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품·공산품 무역장벽 허물어야 할 때”
“농산품·공산품 무역장벽 허물어야 할 때”
▶인도의 트럭 운송업자들이 기름값 인상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인다. |
극빈층·최빈국 지원 서둘러야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IMF 총재 원자재 인플레이션의 악순환을 막으려면 부국과 빈국이 협력해야 일부 원자재 가격의 상승에 신경 써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유가 급등을 원양어업자나 장거리 트럭 운송업자에게 물어 보라. 혹은 자녀들에게 하루 한 끼밖에 못 먹이는 아프리카의 어머니들에게 식품 가격 급등에 대해 물어 보라. 최근의 석유·식품 가격 상승은 많은 사람에게, 특히 빈민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우리는 인플레이션(일반적인 가격·임금의 상승)에 관해 읽을 때 그것을 마치 추상적인 문제로, 그래서 별로 심각하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일부 사람은 가격과 임금의 인상이 식품·연료 값 상승의 고통을 재분배함으로써 빈곤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인플레와 싸우기보다는 경제 성장을 지속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일자리를 안전하게 지키고 개도국 국민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길은 바로 성장이다. 사실 최악의 상황은 요즘의 연료·식품 가격 상승이 전반적인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사태다. 이는 트럭 운송업자나 아프리카의 어머니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석유와 식품 가격은 다른 재화보다 더 많이 올랐다. 두 품목의 수요는 느는 데 공급이 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식품 생산의 증가, 새로운 에너지원 개발, 연료 효율성 향상 등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은 그런 노력을 방해한다. 즉 식품과 에너지 가격 상승은 생산업자들에게 생산을 늘리라는 명확한 신호다. 하지만 이 신호는 전반적인 물가 상승 때문에 소멸돼 버린다. 전반적 인플레이션은 경제성장도 억제한다. 성장의 토대는 저축자와 투자자 사이의 신뢰다. 저축자들은 자신의 돈이 인플레 때문에 사실상 줄어들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투자와 성장은 위축된다. 인플레이션은 빈민들에게 타격을 입힌다. 돈의 가치가 떨어질 때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건 임금 생활자들이다. 백만장자들은 인플레에도 끄떡없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1970년대에 목격했다. 당시 선진국들은 유가 상승이 전반적 인플레로 확산되도록 방치했다. 1980년대 초엔 그 속편이 나타났다. 당시 인플레는 다년간의 고금리와 경기침체가 있은 뒤에야 가라앉았다. 우리는 이런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식품·연료 가격 상승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의 고통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우리가 취할 만한 조치들이 있다. 효율적인 소득 지원책은 극빈층의 물가 상승 부담을 어느 정도 덜어준다. 국제통화기금(IMF) 같은 국제기구들과 기부금 제공자들의 지원은 최빈국의 부담을 덜어줄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물가는 세계를 먹여 살리고 글로벌 경제에 동력을 제공할 새로운 공급원의 개발을 자극할 것이다.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들의 과제는 인플레를 자극하는 정책을 채택하지 말고 사람들이 현재의 혼란을 극복하도록 돕는 일이다. 인플레는 글로벌 경제의 성장과 안정을 훼손한다.
▶연료비 상승으로 자가용 통근을 포기하는 사람도 생겼다. |
자유무역 확대하면 물가도 떨어진다
파스칼 라미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최근 도하 라운드 결렬로 자유무역 통한 인플레 퇴치 기회가 사라졌다 세계적 인플레와 싸우는 일은 일차적으로 각국 중앙은행 총재와 재무장관의 책임이다. 그들이 물가 상승 억제를 위한 통화·재정 정책상의 수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역 역시 도움이 될 수 있다. 무역은 가격 변화를 국경 너머로 전달할 수 있다. 무역 개방은 한 나라의 물가 상승 추세를 다른 나라들로 확산시킨다. 그런가 하면 생산자들 사이의 경쟁을 부추겨 가격 수준을 낮추기도 한다. 관세 인하는 물가를 끌어내릴 잠재력이 있다. 최근의 식량 위기 속에서 20여 개국이 일방적으로 수입 관세를 낮춘 것은 그 때문이다. 높은 관세율과 농업 보조금처럼 교역을 왜곡하는 정책도 물가 안정에 영향을 미친다. 보조금은 단기적으론 물가를 끌어내린다. 그러나 장기적으론 (특히 개발도상국) 시장에서 생산업자들을 몰아내고, 농업 부문에 필요한 투자와 혁신을 방해한다. 교역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 부문에선 인플레가 기승을 부릴 수 있다. 쌀을 예로 들어 보자. 쌀 값은 지난 1년간 70%나 올랐다.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심각하게 깨졌기 때문이 아니다. 쌀은 교역이 드문 원자재에 속한다. 지난 몇 년간 쌀 생산량 중 국제적으로 거래된 것은 약 7%뿐이다. 이처럼 교역이 뜸한 시장에선 수급 변화보다는 투기와 사재기 같은 요인들이 과도한 변동성을 일으킬 수 있다. 지난달 정책결정자들은 더 공정하고 현대적인 세계 무역 시스템을 구축해 인플레 퇴치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네바에서 열린 도하 라운드에 참석한 각국 통상장관들은 농산품과 공산품 무역의 장벽을 크게 낮출 수 있는 개혁안에 합의하지 못했다. 인플레가 인류의 미래 번영을 위협하는 시기에 그들은 그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고도성장 환상에 사로잡힌 개도국
스티븐 로치 모건스탠리 아시아 회장 신흥시장 정책결정자들은 더 늦기 전에 과거의 실수에서 교훈 얻어야한다 언젠가는 끝날 현상이었다. 지난 25년간의 세계적 디스인플레이션(인플레이션의 점진적 완화)은 이제 끝났다. 오늘날 오일쇼크는 공업과 농업 부문 원자재 가격의 급등과 맞물려 1970년대에 대(大)인플레이션을 촉발했던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 주요 선진국의 경제 성장은 분명히 지체되고 있다. 미국은 6개월째 경기침체 직전에 있고, 일본과 유럽의 성장 전망은 악화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스태그플레이션 위험과 1970년대에 선진국들에서 시작된 스태그플레이션 사이엔 결정적 차이가 있다. 당시엔 정책 실패와 임금-물가 상승의 악순환으로 대다수 사람이 인플레가 심해질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선진국에서 임금을 인플레이션에 연동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임금은 구조적 힘(세계적 경쟁)과 경기순환적 힘(경기침체)으로 억제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개도국 경제에선 새로운 스태그플레이션 위험이 고조되고 있다. 요즘 개도국들의 잘못된 정책을 보면 약 35년 전 선진국들의 실책이 생각난다. 첫째, 개도국 금융당국자들은 ‘근원 인플레이션(유류·농산물 등 가격변동이 심한 품목을 빼고 계산한 소비자물가지수)’에 집착하는 위험한 태도를 보인다. 그들은 식품과 에너지 가격이 외생적 요인으로 좌지우지되고, 평균회귀적(mean-reverting: 장기적 추세로 돌아가는 경향)이며, 따라서 통화정책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착각한다. 1970년대의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근원 인플레만을 억제 목표로 삼는 실수를 저질러 파국적인 결과를 불렀다. 그런데 이런 실수가 다시 나타날 조짐이 있다. 왜냐하면 농산물과 에너지 가격 급등은 고도성장으로 원자재·식품 수요가 급증하는 개도국들의 내생적 요인 때문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둘째, 아시아 개도국들(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수출주도형 국가들)의 정책금리는 현재 소비자물가상승률(headline inflation)보다 1%포인트 낮은 수준에 고정돼 있다. 그러나 이처럼 낮은 실질 단기 금리는 인플레를 부추길 뿐이란 사실을 역사가 보여준다. 오늘날 개도국들은 1970년대 선진국들과 똑 같은 희망을 품고 있다. 즉 식품·에너지 가격의 평균회귀가 인플레를 ‘근원’ 수준으로 되돌리고, 실질 단기 금리가 소비자물가상승률보다 높아질 것이란 희망이다. 그러나 식품·에너지 가격은 벌써 6년째 평균치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셋째, 개도국들은 빈곤을 줄이고 1인당 국민소득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고도성장에 집착한다. 어떤 점에선 이해할 만한 편견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아시아의 빈민 수는 1990~2004년에 3억 명 이상 감소했다. 위정자들은 이런 인상적인 발전에 고무된 나머지 고도성장의 부작용, 예컨대 인플레이션, 공해, 환경 파괴, 소득 불균형 심화, 주기적인 자산 거품 등을 외면한다. 고도성장에 대한 집착은 이제 가장 위험한 대형 암초마저도 안 보이게 만들 정도로 거대한 밀물이 됐다. 이런 태도는 주요 개도국들의 반(反)인플레 정책 채택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플레는 특히 저소득층엔 가장 무자비한 세금이다. 개도국에선 이런 위험이 커지고 있고, 수입 의존도가 높은 선진국들에서도 점점 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식량·에너지의 생산-분배 채널 개선해야
모하메드 엘-에리안 PIMCO 공동 CEO 또 다른 ‘성장엔진’이 식으면서 세계경제가 더 위험한 국면으로 접어든다 미국발 금융 위기로 휘청거리는 세계 경제가 인플레 압력으로 훨씬 더 위험한 국면에 진입했다. 인플레는 요즘처럼 식품·연료 같은 필수품의 가격 상승으로 야기될 때 특히 고통스럽다. 각국 정부와 기업은 어떻게든 이런 상황의 대응책을 내놓아야 한다. 애당초 상황을 악화시켰던 비효과적인 정책 수단을 다시 동원할지라도 말이다. 요즘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최근의 물가 상승이 상당 부분 잘못된 정책 대응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이는 수요와 공급 측면 모두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식품과 석유 가격 상승에 대한 많은 시장 참여자의 임시변통식 대응은 세계적 수급 불균형을 악화시켰다. 예컨대 일부 식품 생산국은 가격 상승 대응책으로 생산을 늘리기보다는 수출을 규제했다. 국내 소비에 대한 공급량을 확보하려는 시도였다. 이미 가격이 오르던 취약한 세계 시장에 대한 공급은 그 때문에 줄었다. 에너지 시장에선 항공사를 포함한 일부 기업이 공급량을 확보하려고 선물계약을 서둘러 사들였다(선물계약이 낮은 가격일 때도 비싸다며 매수하지 않았던 기업들이 이제는 그때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도 황급히 사들이는 건 아이로니컬하다). 이 역시 가격 상승을 부추겼다. 이처럼 왜곡된 수급 구조는 부작용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가격 급등을 통해 이익을 보려는 다른 생산자들이 식품과 에너지 시장에 공급 물량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또 이 부문의 수요는 고물가에 지갑을 닫는 소비자가 늘면서 감소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역전(逆轉) 현상이 충분히 빠르게 진행되진 않고 있다. 특히 빈민층처럼 인플레 피해를 가장 많이 본 계층을 보호하기엔 아직 미흡하다. 이는 위정자들에겐 무슨 조치든 빨리 취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작용한다. 비록 전시효과만을 노린 정책이 나올지라도 말이다. 미래의 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심리를 누그러뜨리려면 신속한 정책 대응이 필요하다. 사회복지 차원에서 위험한 인플레가 장기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그렇다. 그래서 정책결정자들은 통화정책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신흥시장의 중앙은행들은 금리를 인상하고 신용 확대를 규제했다. 경제성장의 일부를 희생하면서까지 인플레 퇴치에 전념했다. 선진국의 중앙은행들은 인플레 억제책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시중 금리 상승을 유도했다. 정상적인 경우엔 통화정책의 중시가 불가피하고 정당화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글로벌 경제 상황은 정상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미국처럼 손상된 금융 시스템을 치료하기 위한 노력이 절박한 상황에서 그런 정책은 너무 투박하다. 물론 ‘경제의 변속장치’가 대체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정부 당국이 선의의 정책 목표를 추구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식의 노력은 다른 부문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향후 몇 주 혹은 몇 달 뒤 어떤 상황이 나타날까? 아마도 세계 경제에 더 많은 부수적 피해를 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피해는 별개의, 하지만 상호 보강적인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첫째, 긴축 통화정책 특히 모기지(주택담보대출) 금리 인상은 미국 주택시장을 더 침체시킬 것이다. 주택 시장은 이미 과대평가, 재고 과잉, 압류 주택 증가 등으로 무너지고 있다. 또 최근 의회에서 통과된 거대 모기지 업체들(프레디맥, 패니메이 등)에 대한 긴급 지원책은 단기 응급처방에 불과할 것이다. 특히 이번 조치는 미국 소비자들이 직면한 역풍을 상쇄하기엔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날 듯하다. 미국 소비자들은 오랫동안 글로벌 경제의 ‘주요’ 성장엔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실업률, 생활수준 하락, 까다로워진 신용대출 조건 등으로 허덕인다. 둘째, 신흥시장 역시 국내 위주의 경제정책 재편성으로 성장이 둔화할 것이다. 세계 경제 차원에서 볼 때 이는 ‘다른’ 성장엔진들의 속도도 느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지난 1년간 이들 다른 신흥시장은 세계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늘리면서 미국 경제 둔화로 인한 공백을 상당 부분 메워 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위정자들은 식품·에너지 가격 상승에 어떻게든 대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긴축 통화정책에 과도한 비중을 둔다. 식량과 에너지의 생산과 분배 채널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세계적으로 수요를 지나치게 줄어들게 하면서 성장동력을 급격히 약화시킬 것이다. 이에 따라 신용경색 사태도 더 심각해질 듯하다. 세계 경제가 훨씬 더 험한 지형으로 들어서고 있다. 우리는 안전벨트를 더 조여야 할 것이다. [PIMCO는 세계적 채권운용회사다.]
첨단기술도 인플레 진정 효과 있다
크리스 앤더슨 ‘와이어드 매거진’ 편집장 기술의 가격 인하 효과가 경제 위기를 잠재울 수 있다 기술은 강력한 디플레이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무어의 법칙’이란 게 있다. 기술 발전 덕분에 컴퓨터 성능이 18개월마다 두 배로 향상된다는(혹은 같은 성능의 컴퓨터를 절반 가격에 살 수 있다는) 법칙이다. 웬만한 디지털 소프트웨어를 공짜로 이용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기술은 오늘날 인플레 압력을 가중시키는 핵심 요인인 에너지와 식품의 공급 부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원자력 발전소는 전기 사용료를 크게 낮춰줄 것이란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요즘 전기료는 사상 유례없이 비싸다. 녹색혁명은 농작물 수확량을 크게 늘려 굶주림을 과거지사로 만들 것이란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요즘 쌀 부족을 겪고 있고, 옥수수 가격은 지난 1년 새 약 3배로 뛰었다. 또 세상은 휴대전화, 화상회의, e-메일 등으로 더 가까워진 듯하지만, 자동차와 비행기 사용은 더욱 늘어나 전 세계의 석유 생산 능력을 압도하고 에너지 가격을 사상 최고치로 끌어올렸다. 어찌 된 걸까? 기술이 물가 상승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줄 것이란 생각은 착각이었나? 그렇다. 하지만 기술의 잘못이 아니다. 기술 활용을 가로막는 인간이 문제다. 농산물 생산이 인구 증가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주된 이유는 유럽연합(EU)이 유전자 변형 작물의 재배와 수입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기술의 활용을 막는 이런 규제는 아프리카 등 무역 상대방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식품 가격이 높아진 또 다른 이유는 비료 값도 사상 최고 수준으로 올랐다는 점이다. 또 비료 값이 오른 이유는 비료 생산에 필요한 천연가스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땅속에서 천연가스를 추출할 기술이 없는 게 아니다. 그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곳에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 액화천연가스(LNG) 시설을 건설하려는 사업 신청서 53건 중 50개가 부결됐다. 그 시설이 들어설 지역의 인근 주민들이 반대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알래스카에서도 환경오염 우려 때문에 천연가스 운송관을 건설하지 못했다. 천연가스 운송 인프라의 부족은 높은 전기료 때문이기도 하다. 스리 마일 섬 사고 이후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수십 년째 사실상 동결된 원인 중 하나도 비싼 전기료다. 외국산 에탄올에 높은 수입 관세를 부과하는 정책(미국의 옥수수 농민을 보호하려는 정책)은 휘발유 가격을 올려놓았다. 또 자동차 연비 기준을 강화한 캘리포니아주의 선례를 따르지 않는 주들이 많다 보니 휘발유 수요는 공급을 앞지른다. 이 모든 상황을 감안할 때, 필자는 인플레이션이 결국엔 인플레와 싸울 기술의 도입을 촉진할 것으로 믿는다. ‘아톰 경제’(atoms economy: 매년 물가가 비싸진다)에서 가격이 계속 오를수록, 재화와 용역을 ‘디지털 경제’(bits economy: 물가가 저렴해진다)로 옮겨가려는 동기는 더 강해진다. 지금의 항공료가 비싸다고 생각하는가? 탄소세가 도입되면 더 오를 것이다. 항공료가 얼마나 더 올라야, 사람들이 우수한 화상회의 시설에 투자하고 항공 여행을 아예 기피하게 될까? 석유 값이 얼마나 더 비싸져야 사람들이 디지털 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자택에서 더 많은 시간을 근무하거나 온라인으로 쇼핑 하게 될까? 에너지 가격을 내리는 최선책은 수요를 줄이는 것이다. 모든 물건이 더 비싸지는 듯한 세상에서 디지털 기술의 가격은 계속 떨어진다. 아톰 경제와 디지털 경제의 차이가 더 커진다는 얘기다. 10년 전엔 돈을 벌려는 욕구가 디지털화의 동기였다. 지금은 돈을 절약하려는 욕구가 훨씬 더 강한 동기일지도 모른다.
깨끗한 연료 개발 위해 규제장벽 허물자
로버트 호매츠 골드먼삭스 부회장, 제프리 큐리 골드먼삭스 원자재 조사 책임자 장기화된 투자 부진이 석유와 식품 가격 상승을 불렀다 요즘 세계적으로 분출되는 인플레 압력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그중에서도 가장 명백하고 강력한 원인이 석유와 식품 가격 폭등이다. 대부분의 언론이 물가폭등의 주요 원인으로 신흥 경제권의 수요 급증을 지목하지만 더 본질적이고, 장기적인 원인은 에너지 공급 능력 개발이 지지부진했다는 사실이다. 많은 나라가 에너지 공급 능력을 확대하는 데 충분한 투자를 하지 못했다. 숱한 사례가 말해 주듯 정부의 규제장벽은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야로의 자본과 기업의 진출을 가로막았다. 이런 와중에 점점 더 많은 농지가 곡물보다는 연료를 만드는 데 사용되면서 농산품 가격이 치솟았고, 정부 보조금도 에너지의 비효율적인 소비를 부추겼다.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는 석유 위기가 석유 사용의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고, 새로운 생산시설에도 많은 투자를 이끌어냈다. 80년대 초 일련의 석유 위기가 잇따르면서 에너지 절약 방법도 덩달아 발달했다. 하지만 석유 가격이 하락하자 미국인들은 석유의 대외 의존도가 높아지는 데도 휘발유를 마구 소비하면서 대체에너지 개발에는 등을 돌렸다. 정부의 주요 에너지 정책도 시들해졌다. 그 후 수년간 막대한 규모의 민간자본이 혁신적인 정보기술(IT)에 투자된 반면, 대체에너지 개발이나 연료 효율성 개선 기술에 투자되는 금액은 점점 줄었다. 미국 연방정부마저 석유의 공급과 수요 측면에서 기술적인 돌파구를 떠받칠 만한 대담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날로 치솟는 에너지 대외 의존도를 낮추고, 온실가스 배출을 줄여야 하는 시급한 필요성에 맞춰 대체에너지 개발을 지원하는 기금 모금이나 제도 개선, 세제 혜택도 없었다. 물론 에너지 문제는 전 지구적 현상이다. 미국 혼자만의 노력으로 에너지 가격 상승과 탄소 배출 증가를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좀 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면 미국 내 수요 증가가 억제됐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지금 같은 물가 상승 압력도 일정 부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연구 개발에 더 힘썼다면 대체 연료와 에너지 수요를 줄이는 기술 개발 비용도 끌어내렸을 것이다. 이제 모든 미국인은 아주 비싼 기름값을 지불하는 형태로 과중한 ‘태만 세금’과 ‘자기만족 세금’을 물고 있다. ‘태만 세금’은 미국인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이 높은 데다 달러 가치는 낮아 특히 무겁다. 미국인들은 이 ‘태만 세금’을 계속 지불하든가 아니면 대담한 절약과 생산 방안 연구를 지원할 수 있다. 미국 관리들은 특히 원자력 발전소, 풍차, 태양광 집열기와 전송선 같은 시설에 대한 장벽을 포함해 신속한 에너지 공급을 가로막는 정책과 규정은 없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야 한다. 다른 나라 정부들도 연료와 식품 생산을 늘릴 자본과 기술을 이끌어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가난한 나라의 소농에게 종자, 비료, 관개에 쓰일 자금을 빌려주거나, 중소기업에도 에너지 생산을 할 수 있도록 돈을 융통해 주는 것과 같은 일도 여기에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자본과 전문 기술이 청정 연료와 무공해 식품 생산에 획기적 성과를 올리는 곳으로 유입되도록 장벽을 허무는 지구촌의 집단적 노력이 요구된다. 개별 국가건, 국가 사이에서건, 세계은행, 유엔의 식량농업기구, 국제원자력기구 같은 기관에서건 연료와 식품 공급 증가를 막아 끝내 물가 상승을 자초하는 규제와 시장 왜곡을 없애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농상물 수출국의 수가 줄어들면서 곡물 가격이 크게 뛰었다. |
선진국과 신흥국가끼리 정책공조 절실
제프리 가튼 예일경영대학원 교수 중앙은행은 성장보다는 인플레 대처에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결단을 내려야 하는 정부 관료들에게 가장 곤혹스러운 순간은 가용한 정책들이 기업이나 소비자의 환영을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고통스러운 반발을 불러올 때다. 재무 각료들과 중앙은행 관계자들이 놓인 상황이 꼭 그렇다. 고민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인플레를 잡는 데 우선 순위를 둬야 할지, 디플레이션을 방지하는 데 주안점을 둘지의 문제다. 첫째 문제에 대해 미국 연방정부는 달러화 약세와 수입품 가격 상승으로 가중된 식품 및 연료 가격의 급등을 우려해 금리를 재차 낮추는 일은 없다는 말로 대신했다. 유럽중앙은행은 인플레율을 최근 10년 사이 최고치인 4%로 추산했다. 규모가 큰 신흥 시장 20개국의 올해 인플레 가중 평균은 지난해보다 66%나 높은 6.9%다. 반면 글로벌 금융 시스템은 전에 없이 취약하고 세계 교역 신장세도 주춤한다. 미국과 유럽 일부에서는 주택가격이 지속적으로 떨어졌고, 소비지출도 줄어들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실업자 수도 내년엔 올해보다 300만 명 증가할 것으로 예측됐다. 이는 지난해보다 9% 증가한 규모다. 국제결제은행은 세계 경제가 심각한 경기 침체의 어귀에 들어섰다고 본다. 나 같으면 먼저 단호하게 인플레를 진정시키겠다. 고삐 풀린 물가는 빈민들과 취약계층에 가장 치명적인 충격을 안기고, 물가가 오를수록 극약처방의 통증도 지금 당장 처방보다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인플레 기대심리가 생산품 가격을 매기는 회사들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에게 스스로 실현되는 예언이 되기 전에 인플레를 막는 게 매우 중요하다. 인플레 문제는 세계 각국의 공통 현안이다. 따라서 선진7개국(G7)과 중국, 인도, 브라질 같은 핵심 신흥시장 국가들이 협력해 정책의 총체적 효과가 목표에 크게 못 미치거나 과하게 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각국이 이런 식으로 협력하기란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일이기도 하다.
신흥시장들 금리 획기적으로 올려야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스턴 경영대학원 교수, 미카 피네다 RGEMonitor.com 애널리스트 세계 경제가 1970년대를 뛰어넘는 질곡에 빠져들지도 모른다 세계 경제가 1970년대의 ‘대인플레이션’ 시대로 역주행하는 건 아닐까? 이번에는 몇몇 경제선진국의 신용경색 및 자산가치 하락과 맞물리면서 어쩌면 훨씬 더 심각할 수도 있다. 고유가와 원자재 가격의 상승, 주택시장 거품 붕괴, 줄어드는 재산, 더 엄격해진 신용대출만으로도 이미 선진국 수요는 위축되기 시작했다. 한편 과거 몇 년간 활황을 구가하던 개도국들은 지금 유가와 원자재 가격 상승, 이상 기후, 무역 장벽, 더 엄격해진 환경 관련 규제에서 비롯된 공급 감소라는 충격에 직면해 있다. 이 모든 것이 물가 상승을 부추겨왔다. 지속적 성장과 낮은 물가로 대변되던 ‘1980년대의 대(大)완화’ 시대엔 양질의 재고 관리, 물가 안정 목표제, 세계화, 금융 혁신이 동력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동력도 물가를 안정적으로 낮추는 능력을 상실해 간다. 생산과 운송 비용의 증가로 수입품 가격이 오르고, 여분을 두지 않는 치밀한 재고관리로 원자재 가격이 크게 오르고 유동성이 심해진다. 정책 입안자들도 성장 저해 요인을 제거하자면 금리를 낮춰야겠고, 치솟는 물가를 고려하면 금리를 높여야 하기에 옴짝달싹 못하는 지경이다. 1970년대 초의 경우처럼 미국의 느슨한 재정 정책은 많은 신흥시장 국가가 채택한 달러 고정환율제나 적극적인 관리환율제와 맞물려 이들 국가에 성장과 유동성 과잉을 초래했다. 나아가서는 원자재 가격 급등과 인플레의 자양분이 됐다. 자국 통화가치를 달러에 연동시킨 신흥시장 국가들은 통화가치를 높여 인플레를 잡는 능력을 심하게 훼손 당했다. 미국은 아직 닉슨 식의 가격과 임금 통제 정책에 의존하진 않는다. 하지만 개도국의 가격 통제와 보조금 지급으로 적어도 세계 인구 절반이 국제가격보다 싼값에 연료와 식량을 구입한다. 이는 시장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수요가 줄면서 물가도 떨어지게 하는 기반을 망쳤다. 지금은 일부 공급자가 소비자들에게 가격 상승 분을 전가하기 시작했다. 최근 일련의 철강 업체가 석탄, 철광석 등 원자재 가격이 두 배로 올라 철강 제품 가격을 올린다고 발표했다. 1970년대와 달리 임금과 물가 상승의 악순환이 몇몇 신흥시장과 유럽의 일부를 제외하면 아직 광범위하게 일어나지는 않았다. 많은 경제전문가는 임금 인상이란 핵심 요소가 빠진 고물가는 일시적 현상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임금은 양날의 칼과도 같다. 재화와 용역 가격은 오르는데 임금이 묶이면 소비자의 구매력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 결과 소비자들이 같은 월급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이 앞으로 더 적어진다고 믿기 시작하면 인플레 기대심리가 증폭된다. 이 효과가 유럽 일부와 개도국에서 나타나는 중이다. 대체적으로 인플레는 아직 1970년대보다는 낮은 수준이며, 근원 인플레이션 추세도 아직은 완만하다. 비단 70년대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몇몇 요인으로 볼 때 세계 수요가 줄어도 인플레는 지속될 전망이다. 세계 인구 대부분은 이미 두 자릿수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고통 받는다. 선진국 소비자물가는 한 자릿수 상승에 머물지만 80년대와 90년대 오래도록 물가 상승이 잠잠했던 때에 견주면 높은 편이다. 선진국들이 금리를 개별적으로 올려도 신흥시장의 강력한 수요 때문에 세계 시장의 원자재 가격 상승은 막을 길이 없다. 신흥시장들이 금리를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인플레 기대심리가 급속하게 번져 임금과 물가 상승의 악순환을 촉발하기 전에 그래야 한다. 하지만 곡물 등의 원자재 가격 충격파가 사회적 소요를 일으킨 국가조차 자국 통화가 인플레를 충분히 억제하게끔 금융정책을 조일 의향은 없어 보인다. 자칫 긴축정책을 썼다가 내수 성장이 정체되는 날엔 가뜩이나 G7국가 경기 침체로 성장이 주춤해진 상황을 더 꼬이게 한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면 그 결과는 세계적 인플레 상승으로 이어지는 정책 실패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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