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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 전면에 내세우며 근대적 개혁 주도

천황 전면에 내세우며 근대적 개혁 주도

일본 근대사를 우리가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하기는 아직도 어렵다. 두 나라의 관계가 오늘까지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역사적 경험은 엄밀하게는 그 나라만의 독특한 것이어서 거기에 우리와의 관계만을 매개시켜 평가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나라 역사의 실체를 파악해 우리를 살펴보는 데 참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 12월 9일 광주과학기술원 김용덕 석좌교수가 나섰다. 다음은 강의내용 요약.
▎김용덕 석좌교수

▎김용덕 석좌교수

일본을 포함한 비서양국가에서 근대사 시작은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 편입되는 것으로부터 잡아야 한다.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 들어가는 것은 개항에서 비롯된다.

쇄국이 개항함으로써 무너지게 되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막부체제를 지켜오던 가장 중요한 기반인 쇄국이 무너지기 때문에 일본에서의 근대사도 개항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보아야 한다.

1854년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으면서 일본은 개항한다. 그러나 일본의 개항은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미국의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1840년의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영국에 패했다는 사실은 일본 개항의 또 다른 촉매제였다.

아편전쟁에서 중국 배가 무너지는 것을 직접 목격한 일본 상인들이 개항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미국이 일본을 개항시키러 왔고, 일본은 그들과 ‘불평등조약’을 맺는다.

그리고 일본은 1868년 1월 새로운 정치적 변화를 겪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지도자인 쇼군이 쫓겨나고, 대권이 천황에게 돌아온 것이다. 바야흐로 명치(明治)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 내에서는 근대적인 개혁, 즉 주도적인 지도층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이 수행된다. 이 개혁의 주역은 원로(元老)였다.

지역적으로나 세대적으로 비슷한 명치정부의 원로들은 천황의 대권을 보필하는 존재로서 천황이 임명할 총리를 추천하고, 외국과의 개화·강화·동맹체결 등 최고의 의사결정을 주도했다.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같은 사람들이 바로 헌법에도 없는 원로그룹의 멤버다.

1868년 권력을 잡은 이들의 목표는 사실 그들이 무너뜨린 구정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본이 독립을 지키고 완전한 자주권을 행사해 근대국가가 돼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 즉 서양의 기술을 빌리고 서양식으로 제도를 고쳐 일본을 서양국가처럼 부강하게 하려는 각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책이 필요했다. 이들은 위기를 극복하고 근대화된 일본을 위해 천황과 외압을 적절히 이용했다.



원로의 방책은 천황과 위기설의 적절한 배합일본인에게 천황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고조된 것은 일본이 서양의 압력을 받을 때부터다. 서양강국의 힘을 인식하게 되면서 일본 내에는 하나의 민족 내지 국가라는 의식이 강하게 나타났고, 이때 국가통합에 필요한 존재로 천황이 부각됐다. 특히 존왕론에 뿌리를 둔 원로들은 명치정권을 세우면서 천황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켰다.

명치정권의 원로들은 막부 지배를 부정하고 새로운 지도층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천황이 통치의 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렇다고 그들이 천황의 신격을 믿는다든가, 천황이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리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막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긴박한 과정에서 천황을 ‘옥(玉)’이라는 은어를 사용해 “옥을 누가 쥐었는가”하고 서로 연락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다만 서양선진국으로부터의 위협에서 벗어나 국가의 자주독립을 지키기 위해선 부국강병을 성취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국민통합이 필요하고 국민통합에는 천황을 구심점으로 한 위로부터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명치헌법은 이러한 구상 아래 일본의 주권을 만세일계의 천황에게 귀속시켜 놓았다. 백성에게는 교육을 통해 천황은 일본 국민의 보호자로서 전쟁을 이끌어가고 또 그러한 천황 아래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세뇌시켰다. 또한 천황이 이재민이나 전쟁에서 사상자 구휼에 관심을 보임으로써 자애로운 보호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결국 권위와 자비를 갖춘 천황은 국민통합을 이루어가는 일본인에게 충성의 대상, 의지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새롭게 건설하기 위한 방책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데는 그들이 국내외적인 상황에 대해 냉정하면서도 객관적인 시각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은 1840년 중반에 일어났던 아편전쟁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산업혁명이 일으킨 서양의 문화·기술·경제의 힘이 일본을 능가한다는 것을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 즉, 국내적 상황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외국은 얼마나 강한가를 깨닫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서양의 식민지가 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막부의 쇼군을 쫓아내고 새로운 지도층으로 등장한 이들은 서양의 침략에 맞설 방책을 얻기 위해 1871년 세계일주를 떠난다. 이것이 1873년까지 2년 동안 이어진 이와쿠라(岩倉)사절단이다.

원래 이와쿠라 도모미가 단장이 된 사절단의 1차적 목표는 불평등 조약의 개정이었다. 사절단의 일원인 이토 히로부미가 중간에 돌아오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당시 그들은 국제법에 대한 지식이 없었을뿐더러 국내 사정도 여의치 않아 조약개정은 실패로 끝난다.

대신 이들은 그 후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에 들러 이들 나라의 장단점을 관찰하고 2년 후 귀국해 일본의 국책을 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 명치정권을 이끈 핵심들, 이토 히로부미·오쿠보 도시미치·기도 다카요시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세계일주에서 자신들의 국가 건설 모델로 독일을 주목하게 된다. 당시 독일이 유럽의 여러 나라 가운데 산업혁명을 뒤늦게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통일을 이루고, 산업혁명까지도 성공해 유럽열강의 대열에 합류했던 것에서 여러 가지 배울 것이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돌아오는 길에 이미 식민지가 되어가던 이집트와 인도, 중국을 둘러봄으로써 자본주의 열강의 논리를 깨닫고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명치정권 초 원로들이 당면한 국내적 상황은 국외적 상황 못지않게 취약했다. 효과적인 근대화를 하기 위해선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지만, 그들이 당면한 현실은 막부시대 이래의 부채와 정권수립 초기 불가피하게 차용한 부채, 그리고 낙후된 기술과 경제구조였다.

더군다나 이렇게 취약한 경제상황에서 서양자본주의 시장의 압력이 더해졌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그들은 산업발전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이른바 ‘식산흥업’ 정책을 내세웠다.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기술과 기반이 부족했던 명치정부는 전신·철도부설·광산개발을 위해 외채를 끌어들였고, 서양에서 기술과 함께 기술자도 들여왔다.

이런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선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는데, 명치 지도자들은 ‘질록처분(秩祿處分)’과 ‘지조개정(地租改正)’을 단행해 조달했다. 명치 초기의 정부는 가능한 한 혼란을 막기 위해 당시 사회 주도층이었던 사무라이들을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 예산의 3분의 1가량이 사무라이들의 생활을 지탱하기 위한 봉록으로 지출되는 현실은 시정해야만 했다.



근대화를 향한 넓은 안목과 철저한 준비시정조치에 대한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막으면서도 재정 부담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명치정부는 1876년 ‘금록공채’를 발행했다. 사무라이의 봉록을 장기간에 걸쳐 해소하기 위한 보증으로 공채를 발행한 것이다. 지조개정은 막부시대의 현물공납의 폐습을 시정해 근대적인 금납조세로 개혁하려는 정책이었다.

이에 토지사유화를 추진하고 각 번의 독자적인 공납기준을 균등하게 해 토지세를 정확하게 그리고 공평하게 거둘 수 있도록 했다. 이 같은 토지개혁 과정은 열악한 조건의 소농민들을 적응하지 못하고 낙오하게 했지만, 토지를 사유화하는 데 적응한 농민들에게는 이를 담보로 새로운 지방산업에 투자하도록 해 산업발전의 재원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게 했다.

원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근대사는 분명 한계도 있었다. 외압에 의한 개항으로 시작된 근대화 과정은 일본인들에게 분명한 과제를 제시했다. 당시 일본 지도자들에게는 서양선진국들과의 불평등한 관계를 극복하는 것이 1차적 관심이요 과제였다. 그러나 이는 일본근대사의 한계로서 보편주의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범위를 극도로 제한했다.

일본 나름의 특수한 목표가 설정되어 이를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세력이 사회적 지배력을 압도적으로 행사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생기는 모순이 해외침략과 국내에서의 불균형발전 및 탄압으로 이어졌다. 특히 명치원로들이 죽고 나자 사회의 각종 요소의 통합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명치원로들은 어느 면에서는 일본의 독립과정을 이끌어간 사람들이었다. 일본 개항 때의 혼란했던 상황에서 정치적 야망을 키워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정권을 잡은 후에는 해외침략을 해가면서 일본을 어느 정도 틀 위에 올려놓은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일본의 힘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 단적인 예가 러일전쟁의 선전포고를 결정하는 어전회의 뒤, 러시아와의 협상을 요청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가 자신의 심복을 보낸 사실이다.

그만큼 그 전쟁이 일본에 얼마나 무리한 것인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본을 마치 자기들이 키워가는 나무처럼 생각해,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국민통합이라는 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군사관학교·국립대학·해군병학교 등에서 집중적으로 일본의 지도층을 양성했는데, 이 새로운 지도층은 자기들처럼 이것저것 고려하는 안목이 있으면 흩어지기 쉽기 때문에 단일화된 집단, 이념화된 집단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로들이 계속 살아 있다면 그들의 안목으로 사회를 규제할 수 있었겠지만 이들이 죽고 난 뒤, 국민통합을 위해 만들어 낸 후대 지도층 집단의 안목은 편협하게 고정된 상태 그대로였다. 그리고 근대화한 일본을 패망의 나락으로 이끈 군국주의는 바로 명치원로의 국수주의적 후계자들에 의해 주도된다.

천황을 명분으로 제국주의적 국민통합과 해외침략을 강행한 그들의 행동은 천황의 대권이라는 그늘 아래 최종적인 책임한계가 불분명했으며, 그만큼 무계획한, 어떠한 행동도 인정될 수 있었다. 일본 근대화의 주역인 명치원로의 모순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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