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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 매물 품귀…‘묻지마’계약

전세 매물 품귀…‘묻지마’계약

1만 가구가 넘는 대단지에 전세 매물이 고작 10건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경기도 분당 신도시 야탑동에서 10년째 부동산 중개업을 하고 있는 공인중개사 김모(59)씨의 한숨 섞인 얘기다. 김씨는 “전세 매물은 씨가 말라 부르는 게 값이다. 요즘처럼 전세 매물이 귀한 적은 외환위기 이후 처음인 것 같다”며 혀를 내둘렀다. 인근의 또 다른 중개업자는 “매물이 없다 보니 세입자들이 아파트 내부도 보지 않고 ‘묻지마 계약’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초가을 서울·수도권 전세 시장이 심상치 않다. 8·31 부동산 종합대책의 후폭풍 때문이다. 보유·양도세 중과에 아파트를 사기보다 전세로 거주하려는 수요가 급증하면서 전셋값이 치솟고 있다. 지역도 서울 강남이나 분당 신도시·용인 등 수도권 남부 지역에 그치지 않고 외곽으로 확산되고 있다. 전세가 품귀현상을 빚다 보니 매물을 선점하기 위해 중개업소끼리 얼굴을 붉히는 일도 흔하다. 이러다 ‘전세대란’이 오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곳곳에서 전세 품귀=
지난 봄만 해도 전셋값 상승은 국지적인 현상이었다. 올해 입주량이 많이 줄어든 경기도 용인·화성이나 재건축 이주 수요가 몰린 의왕·과천을 중심으로 강세였다. 하지만 8·31 대책 이후 평택·구리·의정부·동두천·남양주·인천 등 수도권 전역에서 전셋값이 뛰고 있다. 인천 서구, 남양주 호평·평내지구는 대책 이후 전셋값이 1000만∼2000만원 올랐지만 매물이 귀하다. 이들 지역은 올 봄만 해도 기반시설이 채 갖춰지지 않아 입주를 꺼려 전세 매물이 넘쳤던 곳이다. 남양주 성실공인 관계자는 “대책 이후 집을 사려는 사람은 없고 전세만 찾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구리 토평동이나 남양주 도농동 일대 전셋값이 많이 오르자 싼 집을 찾아 외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지역 전셋값은 32평형 기준으로 6000만∼7000만원 선이다. 인천 마전동 한 중개업자는 “전세를 구해 달라는 대기자가 10명은 족히 된다. 이러다 보니 대출을 많이 낀 매물도 쉽게 나간다”고 전했다. 세입자들이 입주를 꺼리는 재건축 대상 10평형대 전셋값도 덩달아 강세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주공 1단지 15평형은 대책 이전만 해도 6500만원이면 구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7500만원을 호가한다. 송파구 가락시영·강동구 고덕 주공도 평형별로 같은 기간 500만∼1000만원 뛰었다. 가락동 대성공인 남효승 사장은 “재건축 단지는 언제 철거할지 몰라 전세를 찾는 사람이 드물어 값이 계속 내렸는데 모처럼 강세를 보인다”고 말했다. 또 다른 중개업자는 “전세금을 올려주지 못하는 세입자는 차액의 일부를 월세로 돌리고 있다”고 전했다. 일부 지역에선 소형 빌라나 원룸주택 전셋값도 오르고 있다. 인천 서구 연희동 빌라 18평형은 2500만원으로 대책 이후 500만원 상승했다. 행복공인 김영진 사장은 “전셋값이 갑자기 올라 세입자들이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동안 공급 과잉에 몸살을 앓았던 강남 테헤란로나 일산 신도시 일대 오피스텔 월세도 강세다.

◇왜 전세난인가=
최근 전셋값 급등은 주택을 덜 지었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외환위기 직후 주택건설 부족으로 전셋값이 급등했던 2001∼2002년과는 다른 양상이라는 얘기다.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올해 수도권 아파트 입주 예정 물량은 20만1149가구다. 지난해보다 1만 가구 정도 줄긴 했지만 적은 물량은 아니다. 지난 4년간 평균 입주물량(18만4454가구)보다 9% 정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건교부 관계자는 “서울지역의 경우 올해와 내년엔 평균 6만 가구 이상의 입주물량이 안정적으로 공급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데도 전셋값이 급등하는 것은 정부의 세금 중과 정책으로 시장에서 수요·공급에 병목현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보유세와 양도세를 무겁게 매긴다고 하자 매수 대기자들이 대거 전세 수요로 돌아선 것이다. 아파트값이 하락세를 보이자 일단 전세로 산 뒤 매수 타이밍을 잡으려는 관망파가 늘어난 것도 또 다른 요인이다. 분당의 한 중개업자는 “더욱이 불황 여파로 기존 전세 거주자들도 이사하기보다 재계약을 통해 눌러앉다 보니 수급 불균형이 가중되는 양상”이라고 말했다. 이사 비용으로 부담해야 하는 100만∼300만원을 아끼려는 것이다. 전세시장이 요동치자 정부도 긴장하는 눈치다. 집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내놓은 대책이 되레 무주택 서민들의 주거 안정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교부 관계자는 “전셋값이 이처럼 급등할 줄은 몰랐다”며 “전세시장 안정을 위한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말했다.

◇매매가에 영향 주지는 않을 듯=
시장의 관심은 전셋값 오름세가 매매가 상승으로 이어질까 하는 점이다. 전셋값은 매매가의 선행지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시나리오가 당장 현실화할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다. 아파트 매매가 대비 전셋값이 절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국민은행에 따르면 8월 말 현재 서울 지역 아파트 매매가 대비 전셋값 비율(전세 비율)은 47.2%다. 이는 외환위기 이후 전세 비율이 피크를 이뤘던 2001년 10월 64.6%에 비해선 17.4%포인트나 떨어진 것이다. 일부 재건축 단지의 전세 비율은 20∼30% 선에 머물고 있다. 전세 비율이 하락했다는 것은 전셋값보다 매매가가 더 많이 올랐다는 뜻이다. 저금리 여파로 아파트 투자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건설산업연구원 김현아 부연구위원은 “전세 비율이 60%를 넘는 상황에선 전셋값 상승이 매매가를 밀어올릴 수 있지만 지금처럼 50%를 밑도는 상태에선 큰 영향을 주기 어렵다”고 말했다. 건국대 부동산학과 고성수 교수도 “집을 보유할 경우 세금 부담이 무거워지는데 전셋값이 오른다고 매매 수요로 쉽게 이어지겠느냐”고 말했다. 건설산업전략연구소 김선덕 소장은 “이번 대책이 2003년 10·29 대책보다 강도가 세 최소한 연말까지는 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라며 당분간 매매가 약세가 계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서울 강남권 재건축 아파트나 수도권 외곽 아파트 등은 앞으로 매매가 자체가 더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실수요자들은 시장을 좀 더 지켜본 뒤 가격이 더 떨어진 다음에 사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이 같은 전반적인 매매가 약세 시장에서 전셋값이 올라 매매가를 상승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일각에선 최근 전셋값 상승 흐름을 저평가돼 있던 전셋값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전망과 주의점=
전셋값은 당분간 강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9월부터는 가을 이사철 성수기이기 때문이다. RE멤버스 고종완 사장은“전세 품귀현상이 다음달까지 지속될 경우 국지적으로 전세 파동이 생길 수도 있다”며 “전세는 가급적 서둘러 구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수요자들은 입주예정 단지나 입주한 지 2년이 되는 단지에 눈을 돌려보는 것도 괜찮다. 이런 곳은 전세 매물을 찾기가 기존 단지보다는 수월하다. 다만 요즘 중개업소에 나와 있는 매물은 하자가 있는 게 많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분당 해내밀공인 관계자는 “전세 매물이 귀하다 보니 일부는 대출이 60% 이상 끼거나 권리관계가 복잡한 매물까지 계약하고 있다. 나중에 경매에 부쳐질 경우 보증금을 날릴 수 있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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