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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중견기업] GM이 인정한 ‘플라스틱 아트’

[파워 중견기업] GM이 인정한 ‘플라스틱 아트’

1985년 3월, 후배가 경영하는 부천시 삼정동의 장난감 공장에 들른 채의숭(68) 대의테크 회장(당시 건국대 교수)은 한발짝도 발을 뗄 수가 없었다. 후배 사장은 회사가 부도나 종적을 감췄고 월급은 6개월이나 밀려있었던 것. 하릴없이 하늘만 쳐다보던 13명의 직원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도저히 발을 뗄 수가 없더군요. 직원 13명을 모아놓고 ‘제가 월급은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믿어주십시오’라고 덜컥 말해버렸습니다. 신기하게 한 사람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믿음에 사업을 시작했지요. ” 그 다음날부터 ㈜대우아메리카 사장, 대학교수에 이은 채 회장의 ‘3막 인생’이 시작됐다. 당시 채 회장은 대학 졸업 후 삼성에서 7년, 대우에서 13년 근무하다 경제학 박사학위를 따면서 대학 강의에 전념하던 때였다. 다시 팔을 걷어붙인 채 회장은 공장 청소부터 박스 나르기까지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봉급쟁이-교수-경영인으로 22년이 지난 현재 대의테크는 5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연간 30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자동차부품 업체로 성장했다. 그러나 ‘인수 아닌 인수 당시’의 회사는 말 그대로 ‘장난감 같은’ 수준이었다. “매출은 연 8900만원이 고작이었고 설비는 낡았습니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쌓아둔 것이라곤 빚밖에 없었지요. 회사의 모양새를 바꾸는 것이 급했습니다. 장난감에서 출발했으니만큼 플라스틱 사출업으로 전환해 대기업을 노크했습니다. ” 끈질긴 설득 끝에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 납품할 기회를 잡으면서 회사는 건실한 플라스틱 사출업체로 변신할 수 있었다.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은 자동차 운전석의 계기판과 오디오·공조장치 조절기 등이 장착되는 인스트루먼트 패널(IP)이다.
레조·라세티·젠트라 등 어지간한 GM대우차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대시가 이 회사 제품이라고 보면 된다. IP말고도 라디에이터 그릴, 휠 커버, 범퍼 등 70여 가지의 플라스틱류 자동차부품을 생산하고 있다. 채 회장은 “IP는 ‘자동차부품의 꽃’으로 불린다”며 “복합적 구조의 금형이 있어야 찍어낼 수 있고 편의성·디자인도 중시되기 때문에 고난도의 설계기술을 필요로 한다”고 설명했다. 공정도 복잡하다. IP는 설계는 물론 사출금형 공정에서 아주 작은 흠집도 용납하지 않는다. “IP가 자동차 내부의 디자인을 좌우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자동차의 얼굴’로 불리는 거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하지만 계기판이든, 오디오 조절기든 어떤 모듈이라도 복잡한 구조로 된 금형이 필요하지요. 플라스틱으로 만드는 자동차부품 중에서 가장 공정이 까다롭다고 보면 됩니다. ”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동안 국내 중소기업에서는 자체 설계가 불가능한 품목으로 여겨졌다. 현대자동차가 현대모비스를 통해 공급받는 정도였다. 4~5년 전만 해도 영국·일본 업체에 설계를 의존해오던 형편이었다. 2002년 10월 GM이 대우자동차의 새로운 주인이 되면서 대의테크가 기회를 잡았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 GM의 수직 계열사가 없었기 때문에 플라스틱 사출 전문업체인 대의테크가 이를 대신한 것이다. 처음엔 GM대우에서 설계도면을 받아 제품을 납품하는 수준이었다. 채 회장은 “하나둘 경험이 축적되면서 중앙기술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개발 투자에 사력을 다했다”고 말했다.

‘자동차의 얼굴’ 만들어 인천시 부평에 있는 선엔지니어링 연구소에 가면 채 회장의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선엔지니어링은 대의테크의 연구개발을 전담하는 자회사. 설립한 지 이제 2년밖에 안 됐지만 호주 홀덴, 인도 타타 상용차에 IP 설계기술을 수출하는 쟁쟁한 실력파 회사다. 이 회사 실험실에서는 에어백 측정 장치, 진동 실험, 헤드 임팩트 테스트, 온도 센서 타점 기록계 등 플라스틱과 관련된 모든 자동차 실험장비를 갖추고 있다. 채 회장은 “설계에서 사출금형, 도금에 이르기까지 플라스틱이 들어가는 자동차부품과 관련해서는 모든 과정을 자체 기술력으로 해결, 검증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이 회사의 기술력은 파트너에서도 증명된다. 대의테크는 사출금형 부문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일본 아크(Ark)그룹으로부터 30%의 지분투자를 받았다. 투자액도 액면가의 6배. ‘인사나 경영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그것도 아라키 도시히로 아크그룹 회장이 1년이나 ‘구애’한 끝에 투자를 유치한 것이니 대의테크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GM의 글로벌 파트너가 되면서 2004년엔 세계 3위 자동차부품 회사인 캐나다 마그나(MAGNA) 그룹과 합작 투자해 대의인티어를 세우기도 했다. 인티어는 IP 분야에 주력하는 마그나의 자회사. 인티어로부터 투자 받을 때는 ‘기술료 650만 달러, 로열티 350만 달러를 내라’는 협상 조건을 물리치고 거꾸로 27억원의 기술개발료를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는 매그너스 후속 모델인 V-250(모델명 토스카)을 개발하던 때였다. GM대우 측에서 마그나 그룹의 인티어와 손을 잡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세계적 업체와 제휴하면 얼마나 영예로운 일인가 싶어 미국 인티어 본사로 날아갔습니다. 막상 가보니 기술료와 로열티로 1000만 달러를 내놓으라는 겁니다. 순간 숨이 턱 막혔습니다. ‘로열티는 줄 수 있다. 대신 영업권 450만 달러를 내놓아라’고 큰소리 쳤지요. 결국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협상에 실패한 그는 귀국하자마자 ‘인스트루먼트 패널 드림팀’을 만들었다. GM대우에서 파견된 ‘용병 연구원’을 포함한 개발인력 22명으로 신기술개발팀을 꾸린 것. 이들과 채 회장은 토, 일요일도 없이 5개월 동안 신제품 IP 개발에 매달렸다.

GM 네트워크 타고 세계로 그 결과 두 번째 협상에서는 채 회장이 주도권을 잡았다. 신제품 개발 소식을 듣고 방한한 인티어의 경영진은 “투 섬즈 업(two thumbs up·‘엄지손가락을 올린다’는, 좋다는 의미인데 두 손가락을 들어 최고라는 것을 강조한 것)”을 연발하는 것이다. 그만큼 만족한다는 뜻이었다. 협상 결과 대의테크는 기술개발료로 27억원을 챙긴 다음 경기도 안산에 합작회사를 만들었다. “업계 관계자들이 저희 회사를 방문해 보면 대개는 두 번 놀랍니다. 중소기업치고 이렇게 훌륭한 전시실, 실험실을 갖춘 곳이 없다는 것이 첫째입니다. 신제품을 내놓는 데 4개월이면 충분하다고 하면 또 놀라지요. 통상 신제품 IP를 개발하려면 8~9개월 걸리거든요. 세계적인 전문가들이 ‘자동차에 들어가는 최고의 플라스틱 아트’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가 가장 행복하지요. ” 이제 채 회장은 해외 진출에 뜻이 더 많다. 특히 GM의 글로벌 네트워크에 희망을 걸고 있다. 이미 2005년부터 중국에 대의연태기차부품을 세워 상하이기차(SGM)에 IP를 공급하고 있다. 채 회장은 “내년까지 중국 선양, 멕시코 등에도 공장을 지어 매출 5000억원대 회사로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인까지 포기했던 작은 장난감 업체를 인수해 세계적인 자동차부품 업체로 키운 채 회장의 경영비결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채 회장의 대답은 간단하다. 직원들에게 ‘꿈의 길’을 열어주면 된다는 것이다. “엔지니어의 꿈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개발한 기술로 쌩쌩 달리는 자동차를 보는 것 아닙니까? 경영자의 역할은 간단해요. 엔지니어가 뛰어놀 들판을 만들어 주는 겁니다. 직원들을 먼저 신나게 달리게 해야 회사가 씽씽 달리지요. ”


대의테크는… 1985년 장난감 회사였던 대의실업을 인수해 자동차부품 업체로 탈바꿈. 2006년 기준, 6개 계열사 1060여 명이 3000억원 매출. ●대의인티어 : 미국 인티어와 합작해 안산에 설립한 내장재 전문업체. 2006년 335억원 매출(68명). ●엠지에스 : 범퍼 전문 생산업체로 GM대우·기아 자동차 등에 납품. 650억원(250명). ●선엔지니어링 : 2005년 설립한 자동차부품 설계 전문회사로 최근엔 해외 마케팅 주력. 호주 홀덴, 인도 타타자동차 등에 제품 설계·개발 서비스. 150억원(150명). ●한산 : 전북 군산의 종합 부품공장으로 GM대우 등과 거래. 382억원(207명). ●대의연태기차부품 : 중국 상하이기차(SGM)에 인스트루먼트 패널 공급. 43억원(95명).


세 번의 시련, 세 번의 기회


“시련 있어도 좌절은 없다”

충남 대천농고를 졸업한 채의숭 회장은 “가난한 생활이었지만 세 개의 꿈이 있었다”고 말한다. 박사학위를 받아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 첫째다. “대천 시내 은행 직원이 군수보다 월급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기업의 사장이 되는 것이 두 번째 꿈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전 세계에 100개의 교회를 봉헌하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84년 건국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아 강단에 섰고, 20년 넘게 기업경영을 하고 있으니 두 개의 꿈은 이뤘다. 몽골·스리랑카·캄보디아 등에 44개의 학교와 교회를 지어 기증했으니 마지막 꿈도 원만히 진행 중이다. 그러나 세 개의 꿈은 세 개의 시련을 거친 다음 찾아왔다. 87년, 어렵사리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 납품할 기회를 잡았다. 그런데 웬걸, 그해 6월 부천이 생긴 이래 최대의 호우가 급습했다. 비가 얼마나 왔는지 회사 사무실 천장까지 물이 찼다. 채 회장은 “당시 KBS에서 호우 피해를 취재 나왔는데 상황을 보도하던 취재진도 같이 울었다”고 회고 했다. 기적은 이튿날 일어났다. 망연자실 공장 설비 앞에 서 있는데 터벅터벅 들어오는 이가 있더란다. 김성중 당시 대우자동차 부사장(현 델코 회장)이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친동생으로 채 회장과는 ㈜대우 시절부터 막역한 사이였다. 그는 “너는 틀림없이 성공할 거야”하는 말과 함께 봉투를 건냈다. 그 안에는 1억원이 들어있었다. 이듬해 채 회장은 이 돈을 모두 갚았다. 91년, 천안에 있던 엠지에스 공장이 화재로 전소됐다. 소방차 28대가 출동했지만 불길을 잡지 못해 평택 미군부대 화학차의 지원을 받을 만큼 큰 불이었다. 공장 강철 프레인이 엿가락처럼 녹는 것을 넋놓고 쳐다봐야 했다. 손실만 70억원대. 주위 사람들은 모두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간신히 불길이 잡혔다. 채 회장은 그날 32명의 거래처 사람을 모두 만났다. “나는 분명히 일어난다. 1년만 기다려달라”고 설득했다. 99년, 이번엔 대우자동차가 부도났다. 200여 개에 이르는 주요 협력업체 가운데 50개가 부도났다. 대우에서 받을 돈이 119억원, 은행에 어음결제를 해줘야 할 돈이 89억원이었다. 돈받을 길이 막막했으니 어음 만기일이 사형 선고일이었다. 이번엔 거래은행의 지점장이 도와줬다. “이렇게 좋은 회사를 부도나게 놔둘 수 없다. 특별융자를 해주겠다”며 10억원의 운영자금을 대출해준 것. 회사는 부도 위기를 넘겼고 GM디우를 새로운 파트너로 맞아 수출 길을 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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