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중반만 되면 조기 퇴직 걱정
40대 중반만 되면 조기 퇴직 걱정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44) 부장은 요즘 일주일에 이틀은 퇴근 후 요리학원으로 향한다. 김 부장이 요리학원에 등록한 것은 3월 초. 퇴직 이후를 생각해 조리사 자격증이라도 따둘 요량으로 3개월 과정의 한식 조리사 자격증반을 찾았다. 40대 중반의 나이를 감안할 때 직장생활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불투명해 미리미리 준비해 두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선배·동료는 물론 후배들도 회사를 떠나는 경우가 부쩍 늘어 ‘안정된 직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졌다”며 “요리학원에 다니는 다른 직장인들도 모두 같은 생각에 미래 준비를 하고 있더라”고 말했다. 직장인들의 고용 불안감이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기업마다 상시 구조조정이 일상화된 때문이다. 조기퇴직 역시 부쩍 늘고 있다. 45세면 정년이라는 ‘사오정’, 56세까지 회사에 남아 있으면 도둑이라는 ‘오륙도’, 38세면 직장에서 퇴출된다는 ‘삼팔선’ 등의 살벌한 용어도 이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평균수명은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데 ‘월급쟁이 수명’은 갈수록 짧아지고 있는 것이다. 주요 기업들의 정기 인사 배경 설명에는 ‘세대교체’라는 용어가 단골로 등장한다. 고용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코노미스트」의 이번 조사에서도 고용불안은 큰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그러나 전문가와 일반인이 느끼는 온도차는 작지 않다. 오피리언 리더 100명 조사에서는 50명이 고용불안이 문제라고 지적해 9위로 나타났지만, 일반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41.5%로 가장 많은 이가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국민 입장에서는 ‘생존’의 문제가 걸린 만큼 다른 어느 것보다 피부에 와닿는다는 것이다. 온라인 리크루팅 업체인 잡코리아의 최근 발표 내용은 직장인들의 고용 불안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정규직 직장인 1556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절반에 가까운 45.2%가 ‘현재의 고용상태에 불안감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들은 36.2%였다. 고용에 대한 불안감은 가정이나 직장에서 할 일이 가장 많은 40대 남성에게서 최고조에 달했다. 무려 69.5%가 불안감에 시달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40대보다는 나은 편이지만 30대의 불안감(남성 40.2%, 여성 48.9%)도 컸다. 심지어 직장생활을 한 지 몇 년 안 되는 20대 남자도 세 명 중 한 명꼴로 고용 불안감을 호소했다.
임금피크제가 그나마 대안 이 같은 불안감은 직장에서 밀려날 경우 재취업이 쉽지 않다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또 대부분 기업에서 정년을 채우고 퇴직하기가 어려운 것도 원인이다. 월급쟁이들은 “일반 기업에서 정년을 채우고 퇴직하는 이가 거의 없다”며 “정년 제도라는 게 있으나마나 한 게 아니냐”고 불만을 쏟아낸다. 비정규직의 고용 불안감은 정규직보다 더 심각하다. 정규직과 하는 일은 같은데도 신분이 불안하고 월급 수준도 낮기 때문이다. 기업들도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을 선호한다. 정규직보다 아무래도 고용 조정이 손쉽고 인건비도 싸기 때문이다.
노동부에 따르면 2005년 8월 현재 비정규직 근로자는 548만 명으로 전체 임금근로자의 36.6%나 된다. 이는 첫 조사가 이뤄진 4년 전의 26.8%에 비해 9.8%포인트 늘어난 수치다. 임금 수준도 정규직의 62.6%인 월평균 116만원에 그쳤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비정규직의 불만도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최근의 KTX 여승무원 파업도 비정규직 고용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다. 은행권 역시 최근 수년간 인력 충원을 비정규직 중심으로 하는 바람에 비정규직이 전체 직원의 28.8%나 되고 급여는 정규직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며 노동계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안정된 직장’인 공무원과 공기업의 인기는 치솟고 있다. 학원의 공무원 입시 대비반은 대학 졸업생들로 넘쳐난다. 직장인들의 고용불안에 대한 기업들의 대응도 소극적이다. 올 들어 경제가 회복세로 들어섰지만 기업들은 고용을 늘릴 기미가 안 보인다. 연초 경총이 120개 기업을 대상으로 올해 경제와 고용시장 전망을 묻는 질문에 45%가 고용시장이 지난해보다 악화될 것으로 봤고, 호전될 것이란 대답은 22%에 그쳤다. 32%는 지난해와 비슷할 것으로 답했다. 자연히 노사관계에서도 고용불안이 핫이슈가 되고 있다. 노동 전문가들은 “노사 협상의 주요 이슈가 임금에서 고용으로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한다. 올해 역시 고용안정에 대한 노동계 요구가 거셀 것이란 전망이다. 전경련 조사에 따르면 올해 임단협 때 노조의 중점 요구사항은 고용안정 보장이 19.8%로 가장 많을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외환은행 매각 우선대상자 선정 과정에서도 고용 보장이 이슈로 떠올랐다. 경합에 나섰던 DBS(싱가포르개발은행)가 외환은행 인수 후에도 직원들의 고용을 보장하겠다고 제의하자 외환은행 노조가 즉각 DBS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냈다. 전문가들은 직장인들 사이에 뿌리깊게 자리 잡은 고용 불안감의 근원을 외환위기 이후 달라진 기업환경에서 찾는다. 삼성경제연구소 장상수 연구위원은 “외환위기 이후 성과주의를 강조하는 영미식 경영방식이 폭넓게 확산되면서 고용 불안감이 심화됐다”고 말했다. 기업들이 생존과 경쟁력 회복을 위해 인위적 고용 조정을 수시로 추진하면서 불안감이 증폭됐다는 것이다. 문제는 기업들의 이 같은 경영추세가 앞으로 더 심화될 것이라는 데 있다.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등 급변하는 경영환경 속에서 기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상시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속도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흐름 자체는 거스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용 불안이 장기화·고착화되면서 이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실적을 강조하다 보면 직원들 간의 경쟁이 지나쳐 위화감이 조성되고 직무 몰입도가 떨어진다”고 우려했다. 특히 40, 50대의 고용 불안감이 커지다 보면 회사 전체적으로 불안감이 확산돼 생산성 저하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자칫 국가 전체적으로 활력을 잃어 중장기적인 성장 동력을 마련하는 데 마이너스가 될 것이란 우려도 있다. 이 같은 고용불안이 중산층 위기의 원인이 된다는 진단도 나온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는 중앙일보와 한국사회학회 공동 주최 ‘중산층의 역할과 사회발전 포럼’에서 “조기퇴직이 정착되면서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져 한국 직장인의 평균 근속연수가 5.6년으로 일본(12.2년), 영국(8.1년), 미국(6.6년)보다 짧아졌다”며 “시장논리를 과도하게 내세우다 보니 중산층의 고용불안이 생겼다”고 말했다. 고용에 대한 불안감을 해결하려는 시도도 눈에 띈다. 임금 피크제가 대표적이다. 대한전선의 경우 제조업체로는 처음으로 2003년 생산직 직원에 대해 임금 피크제를 도입한 데 이어, 지난해 말에는 정년을 57세에서 59세로 2년 연장했다. 그러나 대다수 기업은 아직 소극적이다. 노동연구원이 지난해 10월 종업원 100인 이상 1024개사를 조사한 결과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곳은 24곳(2.3%)에 그쳤다. 도입을 추진 중이라는 곳을 합해도 4.2%에 불과하다. 779개사(76.1%)는 도입을 검토한 적이 없다고 한다. 대기업의 77.5%, 중소기업의 66%가 이 제도를 도입한 일본과 대조적이다. GM대우가 5년 전 정리해고했던 근로자 전원을 국내 처음으로 재고용해 업무에 복귀시킨 것도 주목된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그러나 다른 기업으로 확산될 가능성은 높아보이지 않는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GM이기에 가능하지 않았겠느냐”며 “직장 내 선후배 관계를 중요시하는 국내 기업 분위기에서는 도입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고용을 안정시키면서 성과주의도 정착시키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임직원들이 해고의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믿음’을 주고, 경쟁력이 뒤지는 직원들의 능력개발을 유도·지원해야 한다. 또 40, 50대 중고령 근로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데 맞춰 이들을 활용하기 위한 고용형태나 직무개발 등의 제도개선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선한승 노동교육원장은 “노동시장의 유연성만 강조하다 보면 고용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며 “이를 해결하려면 사회안전망 등을 통해 일자리의 안정성도 동시에 추구하는 ‘유연 안정성’으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경제 성장을 통해 일자리가 창출되도록 경제정책의 방향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주문도 있다.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고용불안 문제가 상당부분 해결될 것이라는 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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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피크제가 그나마 대안 이 같은 불안감은 직장에서 밀려날 경우 재취업이 쉽지 않다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또 대부분 기업에서 정년을 채우고 퇴직하기가 어려운 것도 원인이다. 월급쟁이들은 “일반 기업에서 정년을 채우고 퇴직하는 이가 거의 없다”며 “정년 제도라는 게 있으나마나 한 게 아니냐”고 불만을 쏟아낸다. 비정규직의 고용 불안감은 정규직보다 더 심각하다. 정규직과 하는 일은 같은데도 신분이 불안하고 월급 수준도 낮기 때문이다. 기업들도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을 선호한다. 정규직보다 아무래도 고용 조정이 손쉽고 인건비도 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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