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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층 주상복합, 에어컨 안 켜면 52도 한증막

초고층 주상복합, 에어컨 안 켜면 52도 한증막

▶여름철 한증막 현상은 상당수 고층 주상복합 APT에서 나타난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 관계 없음.

"아무런 대안이 없습니다. 기존 초고층 주상복합은 물론이고 현재 건설 중인, 그리고 앞으로 지어질 아파트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해결책이요? 에어컨뿐입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모 박사의 얘기다.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으면 한증막이 되는 국내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의 현실이다. 한 채에 수십억원씩 하는 주상복합 아파트에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8월 9일. 서울 지역 낮 최고 기온은 섭씨 33도였다. 찌는 듯한 더위였다.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내부는 어떨까? 일반 서민들은 그런 최고급 아파트는 더위라는 것 자체를 모르고 살 것이라고 예단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사정을 들여다 보면 그렇지가 않다. 이날 이코노미스트는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의 ‘한증막 현상’을 실험해 보았다. 그곳에 사는 누구도 공개하기를 꺼리는 탓에 이와 가장 유사하다는 환경의 모형에 기자가 들어가 본 것이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고층 건물의 ‘한증막 효과’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지어놓은 모형이었다.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온도는 섭씨 52도. 내부로 들어간 지 불과 5초도 안 돼 콧등에 땀이 맺혔다. 5분 정도 지난 후 밖에 나오니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안과 밖의 온도 차이가 무려 20도 가까이 난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들어서기만 하면 그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는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의 속사정은 심각했다. 어느 한 곳의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 그렇다고 보면 틀림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모든 초고층 주상복합의 공통된 문제”라는 것이 K건설 관계자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건설사나 관련 전문가들은 “해결책이 없다”면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최상위 부자들만 산다는 이곳 주민들이 겪는 고통은 비단 여름뿐 아니다. 봄볕이 따스해지는 4월이면 시작된다. 이때부터 아파트 관리소장은 괴로워진다. 주민들에게 불려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로 시공사와 입주자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는 곳도 많다. 소송이 진행 중인 곳도 있다.

환기 안 돼 고기도 못 구워 먹어 왜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일까? 우선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보통 30층이 넘는 초고층이어서 창문을 크게 낼 수 없다. 기압 차이로 발생하는 풍압과 돌풍 문제로 대부분 초고층 주상복합의 창문은 매우 작다. 모 주상복합은 사람 머리가 겨우 들어가는 작은 창문이 55평형에 3개뿐이다. 여기에 한쪽 벽면은 통유리로 외장하기 때문에 햇볕 입사량이 많다. 건물이 높아 태양열이 들어오는 시간도 그만큼 길다. 특히 서향 아파트의 경우 심각하다. 여름이면 해가 지는 오후 늦게까지 뜨거운 열기에 그대로 노출돼 속은 찜통이 돼 버린다. 이런 문제를 시공사들이 몰랐을 리는 없다. 그만큼 해결 방법을 찾으려는 시도도 많았다. 하지만 창문에 단열필름 코팅을 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 경우 전문가들은 “10~15% 온도를 낮추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입주자들도 애를 썼다. 열을 차단하는 데 가장 효과가 좋다는 반사형 코팅제나 UV차단막(자외선 차단막), 고급 목재 블라인드를 설치했다. 물론 효과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노력들이 합해진 것이 여름철에 살만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지불하는 전기료가 100만~200만원이다. 더위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환기가 안 되는 상태에서 에어컨 4~5대를 가동하다 보면 내부 공기가 에어컨을 통해 흡수되고 배출되는 일이 반복된다. 집안 공기가 나빠질 수밖에 없다. 모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입주자 대표는 “노인들의 경우 강한 에어컨 바람으로 안구 건조를 호소하고, 나쁜 공기로 기관지에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에는 ‘공조시스템’이라고 해서 공기의 온도, 습도, 기류 및 청정도를 가장 알맞은 상태로 조정하는 설비가 필수다. 그런데 이 공조시스템마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중앙통제식이 대부분인 공조시스템이 전체 건물의 환기를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 건설 전문가는 “우리나라의 경우 공조시스템의 문제라기보다 건물 설계의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공조기능이 최적화될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외관을 고려한 설계를 한 후 거기에 설비를 맞추려다 보니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환기가 안 되다 보니 건강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물론 음식도 마음대로 해먹기 어렵다. 고기를 굽거나 청국장을 끓이는 일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주민들은 하소연한다. 고기를 한번 구워먹고 나면 냄새가 하루 종일 빠져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로 시공사와 입주자 간에 소송이 걸려 있는 L주상복합 아파트의 경우 건설사는 하청 공조시스템 업체에 책임을 떠넘기고, 해당 업체는 설비 문제가 아니라 설계 변경의 문제를, 입주자들은 양쪽 모두에 책임을 묻고 있는 실정이다. 설령 공조시스템이 잘 돌아가 더운 열기를 어느 정도 흡수한다고 하더라도 뜨거운 공기는 흡수가 쉽지만 데워진 벽체 열기는 쉽게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오직 믿을 것은 ‘에어컨’뿐인 실정이다.

공사비 5% 늘어난다고 외면 대부분 초고층 주상복합이 안고 있는 문제고, 현실적으로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다고 하지만 건설 당시 최소한의 대안은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한 관계자는 “1997년께 독일의 한 업체가 초고층 주상복합을 건설하려는 국내 굴지의 건설사에 ‘한증막 현상’을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는 기술을 제안했었다”고 털어놨다. 외장을 ‘2중 외피’로 하는 방식이었는데, 이 건설사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공사비가 문제였던 것이다. 보통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를 건설할 때 외장 비용은 전체 공사비의 7~15%다. 독일 업체는 이 건설사에 평당 100만원가량을 제안했다. 일반적인 공사비의 2배가 넘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되면 총 공사비는 약 5%가 늘어나게 된다. 건설사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초과 비용이었다. 이 업체 관계자는 본지의 이러한 지적에 “그때 기술로는 최고, 최적의 기술이었다”고 실토했다. 이런 뻔한 사정을 시공사들이 알고 있었다면 최소한 외벽 창문에 설치하는 열 차단용 블라인드는 시공사가 필수로 설치해줘야 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대부분 입주자는 이 블라인드 비용을 자가부담하고 있는 실정이다. 열을 반사시키는 단열코팅을 몇 겹으로 하는 곳도 있지만 이 경우 초고층에서 맛 볼 수 있는 ‘조망권의 행복’은 포기해야 한다. “해결할 방안이 전혀 없는 것이냐”는 질문에 한숨을 내쉬며 “현재로서는 없다”고 단언하는 건설 전문가의 말은 쉽게 흘릴 얘기가 아니다. 몇몇 곳에 해결책을 묻자 “반사유리를 쓰면 다소 효과는 있다” “50㎜ 두께 이상의 알루미늄, 목재 블라인드를 쓰면 5도 정도 낮출 수 있을 것”이라는 대답뿐이었다. 업계 관계자 대부분은 기술적인 해결책이 없다고 한다. D대 건축학과 교수는 부자들이 산다는 주상복합의 문제에 대해 이렇게 꼬집었다. 어쩌면 부(富) 지상주의에 대한 통렬한 질타라고 할 수 있다. “주변에 높은 건물이 많아 그늘 효과가 있는 주상복합을 고르든가, 저층에 사는 방법 말고 대책에 없다고 봐야죠. 그런데 기자양반, 전기료 그 정도 부담할 만큼 여유있게 사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 요 몇 년 사이 오른 집값 감안하면 그냥 사는 것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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