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 갚겠다’총 들고 나선 어린 전사들
‘원수 갚겠다’총 들고 나선 어린 전사들
시아파·수니파 분쟁으로 학교 못가고 민병대에 동참하는 비참한 삶 선택 아마르가 소총을 들고다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사담 후세인 시절 육군 준장으로 몇 차례의 전쟁에서 실전을 치렀다. 아마르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사격장에 드나들었다. “그때 총소리에 익숙해졌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난해 가을 바그다드 동네의 이맘(이슬람 지도자)이 주민들에게 총을 들고 침입자에게 맞서라고 촉구할 때 즉시 그 말을 따랐다. 침입자들이란 수니파 동네 진입을 노리는 시아파 민병대였다. 아마르는 동네 자경단에 가입했다. 오합지졸인 그들이 밤에 임시로 만든 검문소와 지붕 위 전망대에서 경비를 섰다. 10월 중순 아마르가 마흐디군을 상대로 생애 최초의 본격 전투를 치렀다. 아마르는 시아파 민병대를 “넝마주이와 강도들”이라고 폄하했다. AK 소총을 잘 사용했다고 말했다. “두 명은 내 총에 다치거나 죽었는지 모른다. 우린 그날 밤 여섯 명 이상을 죽였다.” 아마르는 열일곱 살이다. 이제 막 턱수염이 나기 시작한 호리호리한 소년이지만 인생의 어두운 면을 보통사람보다 훨씬 많이 봤다. 지난해 가을 바그다드 암살단의 희생자 수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아마르는 동네 사원에서 매장하기 전의 시신 염습 작업을 도왔다. 일부 시신은 화공약품으로 타버렸다. 사지가 잘리고 눈알이 파인 시신도 있었다. 11월 초 아마르의 이웃에 사는 같은 시아파 대학생 청년 한 명이 실종됐다. 마흐디군이 설치한 즉석 검문소에서 벌어진 일이다. 매장하려고 사원에 가져온 그의 시신을 보니 목이 잘리고 없었다(옷을 보고 친구의 시신인 줄 알았다). “뜰에 나가 토했다”고 아마르가 말했다. 그러고는 복수를 다짐했다. 종파분쟁은 날이면 날마다 이라크를 온갖 방법으로 망가뜨린다. 또 이라크 차세대 젊은이들을 망쳐서 미래를 어둡게 한다. 많은 동네가 그렇듯이 이라크는 젊은 나라다. 인구의 절반가량이 18세 이하다. 그 어린이들이 특히 혼란 속에서 자랐다. 아마르 같은 청소년은 이웃나라 이란과의 전쟁으로 국력이 쇠진한 시절 태어나 두 차례 더 전쟁을 치르고 그 중간에 경제제재라는 힘든 세월을 보냈다. 이들은 현재 이라크가 직면한 여러 문제에 특히 취약하다. 노동사회부에서 근무하는 사회학자 하산 알리는 적어도 100만 명의 이라크 청소년이 전쟁으로 생활이 파괴되는 체험을 했다고 추산했다. 부모와 집을 잃고, 종파분쟁으로 지역사회가 갈가리 찢기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 아이들은 힘과 폭력의 원칙을 믿게 된다”고 알리가 말했다. “미래에 사회 전체는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틀림없이 체험하게 된다.” 이라크 사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중동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장차 전 세계로 폭력이 폭력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 이라크 수도를 안정시키고 재건하려는 막판 “병력 증강”의 일환으로 새 미군 병력이 바그다드로 떠난다. 그런 시점에서 우리가 이라크의 더 큰 전투에서 이미 패배하지 않았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조너선 파워스 예비역 육군 대위는 2003년 이라크에서 복무했고 현재 비영리단체를 이끌고 이라크 청소년들과 함께 일한다. 현 폭력사태가 만들어내는 신세대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일자리도 주어지지 않으며, 상처를 입었고, 특히 남자의 경우 민병대나 저항세력이 부추기는 보복 충동에 넘어가기 쉽다고 강조했다. 그 청소년들의 일부가 이미 무기를 들었다. 수니파든 시아파든 대부분 반대 종파를 상대하는 싸움이지만 미군이 그 상대인 경우도 종종 있다. “나라 재건을 배워야 할 젊은이들이 오히려 파괴가 목적인 무기 사용법을 배운다”고 파워스는 말했다. 이 양상을 고치지 않으면 “우리는 장차 중동 평화를 위해 이 젊은이들과 싸우게 된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슬람 성전에 관한 책을 쓴 프랑스 학자 질 케펠은 분노와 두려움 속에 자란 그런 청소년의 상당수가 뚜렷한 목표가 없는 반군이 될 잠재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들이 어떤 목표로 성전을 벌일까”라고 그가 물었다. “어른이 된 뒤 서로 죽일까, 총부리를 서구세계로 돌릴까?” 만일 운 좋게 치안이 확립되면 레바논·알제리·발칸반도의 대다수 전쟁세대가 그랬듯이 그들도 무기를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케펠이 말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현 폭력의 순환이 끝이라기보다 시작에 훨씬 더 가깝다는 점이다. 알카에다가 각별히 이라크 청소년을 포섭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대부분의 현지 정보는 싸움에서 실전 경험을 쌓는 성인 성전주의자가 문제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급진단체들은 늘 극심하게 폭력적인 변화를 겪는 사회에서 가장 쉽게 병력을 보충해왔다. 비근한 일례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다. 모자라는 병력을 전쟁 고아(종종 난민 청소년들)로 채웠으며, 그들에게 이슬람이라는 접착제로 다진 다른 유형의 가족 구조를 제공했다. 이라크에는 그런 청소년이 많다. 바그다드의 14세 소년 타카에게 축구나 컴퓨터 게임 이야기를 하면 호리호리한 소년의 잘생긴 얼굴이 금세 밝아진다. 가슴 속에 든 부담에서 잠시 해방되기 때문이다. 2005년 6월의 무더운 어느 날 저녁, 타카와 아버지 탈리브가 바그다드 남부 두라에 있는 옷가게 문을 닫았다. 그때 인근에 주차됐던 차에서 괴한이 내리더니 경고도 없이 탈리브의 머리와 몸에 권총을 발사했다. 탄창이 빌 때까지 12발을 몽땅 쐈다. “총소리가 아직도 들린다”고 타카가 말했다. “마치 꿈 같다.” 타카는 소리를 지르며 시내로 도망갔다. 가족이 몇 시간 동안 찾아다녔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지금도 타카는 가끔 불안증 발작을 일으킨다. 그러면 가족이 꽉 붙잡고 동네 약국에서 사 온 진정제를 먹인다. 이런 얘기는 타카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이라크 정신과 전문의들은 2006년 세계보건기구의 일부 후원을 얻어 조사를 했다. 모술에서 학교에 다니는 학생 1090명의 30%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STD)에 시달린다는 결과가 나왔다. 바그다드에서는 조사 대상의 47%가 “마음에 큰 상처가 남는 일을 겪은 적이 있다”고 대답했고, 14%가 PSTD 증세로 고통받았다. 근심·우울·악몽 등의 증세인데 모두 청소년 정신 건강에 특히 해롭다. “한밤중에 깨어나 다음날 아침 학교 갈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청소년이 있다”고 ‘이라크세대조직’이라는 미국 지원단체에서 일하는 나일 수비가 말했다. “그들을 죽이거나 납치하려고 길에서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을까?” 이라크 심리학협회가 발표한 2006년 2월 보고서에서는 조사 대상 청소년의 92%가 학습장애 증세를 보였다. 타카는 다른 의미에서도 전형적이다. 강제로 집에서 쫓겨나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야만 하는 주민이 날로 늘어나는데 타카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유엔에 따르면 그런 사람이 무려 170만 명이나 된다. 타카의 가족은 시아파다. 그들 가족은 아버지가 살해되기 전 수니파가 다수인 두라 동네를 떠나라는 익명의 경고를 여러 번 받았다. 지금은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시아파 동네에서 산다. 바그다드의 동네들은 이웃 간에 정이 두터워 종파나 민족에 상관없이 이웃끼리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 도왔다. 부모는 내 자식 남의 자식 가리지 않고 서로 돌봤다. 어린이는 어디서든 쉽게 도움을 얻었다. 지금은 타카처럼 종종 상처 입은 난민들이 같은 종파라는 이유로 한데 모여 민병대의 보호를 받는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낸다. 일단 피폐한 이들 가정은 다시 일어설 기력이 거의 없다. 전쟁으로 고아가 되거나 아버지를 잃은 어린이가 몇 명인지 믿을 만한 자료가 없지만 종파 학살에서 죽은 이라크 민간인은 대부분 18~40세 남성이다. 이라크 적신월사는 여성가장 가구가 엄청나게 증가했다고 말했다. 이는 여성의 사회활동이 거의 없는 전통적인 이라크 사회에서는 큰 문제다. 팔라자에 사는 주마 아메드 알이사위(17)는 아버지가 미군의 수배 대상이 되어 지하로 숨는 바람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오전에는 고등학교에 나가지만 방과후에는 돈을 벌려고 택시를 몬다. “힘들어 죽겠다”고 장신의 건장한 이 소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 나이에 이런 고난과 걱정을 다 떠안기는 어렵다.” 한때 안락하게 살던 중산층인 타카의 대가족 열한 명은 지금 한 사촌(20)이 도와준다. 타카 역시 학교를 그만두고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걱정이다. 지난해 9월 이후 다른 이유로 학교를 그만둔 어린이가 수백만 명이다. 단지 등교하는 일 자체가 엄청나게 위험해진 학생이 많았다. 바그다드의 학생들은 매일 아침 등굣길에 바그다드에 1000개쯤 있으리라 추산되는 검문소를 대여섯 개, 혹은 그 이상 통과해야 한다. 아부 모하메드 아비드 투아예스 변호사는 세 자녀의 아버지다. “매일 딸을 학교에 데려다 준다. 딸을 차에서 내려주는 순간 눈앞에서 납치사건이 일어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올해 신학기 초 두 지방의 학교들이 종파분쟁으로 문을 닫았다. 교사 수백 명이 살해되고 학교 건물이 박격포 공격을 받거나 총격전으로 파괴됐다. 지난해 3월 파티마 압둘 멜릭(11)이 바그다드에서 통학 버스를 타려는 순간 마스크를 쓴 괴한을 가득 태운 진한 고동색 차가 갑자기 파티마 앞에 정지했다. 그러고는 요란한 총소리가 났다. 아이들이 소리지르면서 정신없이 열린 문으로 버스에서 내려보니 눈앞에 사랑했던 기사 아저씨가 피투성이 시체로 변해 누웠다. 그 뒤로 파티마는 한동안 학교에 가지 못했다. “지금도 총소리만 나면 몸이 떨린다.” 교육부 추산으로 이라크 초등학생 350만 명 중에서 현재 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30%뿐으로 지난해의 75%보다 줄었다. 그래서 “현 상황이 2006~2007년 교육에 매우 중요하다”고 이라크의 유니세프 사무소 책임자 후삼 사브리는 말했다. 대다수 초등학교가 문을 열었고 정부가 자녀를 좀 더 안전한 지역으로 옮기기 바라는 가정을 위해 전학을 도와주지만 수백만 어린이가 고작해야 산발적 교육을 받는다. 사브리는 전 학년이 낙제해 1년을 더 다니게 되면서 가뜩이나 부담 많은 학교 제도가 마비되는 사태가 오지 않을까 걱정했다. 어느 바그다드 학교의 감독관 움 피라스는 이런 여건에서 아이들 가르치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교사가 늘었으며 아이들의 학습 의욕도 떨어졌다고 말했다. “학년을 무사히 마치는 학생도 실은 정규교육의 절반도 받지 못한 처지”라고 그는 말했다. 설상가상으로 바깥사회를 혼탁하게 만드는 종파 갈등이 교실 안으로 진출했다. 바그다드의 한 초등학교 여교사가 안전을 이유로 익명을 요구하면서 마흐디군이 자기네 학교를 보호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많은 학부모가 자녀의 등교를 막았다고 말했다. “전에는 600명이 넘었던 학생이 요즘은 400명도 안 된다.” 이 선생에 따르면 특히 수니파 학생의 수가 줄면서 시아파 학생으로 대치됐다. 교육도 “교사가 어느 종파인가”에 달렸다고 말했다. 다른 학교에서는 어느 종파인지 명백히 드러나는 이름 때문에 교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학생들의 신고가 접수됐다. 이 모든 정황이 지금 거리를 지배하는 종파 폭력단의 품안으로 이라크 어린이들을 몰아간다고 파워스를 비롯한 사람들이 입을 모았다. 올해 최악의 폭력사태가 벌어진 두라에서 활동하는 미군은 경쟁관계인 민병대들이 동네학교 담벼락에 써놓은 낙서를 지우느라 페인트칠을 하는 경우가 많다. “민병대가 학교를 아동용 선전무대로 이용한다”고 로저 헌치커(31) 중사는 말했다. 군 정보에 따르면 마흐디군이 그 지역의 아이들에게 장난감 총을 나눠줬다. 아이들이 실제 AK 소총보다 약간 작은 그 장난감을 갖고 밤이 되면 아버지와 삼촌이 경계를 서는 바로 그 검문소에서 “민병대 놀이”를 한다. “어린이들에게 실제 무기 사용법을 훈련시키고 우리를 자극해 민간인을 죽이게 하려는 의도”라고 레이번 젠크스(22) 상병이 말했다. 총을 든 전사라는 매력은 유혹적이다. 특히 암살단이 자기 형제의 신체를 훼손시킨 체험을 한 아마르 같은 청소년에게는 말이다. 그들의 공포세계에서 민병대원이야말로 가장 막강하다. 성도(聖都) 카르발라 태생인 시아파 소년 알리 사드칸(14)은 현지 사원에서 시체 염습을 거들었다. “모두 머리에 총을 맞았다”고 그 소년은 말했다. 시신 약 300구의 매장을 도왔는데 상당수가 어린이였다. 신앙심이 돈독하며 빼빼 마르고 피부색이 짙은 알리는 그리 큰 체격이 아니다. 망자들을 두고 “그들처럼 약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고 눈물을 참느라 눈을 끔벅이면서 말했다. 알리는 현재 모크타다 알사드르 휘하 마흐디군의 군복인 검은색 셔츠와 바지를 입었으며, 넉 달간 경무기 훈련을 받았다고 말했다. 미국은 이스라엘이 지배하는 신 중동을 만들려고 혈안인데 자신은 “미국의 악의”에 맞설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 알리는 마흐디군이 “나를 사나이로 만들어줘 고맙다”는 말도 했다. 아버지를 여읜 고아가 많은 나라에서 알리의 그 같은 욕구를 과소평가하면 곤란하다. 교전이 치열한 바그다드 동네 사이디야의 한 검문소에서는 이제 갓 콧수염이 나기 시작한 압둘라(13)가 숙달된 솜씨로 AK47 소총을 다뤘다. “짐승들에게서 시아파를 지킨다”고 소년이 수니파 공격대를 가리켜 말했다. 그는 수니파가 미군의 지원을 받아 시아파를 상대로 종교전쟁을 치른다고 생각한다. 시아파 어린이들 사이에는 그런 믿음이 보편적이다. 압둘라는 다섯 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었다. 나중에 가출해 양부모와 학교를 떠났다. 알리와 마찬가지로 마흐디군에서 새로운 소속감을 찾았다. 마흐디군은 이처럼 이라크 사회에서 핍박 받는 사람들에게 손길을 내민다. 압둘라는 너절한 가죽점퍼를 입고 가끔 빨간색과 흰색 체크무늬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는 콘크리트 블록 집들이 있는 동네의 임시 검문소에서 하루 10~12시간 경비를 선다. 검문소란 통나무처럼 토막낸 야자수로 쓰레기가 지저분한 길거리를 가로질러 막아놓은 곳이다. 미군 순찰차가 다가가자 그와 동료들은 무기를 감추고 도망갔다. 교대근무가 끝나면 압둘라가 근처의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 위험 조짐이 없는지 살핀다. 나이 든 사람들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동료들은 그의 지시를 바로바로 이행한다. 압둘라는 헛된 망상을 품지 않았다. 학교에 돌아가 공부해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은 버린 지 오래며, 현재생활이 ‘악몽’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주민을 보호해야 하며 그 임무를 맡아 자부심을 느낀다. 월급이라야 고작 어린 두 여동생을 먹여살리는 정도다. 민병대의 또 다른 매력 요인은 돈이다. 바그다드에서 근무하는 이라크군과 미군 병사들은 아이들이 감시원·심부름꾼·전사로 일하는 이야기를 나눈다. 파워스가 이라크에서 복무하던 시절 급조폭발물을 설치하는 수고비는 1000달러이고, 미군을 죽이는 대가도 1000달러였다고 지적했다. 지금은 아이들이 20달러만 줘도 폭발물을 설치한다고 말했다. 바그다드의 초등학생 아메드 알리(10)가 어느 날 아침 학교에 가는데 어떤 남자가 미소지으며 도움을 청했다. 무려 35달러나 주면서 천가방을 인근의 어느 지점에 갖다 놓으라고 부탁했다. 가방을 그곳에 놓자마자 쾅 터졌고 아메드가 땅바닥에 쓰러졌다. “엎어져서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그칠 수 없었다” 고 돌이켰다. 그 폭탄으로 한 여인과 자녀가 다쳤다. 이라크에는 그런 유인책 없이도 기꺼이 전투에 참여하는 어린이가 너무 많다. 팔루자의 고교생 주마는 16세였던 2005년 9월 미군의 포로로 잡혔다. 미군이 바트당 당원이자 저항운동 동조자인 아버지를 잡으려 그의 집을 기습했다. 아버지가 없자 대신 주마를 잡아갔다. 수갑을 채우고 눈을 가린 다음 인근 미군기지에 가뒀다고 그는 말했다. 주마의 말에 따르면 미군이 24시간 동안 음식과 물을 주지 않고 혼자 내버려뒀다. 두 달 동안 갇혀 지내다가 이라크 보안군에게 넘겨졌는데 그들이 석 달간 고문하다가 풀어줬다. 이제는 미군을 죽이는 일이 소원이다. “무기를 갖고 다닐 생각”이라고 주마가 선언했다. “그들과 싸워 우리 땅, 우리 나라, 우리 종교를 지키겠다.” 미국이 2004년 16세 미만의 저항세력 용의자 107명을 이라크 내의 수감시설에 가뒀다고 발표한 뒤 수감 중인 이라크 청소년이 몇 명인지 발표를 거부했다. 그러나 미군은 전장에서 미성년 전사를 끊임없이 만난다고 브루킹스 연구소의 피터 싱어는 말했다. 그런 아동 전사가 대개 사회 재통합이 가장 어려운 부류라고 구호요원들은 말했다. 무기를 내려놓은 뒤에도 뿌리가 없고 교육을 받지 못해 쉽사리 전투 재개 유혹에 휩쓸린다. 유니세프의 긴급 프로그램 책임자 댄 툴은 르완다와 아프가니스탄 등 분쟁지역의 경험이 많다. 외부인들은 민족 청소를 겪은 사회가 후유증을 딛고 회복하는 데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리는지 과소평가한다고 그가 말했다. 그는 현재 이라크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앞으로 여러 세대 동안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책이 없을까? 파워스의 단체 ‘전쟁소년구호’가 이라크 전역에 청소년센터를 세워 일자리를 제공한다. 한 달의 일부 기간은 쓰레기 줍기와 건물 페인트칠을 , 나머지 기간은 직업훈련을 시킨다. 고등교육부는 학생 약 1만 명과 교사 400명이 어린이를 안전한 학교로 전학시키는 프로그램을 이용했다고 발표했다. “어린이는 대단히 탄력적이다”고 유니세프의 아동보호관 아만다 멜빌이 말했다. 상처 입은 어린이를 적절한 지원체계로 도우면 대부분 정상으로 돌아온다. “믿고 말할 사람, 함께하는 사회활동, 자신을 도와줄 집단이 있다는 믿음, 폭력 없는 사회에서 스포츠를 하거나 중요한 역할을 찾을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문제는 바로 그런 기회들이 전쟁으로 파괴된다는 사실이다. 이라크 중산층(지금 국외에서 사는 난민이 약 200만 명이다)의 대탈출로 가장 덜 종파적인 사회 구성원들이 송두리째 빠져나갔다. 설령 뛰어놀 축구리그가 있다 해도 겁에 질린 많은 학부모가 자녀를 밖에서 놀게 하지 않는다. 친척과 이웃사람들이 매일 참혹한 학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죽은 사람이 많다 보니 대부분의 지역사회에서 어린이가 우러러볼 만한 어른은 이맘뿐이다. 미군의 주둔기간이 길어질수록, 주둔병력이 늘어날수록 잘못되는 병폐의 책임을 뒤집어쓰게 된다. 지난해 여름 미 국무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수니파나 시아파 청소년 열 명 중 아홉이 미군은 점령군이라고 응답했다. 이라크의 차세대가 이 같은 폭력의 고리를 끊고 나올지는 어린이들 본인에게 달렸다. 눈앞에서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소년 타카가 일례다. 그런 큰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도 복수할 생각이 없다. 신심이 돈독한 타카는 위대한 시아파 이맘들의 고통과, 정의와 평화의 새 시대가 곧 동튼다는 믿음에서 위안을 얻는다. 아버지를 죽인 범인들을 죽이고 싶은 생각이 있는지 묻자 고개를 저었다.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기는 싫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라크 어린이들이 비극적인 분쟁에 더 깊이 휘말릴수록 그들이야말로, 또 더 나은 미래를 그리는 믿음이야말로 여전히 이 나라가 가진 최선의 희망이다. With MICHAEL HASTINGS, SCOTT JOHNSON, AYAD OBEIDI, AHMED OBEIDI and MOHAMMED SADEQ in Baghdad, and CHRISTOPHER DICKEY and KAREN FRAGALA SMITH in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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