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값싼 식료품 시대 끝났다

값싼 식료품 시대 끝났다

▶많은 동남아 국가가 앞으로 몇 달 동안 쌀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을 전망이다. 마닐라의 이 창고에 저장된 곡물은 베트남에서 수입한 것이다.

오후가 되면 요리사 보조로 일하는 20세의 링고 푸르가난은 자전거를 타고 마닐라 교외에 있는 퀘존 시티의 달동네 크루스 나 리가스를 지나 집으로 향한다. 어머니는 평소 그가 일터로 돌아가기 전 간식을 먹을 수 있도록 약간의 빵과 과일 주스를 챙겨 놓는다. 그러나 오늘은 쌀이 반쯤 든 플라스틱 용기 말고는 주방에 아무것도 없다. 그가 받는 약 4.70달러의 일당, 그리고 어머니가 대학 식당에서 접시닦이로 일해서 버는 임금으로는 여섯 식구가 모두 먹을 만큼 충분한 음식을 살 수 없다. 최근 몇 달 새 쌀값이 세 배 가까이 오른 탓에 푸르가난의 가족은 보통 아침을 건너뛴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굶어죽을 정도는 아니다”고 그는 말했다. 밀집주거지인 크루스 나 리가스로부터 미국 뉴멕시코주의 라스 크루세스에 있는 월마트 식품코너에 이르기까지 온통 식품가격에 관한 걱정 뿐이다. 지난 1월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농산물 가격의 상승세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보다는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위기, 국영 펀드(sovereign-wealth fund) 그리고 멈출 줄 모르는 유가 상승이 더 시급한 현안이었다. 그러나 불과 2~3개월 새 식품이 석유를 제치고 세계경기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협하는 대형 악재로 떠올랐다. 지난 1년 동안 밀과 옥수수 선물 가격은 각각 61%와 58% 상승했다. 쌀 선물 가격도 작년 8월 이후 배 이상 올랐다. 최근 5년 간 세계 경기가 동반 성장하며 수억명이 빈곤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교역망을 구축하며 개발도상국에도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안겨줬다. 풍부하고 저렴한 식량을 유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이제는 오래전부터 예고됐던 값비싼 식량 때문에 최근까지 이뤄온 많은 발전들이 거꾸로 위협 받게 됐다. 석유와 마찬가지로 투기꾼들이 곡물가격 상승을 부채질하는 측면도 있다. 또 석유와 마찬가지로 기초 식품가격의 상승은 빠른 속도로 기업의 사업계획을 좌절시키고 인플레를 유발하며 정치불안을 초래하고 많은 사람에게 경제적인 고통을 안기고 있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최근 121개 가난한 나라를 조사한 결과 모두 기아가 위기 수준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식량가격 상승은 “전체 대륙의 1억명 이상을 기아로 몰아넣을 수 있는 침묵의 쓰나미를 키우고 있다”고 런던에 있는 WFP의 조셋 시란 사무국장이 말했다. 그 쓰나미가 이제 침묵을 깨기 시작했다. 카메룬과 이집트에서 식량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극도의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야채 부스러기와 식용유, 흙을 버무려 만든 진흙빵으로 허기를 채우던 아이티에선 식량을 요구하는 폭동으로 르네 프레발 대통령 정부가 붕괴했다. 가격상승의 원인은 복잡하면서도 간단하다. 2007년 곡물 수확은 세계 역사상 최대였지만 이상 기상으로 곡물 생산 대국인 우크라이나가 흉작을 이뤘고 과거 엄청난 양을 자랑하던 호주의 쌀 생산량도 크게 줄었다. 유가상승도 영농비를 끌어올려(상당량의 비료가 석유로 만들어진다) 곡물 가격 상승을 불렀다. 그리고 투기꾼들이 원자재 시장에 몰려들면서 가격상승에 한몫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론 장기간에 걸친 꾸준한 수요 증가가 주요하게 가격상승을 부채질했다. 쉽게 말해 최근 들어 개도국 특히 인도와 중국 사람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더 잘 먹고 있다. 중국의 호황은 육류와 유제품 소비의 대폭적인 증가를 불러왔다. 소와 돼지를 사육할 때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은 단연 사료(곡물) 값이다. 정책도 영향을 미친다. 농작물의 국제 거래는 보조금과 관세가 낳은 비효율에 따라 왜곡된다. 유가가 크게 오르자 각국 정부는 바이오연료(미국의 옥수수, 브라질의 사탕수수로 만든 에탄올)의 생산을 장려해 왔다. 작년 미국 옥수수 작물의 5분의 1이 에탄올 생산에 쓰였다. 식 량가격 상승에 대한 정책적 대응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중국, 인도, 베트남, 태국은 사실상 쌀 수출을 금지했다. 국내 비축량을 늘리기 위한 이런 조치는 세계 식량가격을 더욱 끌어올렸다. 그 결과 가격이 상승하고(지난 1년 새 인도산 바스마티 쌀값은 t당 850달러에서 2000달러로 올랐다) 사재기가 횡행했다. 코스코와 샘스 클럽 같은 대형 마트들은 한 봉지에 10㎏이 담긴 수입 쌀의 판매 수량을 제한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휘발유 없이는 살아갈 수 있지만 식량 없이는 하루를 버티지 못한다. 식량가격 급등으로 인해 최근까지 우리가 빈곤퇴치에서 이룬 발전이 대폭 퇴보할 수도 있다. 하루 2달러로 살면서 소득의 대부분을 식품구입에 지출한다고 할 때 옥수수값이 50% 뛴다면 치명적이다. “2003년에는 세계 기아의 종식이 주요 주제였는데 당시엔 상당히 합당한 목표처럼 여겨졌다”고 미네소타대에서 식량 문제를 연구하는 경제학자 벤 세나우어는 말했다. 그러나 약 8000만 명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WFP가 식량원조 예산의 배정을 이미 마쳤지만 비용증가로 인해 5억 달러의 추가 예산을 긴급 충당해야 할 것이라고 지난 2월 시란 사무국장이 발표했다. 현재 부족분 추정액은 7억5000만 달러. 그중 절반 정도만 지원 약속을 받았다(세계 최대 식량원조국인 미국의 2억 달러 포함). 비만이 심각한 문제인 부유한 경제에서 식품가격 상승 영향을 논한다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듯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곡물가격 상승은 실제로 미국 경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미국 경제가 경기침체에 빠져들면서 의회예산국의 추정으론 올해 무려 2800만 명의 미국인이 식품 배급권을 필요로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올해 예산 할당은 작년 6월 물가에 근거하기 때문에 연방 원조가 그 수요에 못 미친다.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지난 1년 새 흰빵(16.3%), 우유(13.3%), 달걀(29.9%) 등 기초 식료품 가격이 급등했다. 워싱턴 DC 소재 ‘예산과 정책 우선순위 센터’의 식량지원 책임자 스테이시 딘은 “미국인들이 굶어 죽지는 않겠지만 건강에 필수적인 기본 영양소를 섭취하지 못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고 말했다. 미국 전역의 식품 배급소들이 식량과 유가 상승의 압박을 받고 있다. 식량지원 단체인 노스이스트 아이오와 푸드 뱅크의 바브 프래더 소장은 지난 1년 동안 자기 단체의 식료품비가 30~40% 증가했다고 추산했다. 최근 실시된 USA 투데이/갤럽 여론조사 결과 식료품비 증가로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는다는 미국인이 46%에 달했다. 식료 가격이 상승하자 각종 식품 소매가격도 큰폭으로 뛰기 시작했는데 그런 현상은 대형 마트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텍사스산 원유 배럴당 가격이 최근까지 상상도 못했던 100달러 선을 돌파할 바로 그 시점에 뉴욕시 베이글 빵 값은 최근까지 생각할 수도 없었던 1달러의 장벽을 훌쩍 뛰어넘었다. 에너지와 식품 같은 생필품 가격이 상승하자 의류와 전자제품 같은 선택구매 품목의 수요도 줄어들고 있다. 세계 지도자들도 그런 위협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세네갈 출신 자크 디우프 사무총장은 “마침내 모두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지난주 뉴스위크에 말했다. 영국 총리 관저를 찾아가 고든 브라운 총리를 만난 뒤였다. 브라운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오는 6월 디우프 사무총장이 로마에서 주최하는 식량안정 정상회담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금방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단기적으로 상황을 악화 또는 개선할 수 있는 요인들(기후 그리고 중국의 성장)이 정책결정자들로서도 권한 밖의 일들이다. 작물은 하루이틀 새 자라지 않으며 개도국 영농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제고하는 데 필요한 투자도 여러 해가 걸린다. 시장가격은 수급에 따라 오를 때가 있으면 내릴 때도 있다. 올해 밀이 풍작을 이루면 최근 상승세가 주춤해진 밀 가격이 하락하면서 쌀값도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될 때까지, 수급 상황이 변하게 될 때까지 정말로 굶주리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대책이 시급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것이다. FAO의 애널리스트 압돌레자 아바시안의 말마따나 “값싼 식량의 시대는 끝났다.”


With ASHLEY HARRIS and BARRETT SHERIDAN in New York, MIYOKO OHTAKE in San Francisco, KAREN ACGREGOR in Durban, South Africa, and CRISELDA YABES in Manila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코오롱 ‘인보사 사태’ 이웅열 명예회장 1심 무죄

2‘코인 과세유예·상속세 완화’ 물 건너가나…기재위 합의 불발

3최상목 “야당 일방적 감액예산…결국 국민 피해로”

4日유니클로 회장 솔직 발언에…中서 불매운동 조짐

5최태원은 ‘한국의 젠슨 황’…AI 물결 탄 SK하이닉스 “우연 아닌 선택”

6서울지하철 MZ노조도 내달 6일 파업 예고…“임금 인상·신규 채용해 달라”

7인천시 “태어나는 모든 아동에게 1억 준다”…출생아 증가율 1위 등극

8경기둔화 우려에 ‘금리 인하’ 효과 ‘반짝’…반도체 제재 우려↑

9얼어붙은 부동산 시장…기준금리 인하에도 한동안 ‘겨울바람’ 전망

실시간 뉴스

1코오롱 ‘인보사 사태’ 이웅열 명예회장 1심 무죄

2‘코인 과세유예·상속세 완화’ 물 건너가나…기재위 합의 불발

3최상목 “야당 일방적 감액예산…결국 국민 피해로”

4日유니클로 회장 솔직 발언에…中서 불매운동 조짐

5최태원은 ‘한국의 젠슨 황’…AI 물결 탄 SK하이닉스 “우연 아닌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