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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uccio to Gucci

From Guccio to Gucci

대부분의 명품 회사는 대를 이어 가문이 지배한다. 이들은 전통과 가치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세계의 유행을 주도한다. 이들 회사가 문을 열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숱한 스토리가 숨어 있다. 가문의 영광과 몰락, 그리고 사랑…. 포브스코리아는 2010년 신년호부터 ‘럭셔리 제국의 지배자’를 연재한다. 첫 번째는 낯익은 이름 구찌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많은 패션 하우스가 그렇듯 구찌 역시 시작은 패밀리 비즈니스였다. 지금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럭셔리 제국이지만 창립자인 구치오 구치를 거쳐 그의 네 아들을 거치기까지의 스토리는 한 편의 영화를 방불케 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영화화를 검토할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1959년 한창 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칸의 한 호텔 테라스. 여배우 로미 슈나이더가 알랭 들롱의 발을 한가롭게 어루만지고 있다. 아직도 회자될 만큼 유명한 이 사진에서 알랭 들롱이 신고 있는 것은 바로 구찌 로퍼. 21세기인 현재까지도 구찌 어느 매장에서나 볼 수 있는 이 클래식한 신발은 이미 1932년부터 일종의 부의 상징이었다. 이를 만들어낸 사람은 다름 아닌 구찌의 창립자, 구치오 구치.



구찌의 창립자, 구치오 구치구치오 구치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대대로 밀짚모자를 만들어온 집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부모에게 그 일을 물려받을 생각이 없었다. 밀짚모자를 만드는 일은 하향세를 타고 있었고, 구치오는 그 일에서 비전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젊은 청년이 원치 않는 가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고향을 떠나 런던으로 가는 것뿐.

거의 도망가다시피 간 런던에서 그는 사보이 호텔의 급사로 일을 시작한다. 기껏해야 심부름을 하는 일에 불과했지만, 타고난 눈썰미와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어린 소년에게 호텔에서의 경험은 훗날 큰 재산이 된다. 당시 사보이 호텔은 전 세계의 부호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부호들의 럭셔리 취향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던 그는 1921년, 다시 고향인 이탈리아로 돌아온다. 그는 피렌체에 작은 가게를 냈다. 상류층을 상대로 승마용품을 파는 가게였다. 이미 사보이 호텔에서 경험한 럭셔리 취향을 바탕으로 아이템을 선별했고, 여기에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역의 장인 솜씨를 더했다.

제품들은 입소문을 타고 곧 큰 인기를 얻는다. 젊은 디자이너이자 사업가인 구치오의 사업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1937년에는 핸드백, 여행가방, 장갑, 신발, 벨트 등으로 제품 라인을 확장했다. 구찌의 명성에 기여한 또 다른 포인트는 바로 로고와 상징. 구치오의 아들인 알도(Aldo)는 1933년 아버지 비즈니스에 합류하며, 아버지의 이름을 딴 알파벳 GG를 이용한 로고를 만들어냈다.

가게를 오픈할 당시 승마용품을 많이 다룬 덕분에 홀스빗 장식과 말 안장 장식 역시 구찌의 고유한 상징이 된 참이었다. 투스카나 지역의 귀족뿐 아니라 부유한 외국 관광객 사이에 구찌의 로고를 소유하는 것은 꽤 괜찮은 일이 되었다. 새 제품들은 출시하자마자 매진되었으니까.



전쟁의 위기 극복한 아이디어파시스트 독재정권 아래서도 구찌는 민첩하게 대처했다. 전쟁기간 동안 패션산업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모든 물자는 전쟁을 위해 사용돼야 했고, 옷을 만들 천이 부족해 유럽의 각 나라와 미국조차 많은 천을 사용하는 디자인을 아예 법으로 금지했다. 심지어 쿠폰을 발행해 한 사람이 살 수 있는 옷의 양을 제한했다.

구치오와 알도 부자는 전쟁 기간 제품 생산에 부족한 물자를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낸다. 바로 자연 소재인 대마, 리넨, 황마 그리고 대나무를 사용한 것. 특히 1940년대 후반에 소개된 대나무를 사용한 일명 ‘뱀부백’은 출시되자마자 큰 사랑을 받았다.

말 안장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아 가방을 디자인하고 손잡이 부분을 대나무로 처리한 백은 그레이스 켈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데보라 커 등 유명인과 셀레브리티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 영화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의 영화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기도 했다. 이는 구찌 역사를 통틀어 가장 독보적인 베스트셀링 아이템으로 남았고, 현재도 디자이너 프리다 지아니니의 재해석을 통해 여전히 뜨거운 아이템으로 인식되고 있다.

1938년에 오픈한 로마의 콘도티(Via Condotti) 매장은 이미 전 세계 패션 피플들의 쇼핑 명소가 되었고, 이후에도 밀라노, 런던, 파리, 베벌리힐스 등에 매장을 오픈했다. 전쟁 후 찾아온 경제 붐으로 상류층뿐만 아니라 유행에 민감하고 세련된 취향을 가진 새로운 중간 계급이 생겼다.

구찌는 이런 신흥부자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으며 점점 성장해 갔다. 구치오의 아내인 아이다 카벨리(Aida Calvelli)는 알도, 바스코, 우고, 로돌프 이렇게 4명의 아들을 낳았다. 알도는 일찌감치 아버지의 사업을 도왔다. 뉴욕의 첫 매장을 오픈해 이탈리아 브랜드로서는 최초로 미국에 진출한 역사를 남긴 것도 알도의 공로였다.

로돌프는 사업보다는 연기에 관심이 있었다. 꽤 잘생긴 얼굴로 한때는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곧 배우생활을 접고 패밀리 비즈니스에 참여한다. 그것은 분쟁의 시작이었다.



구찌家의 왕자의 난

▎1962년 구찌 로마 매장을 찾은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

▎1962년 구찌 로마 매장을 찾은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

1953년 구찌의 창립자인 구치오가 사망하자 알도와 로돌프는 각 50%씩 경영권을 나눴다. 하지만 일찌감치 경영에 참여한 알도에 비해 로돌프가 회사에 기여하는 바는 적었다. 알도는 1960년대 후반 아시아를 공략해 홍콩과 도쿄에 매장을 오픈했다. 알도가 만든 GG 로고와 그레이스 켈리가 착용한 플로라 실크 스카프, 그리고 재키가 디자인한 재키 오 숄더백은 전 세계를 지배했다.

1979년에 알도는 구찌 액세서리 컬렉션을 론칭했다. 향수 사업도 시작했고, 브랜드의 라이선스 사업도 시작했다. 1970년대 구찌는 그야말로 럭셔리 제국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로돌프와 알도의 싸움은 ‘격렬했다’고 회자될 만큼 계속되었다. 특히 로돌프가 20% 지분을 가진 향수사업에 대한 다툼은 매우 심했다.

분쟁의 씨앗은 늘 있어왔지만 정작 화약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알도의 아들 파울로 구치(Paolo Gucci)가 그 주인공. 그는 1983년 패밀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구찌 플러스(Gucci Plus)’라는 이름으로 구찌보다 더 저렴한 버전의 브랜드를 만들려고 했다. 이는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사회 회의에서 주먹다짐이 오가는 심한 분쟁이 있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그는 미국에서 그의 아버지의 탈세를 고발하기에 이른다. 알도는 아들의 법정 증언으로 감옥살이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가족 간 갈등이 지속되는 가운데 구찌의 위기는 서서히 찾아온다. 잡지 ‘베네티페어’의 에디터 그레돈 카터(Graydon Carter)는 이렇게 회상한다.

“구찌는 오드리 헵번, 그레이스 켈리, 재키 등 셀레브리티들의 사랑을 받는 최고의 브랜드였다. 하지만 1980년대의 구찌는 매력을 잃고 그저 공항 면세점에서나 사는 브랜드가 되었다.”

1982년 구찌는 가족 경영진의 결정을 통해 주식회사가 되었다. 그 와중에 1983년 로돌프가 사망한다. 로돌프의 사망 역시 구찌가에는 큰 충격으로 작용했다. 경영권은 로돌프의 아들인 마우리지오가 물려받았다. 1948년생인 그는 야망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마우리지오는 구찌의 옛 명성을 되찾아오겠다는 결심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1987년에서 89년 사이, 앵글로-아랍계 소유의 회사인 인베스트코는 구찌 후손들에게 흩어져 있던 회사 지분의 50%를 인수했다. 나머지 50% 지분과 경영권은 마우리지오가 계속 유지하도록 했지만 1990년 구찌 그룹은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했다.

구찌에 남은 창업자 패밀리라고는 마우리지오밖에 없었다. 결국 1993년 마우리지오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신이 보유한 모든 지분을 인베스트코에 매각한다.



죽음으로 끝난 패밀리 비즈니스구찌 스토리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마우리지오의 죽음이다. 그는 1995년 3월 27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살해된다. 전처인 파트리치아 레지아니가 고용한 청부업자의 총에 맞은 것이다. 파트리치아는 남편보다 더 야망이 컸고 심지어 매우 사치스러운 여자였다. 파트리치아가 구찌가에 있던 1980년대, 그녀는 이탈리아 상류층에서도 가장 알아주는 패션리더였다.

1990년 이혼하긴 했지만 마우리지오가 회사를 팔아넘긴 것은 그녀에게는 패배를 의미했다. 더 이상 그녀는 부호의 아내도 아니었고 패션계에 그 어떤 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전 남편을 살해한다. 그녀와 공범을 체포하는 데 2년이 걸렸다. 경찰이 그녀를 잡았을 때 그녀에게 옷을 갈아입을 아주 잠깐의 시간을 주었는데, 그녀는 모피코트를 입고 나타나 모두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결국 1998년 법정에서 29년형을 선고받았다. 2000년에 그녀는 감옥에서 목을 매 자살을 시도했다 실패해 또 한 차례 뉴스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녀는 ‘자전거 위에서 웃느니 롤스로이스 안에서 울겠다(I’d rather cry in Rolls-Royce than laugh on a bicycle)’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전문경영인의 시대

▎1960년, 구찌를 사랑한 스타 오드리 헵번.

▎1960년, 구찌를 사랑한 스타 오드리 헵번.

이 모든 비극이 끝난 뒤 구찌는 회생의 길로 접어들었다. 1990년부터 구찌의 여성복 디자인을 담당한 미국 출신의 디자이너 톰 포드, 그리고 구찌 아메리카의 수석이었던 도미니코 드 솔레가 새로운 시작을 위해 투입되었다.

특히 톰 포드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는 이름만 남은 브랜드에 그 어느 브랜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섹시함의 유전자를 불어넣었고, 브랜드 로고나 홀스빗 상징 등 브랜드의 유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마돈나, 니콜 키드먼, 귀네스 팰트로, 요르단의 라니아 왕비, 스팅, 톰 크루즈, 믹 재거, 브래드 피트 등 당시 구찌를 추종한 유명인들의 리스트는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톰 포드는 1994년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드 솔레는 95년 구찌의 회장이자 CEO로 임명되었다.

1998년 유럽언론협회는 구찌의 뛰어난 경영성과를 높이 평가해 ‘올해의 유럽 기업’으로 선정했다. PPR(Pinault-Printemps-Redoute)과 전략적 제휴를 맺은 덕택에 구찌는 다음 해 세계적인 럭셔리 제품 산업을 이끄는 대기업 중 하나인 구찌 그룹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몇 년 뒤에는 이브 생 로랑, 이브 생 로랑 보떼, 세르지오 로시, 보테가 베네타, 부쉐론, 알렉산더 맥퀸, 스텔라 맥카트니, 발렌시아가 등 중요한 브랜드들을 차례로 인수해 구찌 그룹의 럭셔리 포트폴리오를 한층 강화했다.

2004년 7월 PPR에 의해 구찌 그룹은 99.4%의 소유권을 갖게 되고, 암스테르담과 뉴욕증권거래소의 상장을 폐지했다. 도미니크 드 솔레와 톰 포드가 회사를 떠나게 됐고, 그 후 로버트 폴렛이 드 솔레를 대신해 구찌 그룹의 CEO로 취임했다. 구찌의 사장과 CEO로는 마크 리가, 책임 디자이너는 프리다 지아니니가 임명됐다.

그 성적표는? 2005년부터 2008년까지 4년 동안 46% 신장하며 20억 유로 이상의 이익을 창출해 낸 것으로 증명된다. 2009년 1월에는 보테가 베네타의 CEO였던 파트리지오 디 마르코가 마크 리를 이어 구찌의 CEO를 맡았다.

2007년 닐슨 조사에 따르면 구찌는 세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럭셔리 브랜드다. 2008년 ‘Interbrand Best Global Brand’ 연구에서는 세계 모든 산업 분야 중 45번째 가치 있는 브랜드로 이탈리아 브랜드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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