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銀, 증권사 지급결제 찬성했었다
韓銀, 증권사 지급결제 찬성했었다
한국은행은 2005년 1월 재경부가 의뢰한 ‘증권사 지급결제 업무 취급에 관한 의견 요청’에 대해 ‘허용 가능하다’는 답변서를 보낸 것으로 본지 취재 결과 확인됐다. 당시 한국은행은 증권사들도 저축은행, 새마을금고, 신협 등 서민금융기관의 지급결제 업무 취급 방식과 같은 방법으로 해당 업무를 영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내놓은 것으로 나타났다. 개별적으로 지급결제 업무를 취급하기 힘든 서민금융기관들은 중앙회 또는 연합회를 통해 금융결제원 공동망을 이용하며 지급결제를 하고 있다. 즉 증권사들도 고객예탁금을 관리하고 있는 증권금융을 통해 금융결제원 공동망을 이용하면 지급결제 업무를 취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재경부와 증권업계가 추진하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2005년 4월부터 본격적인 자통법 작업에 착수한 재경부는 한국은행의 이 같은 의견을 수렴, 법에 증권사 지급결제 업무 조항을 명시했다. 재경부 고위 관계자는 “자통법 작업에 착수하기 전 한국은행 등의 의견을 수렴했다”며 “당시 한국은행은 증권사도 지급결제 업무를 취급할 수 있고, 그 방법으로 서민금융기관의 방식을 내놓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최근 한국은행이 주장하는 것과는 상반된 의견이다. 현재 한국은행은 은행의 고유 업무인 지급결제 업무를 증권사에 허용할 경우 금융결제 시스템의 안정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도 “증권사의 고객예탁금에 결제기능이 없어 자본시장 발전에 제약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것 같지 않다”며 불가론을 밝힌 바 있다.
누구를 위한 입장 번복 인가? 이에 대해 재경부 및 증권업계에서는 “자통법 제정을 앞두고 입장을 번복한 의도가 무엇이냐”며 강한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일각에서는 중앙은행이 금융시장 선진화 및 고객 편의 극대화보다는 은행권의 이익만을 대변하기 위해 입장을 번복한 것이라는 지적마저 나오고 있다. 증권업계 고위 관계자는 “증권사가 지급결제 업무를 취급할 수 있는 방법론까지 제시한 한국은행이 입장을 번복한 것은 어떤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며 “중앙은행은 한 나라의 통화정책과 금융 균형 발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은행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고 비난했다. 올 상반기까지 자통법 제정을 목표로 하고 있는 재경부도 심기가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재경부는 당시 한국은행의 의견을 토대로 자통법에 증권사 지급결제 업무를 명시했지만 한국은행이 말을 바꾸면서 입장이 난처해졌기 때문이다. 재경부 관계자는 “법안 마련 전에 의견을 요청하는 이유는 향후 문제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 아니냐”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그는 또 “지급결제 문제가 금융권을 넘어 정치권까지 확대돼 부담스럽다”면서도 보고서 공개 등 극단적인 대립보다 최대한 절충점을 모색할 것이란 뜻을 밝혔다. 한국은행도 이 같은 사실을 시인했다. 그러나 당시 보고서는 한국은행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닌 금융결제국 실무자 차원의 의견이었고, 시기와 상황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번복한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한국은행 금융결제국 고위 관계자는 “당시에도 일단 증권사가 지급결제 업무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냈다”며 “하지만 불가피하게 해야 한다면 서민금융기관의 방식대로 할 수 있다고 밝힌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2006년 9월 자통법 초안이 마련되고 재경부가 다시 의견을 요청했을 때는 금융통화위원회까지 논의해 불가하다는 최종 입장을 전달했다”며 “서민금융기관처럼 지급결제 업무를 취급할 수 있다고 한 것은 금융투자회사 등 대형 투자은행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 아니다”고 밝혔다. 즉 자통법 초안이 마련되기 전에는 증권사의 규모가 작아 서민금융기관들처럼 지급결제 업무를 취급할 수 있었지만 자통법을 통해 대형 투자은행으로 거듭날 경우 규모가 커진 만큼 리스크도 커져 금융결제 시스템의 안전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황건호 증권업협회 회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은행권에선 ‘증권사의 지급결제 업무 허용은 안전성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저축은행·신협·새마을금고 등 서민금융기관도 하고 있는 일을 그보다 전산 능력이나 신용이 우수한 증권사에서 못한다고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고 반박했다.
자통법 통과될 수 있을까 지급결제 문제에 대해 은행권-비은행권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지만 자통법은 늦어도 오는 6월에는 제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재경부도 자신하고 있다. 증권사의 지급결제 업무 취급이 자본시장 발전은 물론 고객 편의를 증대시킨다는 긍정적 여론이 형성되고 있는 데다, 재경위·법사위·국회 등을 장악하고 있는 한나라당도 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최근 증권업계를 방문, “현재 우리나라 자본시장은 선진국에 비해 6~7년가량 뒤지고 있다”며 “자통법이 통과되면 금융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고 재경위 위원들과 상반기 중 법이 통과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자통법 제정과 관련해 쟁점이 되고 있는 증권사 지급결제 허용과 관련해선 대승적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 전 대표는 “자통법이 시행되면 증권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다양한 모멘텀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며 “특히 증권사 지급결제 허용 문제와 관련해선 여러 문제점을 우려하고 있지만 대세는 자통법 제정을 통해 자본시장을 키워나간 후 향후 보완해 나가는 것이 맞다”고 강조했다. 현재 재경위(위원장 정의화 의원), 법사위(위원장 안상수 의원) 위원장은 모두 한나라당 소속이며 각 위원회 구성도 비례 원칙에 따라 한나라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결국 자통법이 표 대결로 가더라도 통과 가능성이 높다. 이에 재경부 관계자는 “일부 국회의원이 지급결제 문제를 계속 지적해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대다수 의원이 긍정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표 대결로 가더라도 이길 수 있다고 본다”고 전했다. 한편 자통법은 4월 23~24일 금융법안 심사 소위를 통과할 경우 재경위·법사위·본회의 등을 거쳐 입법예고될 예정이다.
지급결제가 뭐기에… |
증권사에 허용하면 은행권 1조 이상 손해 자통법으로 인해 금융권과 정부기관, 정치권이 들썩이고 있다. 은행 대 비은행, 재경부 대 한은, 여당 대 야당으로 자통법 찬반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 하지만 정작 논란의 핵심은 몸통(자통법)이 아니라 꼬리(증권사 지급결제 허용)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왝더독(wag the dog)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의원을 필두로 한 야당과 재경부·비은행권은 자본시장 선진화와 고객 편의 증대를 위해 증권사에도 지급결제 업무를 허용해야 한다는 반면, 박영선 의원을 대표로 한 여당과 한은·은행권은 금융결제 시스템 불안을 이유로 이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도대체 지급결제가 뭐기에 몸통을 쥐고 흔드는 것일까? 지급결제란 은행의 공동 전산망을 통해 자금을 이체하는 서비스로, 현재는 은행의 고유업무로 제한돼 있다. 하지만 자통법이 시행되면 증권계좌의 고객예탁금도 은행계좌처럼 카드결제, 송금, 현금 자동입출금기(ATM) 사용 등이 가능해진다. 은행권이 ‘금융결제 시스템의 안전성’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증권사의 지급결제 업무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지만 속사정은 딴 데 있다. 지급결제로 유지되던 은행과 증권사의 종속관계와 한 해 1조원 이상의 이득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증권사가 증권계좌를 통해 고객들에게 자금이체 등 서비스를 하기 위해서는 은행 연계계좌를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자체적인 지급결제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 증권사는 은행의 계좌를 이용하는 대가로 수수료를 지급하는데, 이 수수료만 한 해 150억원에 달한다. 만약 은행들이 연계 서비스를 거부할 경우 증권사들은 아예 지급결제 서비스를 하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증권사들은 은행 눈치를 보면서 서비스할 수밖에 없고, 증권계좌를 이용하는 고객 역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엄청 큰 밥그릇이 일순간 사라진다는 것도 은행권으로서는 못마땅한 이유다. 예대마진(예금과 대출 금리의 차이)이 주 수익원인 은행들은 보통예금을 통해 한 해 2조원 이상의 수익을 챙긴다. 보통예금은 제로금리에 가까워 운용 수익(약 5%)이 고스란히 은행들 주머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증권사의 수시입출금 계좌(CMA)로 인해 보통예금이 위협받고 있다. 고금리(연 4.3%) 상품으로 보통예금 고객들이 빠져나가면서 은행권의 알토란 같은 수익원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현재 증권사 CMA도 은행 연계계좌를 통해 지급결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증권사에도 지급결제 업무가 가능해질 경우 CMA는 완벽한 보통예금 대체 상품이 된다. 특히 증권사들은 지급결제 업무가 가능해지면 고객확보 차원에서 자금이체 등 각종 서비스 수수료를 내릴 가능성이 크다. 현재 은행들은 최고 건당 2000~3000원의 이체 수수료를 받고 있는데 증권사가 관련 수수료를 내릴 경우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따라 낮출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은행은 또 수천억원에 달하는 수수료 수익을 포기해야 한다. 증권사 고위 관계자는 “은행권이 각종 반대 논리를 만들고 전방위적 로비를 하는 것은 지급결제에 엄청난 이권이 달려있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국내 금융시장을 발전시키고 고객 편의를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이기주의적 사고를 버려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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