렸다. 당시 십대였던 우리 흑인 소년 네 명은 전부 아버지가 없었고, 이런 식으로 개인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잠시 동안 그렇게 사랑과 위로로 친구를 감쌀 수 있었다.
오로지 흑인 남성들만 속 깊은 자기감정을 표현하기가 어렵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사실 모든 인종의 남성들이 몇 가지 정형화된 틀 속에서 진정한 남성성의 본질을 찾도록 강요받는다. 특히 흑인 남성들에게는 그 발견이 혼자만의 몫으로 남겨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으며, 본보기라고 해봤자 영화나 힙합음악에 나오는 일차원적 인물들이 전부다.
흔히 흑인 남성은 나이가 들수록 완고하고 무정해진다고 말한다. 아마도 대다수가 편모나 편부 슬하에서 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좀 딱딱해 보이지 않으면 유약한 사람으로 이해된다. 유약함은 남자에게 가장 해로운 품성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감정을 감추고 지내다보면 살면서 행하는 여러 가지 선택과 관계에도 영향이 간다. 내게 찾아드는 감정을 솔직히 받아들이고 의논하고 마주하기를 꺼린다.
흑인 아이들이 대다수인 고등학교를 다녔던 나와 로널드와 친구들은 복도에서 만나면 언제나 손을 들어 손바닥을 마주치거나(악수의 일종이다) 두 팔로 서로를 안곤 했지만 그 이상으로 깊은 감정을 나누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각자의 문제나 감정에 대해서는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로널드의 집에서 함께 울었던 그날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손바닥 부딪치기는 더 복잡해지지 않았고, 포옹도 더 길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옛날과는 또 다른 친밀감과 존중감이 생겨났다. 이처럼 새로 생긴 유대감에 대해서 우리는 한번도 얘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얘기를 하느냐 안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룻밤 동안 우리는 서로 뒤엉켜 눈물을 흘리며 남성다움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온몸으로 반박했다. 눈물은 옳았다. 그리고 눈물은 책임감 있는 행동이었다. 그날 흘린 눈물 중 많은 부분은 로널드와 그의 상실을 슬퍼한 것이고, 또 적지 않은 눈물은 내 할아버지를 위해 흘러내렸다.
(필자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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