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호암과 안철수의 가상 대담
[부록] 호암과 안철수의 가상 대담
안철수 교수 저는 경영의 개념에 어두운 의사 출신입니다. 창업 당시엔 조직에 대한 경험조차 거의 없었죠. 그래서 창업할 때 많은 고민을 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화두 중 하나가 ‘기업의 목적은 수익의 창출’이란 명제였습니다.
그런데 기업 활동의 과정을 보면 기업이 본연의 일을 열심히 할 때 사용자들이 그 회사의 제품·서비스를 구매하게 되고 그 결과 수익이 창출됩니다. 말하자면 수익의 창출은 기업의 목적이라기보다 결과라는 것이죠. 이런 생각으로 저는 경영을 했습니다. 그런데 경영자로서 경영에 대해 공부하는 과정에서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한 사람을 책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로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터 드러커였습니다. 그 후로도 수많은 경영학 서적에서 같은 생각을 접했죠. 회장님께서는 기업의 목적이 수익 창출이라는 명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병철 회장 기업이 이익을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 사회에 이윤 추구를 죄악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윤을 극대화하지 못하면 기업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윤 추구는 CEO로서는 당연한 사회적 책임이자 의무라고 할 수 있죠. 나는 이윤 추구야말로 기업인이 애국하는 길이라 믿습니다.
기업이 적자를 내 국민에게 부담을 준다면 형사 책임을 지지 않더라도 사회에 대해 큰 죄악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이익을 많이 남기더라도 정당한 계획에 따른 게 아니라면 옳은 일이 아닙니다. 이런 비즈니스는 사실 기업가에게 권할 만한 게 못 되죠. 한편으로 기업가는 사회를 건전하게 이끌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기업 활동은 공공의 이익에 합치돼야 합니다. 기업의 이익과 공익은 양립할 수 있고, 또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윤 추구는 기업의 부수적인 목표일 뿐이죠. 눈앞의 이익을 챙기는 데 급급해 폭리를 일삼고 조악한 제품을 만들어 팔았다가는 당장 신용을 잃고 맙니다.
하지만 기업이 수익을 못 내면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잃게 되는 거죠. 결국 기업은 영리와 사회 정의를 조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기업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방법은 가장 질 좋은 제품, 가장 저렴한 가격을 추구해 적정 이윤을 확보하는 ‘완전기업’을 지향하는 겁니다.
기업 간에 경쟁하더라도 서로 페어 플레이, 파인 플레이를 해야 합니다. 뒤에서 욕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경쟁사를 쓰러뜨리려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기업 활동은 공공 이익에 합치돼야
안철수 결과가 과정을 합리화하는 시대입니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도도한 요즈음 이런 경향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결과와 과정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병철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한 번도 사업에 실패한 적이 없는 줄 압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다만 젊었을 때 겪은 실패의 체험을 값진 교훈으로 돌렸을 뿐이죠. 결과는 실패였지만 실패를 체험한 과정은 나에게 소중한 교훈으로 남았습니다. 과정은 물론 나는 동기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사업에 착수할 때도 그 사업이 우리 국민과 인류에게 필요한 것인지 먼저 살핍니다. 수익성은 그 다음 기준이죠. 마지막으로 자금, 인력, 기술 등을 조달할 수 있는지 내 능력을 따져 보고 나서 사업을 벌입니다. 돈이 얼마나 드느냐를 떠나 설사 적게 들더라도 벌이지 말아야 할 일이 있어요. 사업을 할 때도 윤리성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물질이 없어서는 안 되지만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가 반드시 물질은 아닙니다. 물질은 정신과 함께 있을 때 원만한 조화를 이루게 되죠.
이병철은 1983년 반도체 사업에 투자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가 만 73세 되던 해였다. 반도체 사업 초기 삼성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반도체 양산에 나선 이듬해부터 4년 연속 손실을 기록했다. 누적적자가 엄청났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당시 1메가 D램 공장을 당장 착공하지 않으면 출하 경쟁에서 뒤처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지만 내부에서 반대가 심했다.
그러자 그는 “내일 아침 착공식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행동으로 표명한 것이다. 기흥 공장에서 기공식이 열린 날 마침 비가 내렸다. 일부에서 “삼성이 어려워질 징조”라고 수군거렸다. 반도체 사업은 87년 그가 타계한 후에야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막대한 적자를 그가 실패의 결과로 받아들였다면 오늘의 삼성전자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하노라고 한 것이 실패했다면 그 경험도 하나의 자산”이라고 말했다.
안철수 회사는 주주(shareholder) 중심의 경영을 해야 한다는 게 당연한 상식처럼 돼 버렸습니다. 미국식 자본주의를 아무런 비판이나 여과 없이 도입한 탓이라고 봅니다.
최근 들어 이해관계자(stakeholder) 중심의 경영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해가 부족하고 관심도도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주주만을 생각하는 경영은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폐단을 불러올 수 있다고 봅니다. 반(反)기업 정서라는 것도 어쩌면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이병철 대기업은 자기 회사를 살리는 데만 힘을 쏟아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요즘처럼 수많은 기업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기업 활동을 해야 하는 시대엔 CEO가 자기 회사의 울타리를 벗어나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눈앞의 이익을 초월해 기업 활동을 해야 할 때도 있어요.
나아가 나는 자본금이 일정 규모 이상인 대기업은 사회와 국가를 위해 공헌해야 할 신성한 의무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삼성이 경영을 잘못해 공장 몇 개가 조업을 단축하거나 아예 중단하면 많은 사람이 취업의 기회를 빼앗기고 생계에 위협을 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삼성이 국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진다면 나는 결과적으로 국가에 대한 사보타주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경영을 잘못하는 건 범죄행위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업다운 기업을 일으켜 상품·서비스를 풍요롭게 공급함으로써 인류가 공존공영하는 복지 사회 건설에 이바지하는 것이야말로 기업의 최대 목표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대기업에 대해 사회적으로 상당한 비판이 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소기업과의 보완관계, 수출, 생산, 고용, 납세 등의 면에서 대기업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땐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되는 느낌도 들어요. 대기업이 잘못하는 건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자본주의 경제의 원동력인 대기업 그 자체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기업은 사업을 통해 부를 창출하고 임금, 배당, 세금 등으로 부를 분배함으로써 국민 경제에 이바지합니다. 기업이 이익을 내지 못하면 이익의 재분배를 통한 부익부빈익빈 현상의 시정도 무망해집니다.
경영 잘못하는 건 범죄행위
안철수 최근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CSR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업이 경제적인 면뿐 아니라 사회적인 면, 나아가 환경 측면까지 고려하면서도 균형 있는 성장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이병철 제일제당의 창업이 좋은 예입니다. 제일제당의 성공으로 나는 창업의 기쁨과 더불어 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실감했죠. 이후 신규 투자를 한다면 이번에도 수입대체 산업 중 생필품과 밀접하게 연관된 공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착안한 게 제일모직이었죠. 그 시절 설탕도 양복지도 삼성이 생산하기 전까지는 수입에 의존했거든요.
삼성이 국제적인 규모의 제당공장을 만들어 설탕의 시장 가격을 3분의 1 이하로 떨어뜨린 결과 우리 국민은 당시 화폐 가치를 기준으로 수백억원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만큼 외화를 절약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화로 다른 분야에 투자할 수 있었죠.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삼성도 이익을 얻고 발전했습니다.
나는 학교가 배출한 귀한 사람을 맡아 훌륭한 인재로 키우는 것, 그래서 이 사회와 국가에 쓸모 있는 그릇으로 만드는 것도 기업, 나아가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에 속한다고 봅니다.
안철수 기업가 정신의 근본은 어떤 위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단해 행동에 옮김으로써 새로운 가치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기업 CEO 가운데는 진정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지 못하는 분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오너가 주요한 투자 결정을 하고 CEO는 결정된 것을 수행하는 역할에 머물기 때문이죠. 저는 지위에 걸맞은 결정권을 부여해야 기업가 정신을 가진 진정한 기업가가 많이 탄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병철 나는 삼성 경영을 진두 지휘할 당시 1년에 한두 번 사업계획과 결과 보고를 들었을 뿐 모든 것을 계열사 사장들에게 맡겼습니다.
회사의 지속가능한 발전은 창업자가 아니라 CEO의 몫입니다. 경영을 맡은 CEO가 전적인 책임감을 갖고 해 나가야 돼요. 그러나 이런 진리를 누차 강조했는데도 충분히 이행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나는 회사 경영에 개선의 여지가 없으면 CEO의 활동에 간섭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일부에서 CEO를 빈번하게 교체했다고 하지만 회사가 잘 안 될 때 책임을 물은 것이죠.
잘되는 회사의 CEO를 교체한 것은 어려운 회사를 맡겨 그런 사람이 더 한층 역량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심지어 “모든 게 잘되고 있다면 나에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기업은 곧 사람입니다. 기업은 문자 그대로 업을 기획하는 것인데, 그 기획의 주체가 사람이기 때문이죠. 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성실하고 책임질 줄 아는 사람, 더 욕심을 낸다면 위기 때 판단이 빠르고 구성원들이 따를 만한 덕망을 갖춘 사람, 이런 사람을 발탁해 모든 것을 위임하는 게 이병철 경영의 요체입니다.
위임은 삼성의 전통적인 운영 방침이에요. 일반론이지만 사원의 복지, 나아가 회사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책임의식을 주주와 CEO가 공유할 때 CEO는 불필요한 간섭을 받지 않으면서 경영 활동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럴 때 CEO 자신도 성장할 수 있죠. 진정한 리더십, 특히 CEO의 리더십은 영속적이어야 합니다.
경영하는 기업을 후대에도 지속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면 리더십의 성격도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변해야 합니다. CEO뿐 아니라 전 구성원이 회사 일에 관한 한 조금의 가식도 없이 사실과 소신대로 상하 간에 직언하는 기풍을 길러야 합니다.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직언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앞날과 회사의 장래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고, 반대로 부하 직원의 직언을 무시하면 인재가 클 수 없어 회사는 침체일로를 걷게 마련입니다. 부하 직원은 부하 직원대로 상사에게 예스맨이 돼서는 안 됩니다.
안철수 대기업도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저는 건실한 중소기업 파트너들이 대기업에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기술을 제공해 줄 때 대기업이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반성장론이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최근의 언론 보도를 보면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경영진에 이런 의지가 있어도 현장에서는 그에 역행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결국 불공정거래로 과징금 판결을 받는 이런 현실을 바로잡을 방안은 없을까요?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상호보완 관계
이병철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호혜적(互惠的) 보완관계를 맺고 공존공영해야 합니다. 이런 관계를 유지할 때 국민경제를 지탱하고 발전시키게 되죠.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중소기업은 중소기업대로 나름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이 있어야 발전하고, 중소기업도 대기업이 있어야 끌어주고 키워 줄 수 있죠. 예를 들어 기술 개발과 수출 확대는 대기업만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대기업은 앞에서 끌고 중소기업은 뒤에서 밀어야 돼요. 이런 공존공영의 정신이 없으면 더 이상 경제발전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쪽이 자기만의 이익을 고집하거나 상호신뢰가 부족해 말썽이 생깁니다. 나는 경영을 할 당시 삼성 임원들에게 중소기업에 대한 기술 지도와 지속적인 지원을 하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리 협력업체가 기술이나 자본이 부족해 생산에 차질을 빚는다면 우리도 막대한 손해를 보고 결국 국가적으로도 손실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협력업체와 업무 협의를 할 때는 친절히 대하고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대리점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리점이 살아야 회사가 삽니다. 이 사람들의 이익을 보장해 줘야 합니다. 그래서 삼성전자 대리점이 손해 나지 않게 하고, 생활보장을 해 주라고 얘기했습니다.
어려우면 회사가 투자를 해서라도 살려 나가자고 말했죠. 이게 바로 공존공영의 실천입니다. 기업은 절대 사유물이 아닙니다. 그런 만큼 결코 반사회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기업의 규모가 클수록 해를 끼치는 범위가 넓어집니다. 대기업이 자기 경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죠. 대기업이라는 분류는 사실 상대적인 것입니다.
60년대 말 이미 삼성은 재벌 소리를 들었지만 당시 내가 보유한 자산은 일본의 재벌에 비하면 미미했습니다. 지금이야 총자산이 317조5000억원(2008년 기준)에 이르지만 당시 삼성 계열사는 모두 중소기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기업인이 자기 기업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다면 그 기업이 자기 것이라 하더라도 나라에 위해를 끼치는 겁니다.
나는 과거 돈에 눈이 멀고 탐욕에 빠져 나 자신을 잃은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조직이든 구성원의 10%는 어떤 경우에도 부정을 저지르지 않을 사람들이고, 또 10%는 기회만 있으면 문제를 일으키는 위험 인물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80%가 교육·훈련을 하기에 따라 선한 사람도 되고, 악한 사람도 되는 법이죠. 그래서 조직의 리더가 중요합니다.
안철수 처음 글로벌 무대로 나갈 때 삼성의 규모는 외국 경쟁사에 비해 작았습니다. 그 후 삼성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제 세계인이 모두 인정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섰습니다. 글로벌 시장 진출을 꿈꾸는 중소기업들에 어떤 조언을 주시겠습니까?
이병철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창업과 수성은 고되고 힘든 일입니다. 뼈를 깎는 노력과 창조력, 천신만고의 고난을 무릅쓰는 강한 정신력과 용기가 있어야만 경영을 할 수 있죠. 일반론이지만 규모를 차치하고 사업이 성공하려면 우선 시기, 자본, 사람의 3박자가 맞아떨어져야 합니다.
기업은 사회적 산물입니다. 시대의 여건과 상황에 맞는 업종을 골라 합리적으로 경영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려면 부가가치가 높은 고가품을 만들어야 돼요. 전자산업이 특히 그렇지만 새로운 상품, 새로운 디자인, 새로운 기술 없이는 남들에게 뒤처지고 맙니다.
그래서 해외 주재원을 통해 트렌드를 파악하고 사전에 마케팅 조사를 해 해외 무대에서 시장을 창출해 나가야죠. 분야에 따라 일본이 우리보다 기술적으로 앞섰을 수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일본이 하고 남은 것, 사양화한 기술을 들여와서는 국제 경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기업은 사유물 아니다결국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한편 제품을 고급화하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세계를 한눈에 보는 넓은 시야와 패기를 가지고 세계 무대를 활발하게 누벼야 합니다.” 과거 삼성 사람들에게 하던 이야기인데, 우리나라 기업 종사자 전체에 일반화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이미 하나의 세계, 지구촌으로 변모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우리 기업인들이 호흡하고 활동하기엔 너무 좁아요. 자원도, 사업의 기틀도 빈약하죠. 반면 우리는 강인한 민족성과 지혜로운 국민성을 갖췄습니다. 이런 자질을 최대한 살려 세계시장을 개척하는 것만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그러자면 우리의 시야와 사고를 국제인의 수준으로 확장해야 합니다.
글로벌 시대 국제경쟁에서 이기려면 경영을 합리화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경영의 합리화 내지 과학화야말로 우리나라 기업 풍토에서 가장 화급한 문제입니다. 선진 경영 기법을 도입해 경영 체질도 합리화해야 합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신하지 못하는 기업은 발전은커녕 도태되고 맙니다.
중소기업인들에게는 기업의 구심점이 기업주의 인격적인 호소력이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장학은 바로 인간학이죠. 사장이 인간학에 능하다면 그 회사의 장래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또 사명감만으로 경영을 하려 들어서는 안 됩니다. 중소기업으로서는 쉽지 않겠지만 구성원들에게 일만 시키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만족감도 채워 주는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CEO도 스스로 발전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공부를 계속해야죠. 요즘은 아예 ‘샐러던트’라는 말을 쓰더군요.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절대로 아이디어가 안 나옵니다. 아랫사람을 포함해 남의 이야기도 귀담아듣고 외국 것을 비롯해 신문·잡지도 부지런히 봐야 합니다. 귀찮은 일이죠.
나 역시 외국 신문과 잡지는 읽기 싫어했습니다. 그래도 읽은 건 시대조류와 세계 정보에 뒤지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만일 내가 활동하던 시절에 인터넷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인터넷을 통한 정보 추구도 게을리하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말했을 겁니다. CEO는 또 판단이 빨라야 합니다.
심지어 후퇴에 대한 판단도 빨라야 합니다. 상황을 판단해 안 될 것 같으면 남보다 몇십 배 빨리 후퇴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느 사업이든 실패의 위험이 따릅니다. 가장 위험한 건 실패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을 품고서 일에 착수하는 겁니다. 결심하기 전까지 충분한 검토를 해야하지만 계획이 확정되고 나면 어떤 어려움도 무릅쓰고 과단성 있게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이것이 사업가의 기본이에요. 실패가 두려워 책임을 회피하는 무기력한 사람들이 모인 기업이나 사회는 결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돌격정신이야말로 성장의 동력이죠. 또 어떤 일이든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불경기에도 돌파구는 있게 마련이죠.
이병철이 1938년 대구 서문시장에 차린 삼성상회는 250평 남짓한 규모였다. 대구 일대에서 나는 청과류, 포항의 건어물 등을 만주와 중국으로 수출했다. 그가 타계할 무렵 삼성은 계열사 37개, 매출 14조원 규모의 대그룹으로 성장했다. 2008년 삼성그룹의 순이익 규모는 11조7000억원에 이른다.
그의 타계 당시 매출액에 육박하는 규모다. 매출액은 21년 만에 14배로 늘어났다. 구성원 수는 해외 근무자 10만 명을 포함해 27만 명에 달한다. 강원도의 도청 소재지인 춘천 인구와 맞먹는 규모다. 세계시장 점유율을 기준으로 한 월드 베스트 제품 수는 21개를 기록하고 있다. 생전의 호암은 “많은 우리나라 기업이 단명에 그친 것은 불합리한 경영을 한 탓”이라고 진단했다.
안철수 저성장 시대를 맞아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양립시키는 것이 전 세계의 고민거리가 됐습니다. 이 둘이 양립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일자리 제공이 최고의 분배
이병철 기업은 많은 사람에게 취업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에 공헌합니다. 그런 만큼 기업이 감원, 휴업 등으로 많은 실업자를 만들어 낸다면 사회적 책무를 저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죠. 일자리 창출을 제대로 못하면 이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기업이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업은 국민에게 끊임없이 일자리를 제공하는 한편 임금과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업이 사회와 국민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대의 간접 분배죠. 그러자면 기업 활동을 통해 얻은 이익을 계속 새로운 사업에 투자해야 합니다. 기업가의 사업 의욕과 투자에 대한 의욕을 북돋우는 것도 필요합니다.
나아가 근로자의 근로에 대한 의욕도 북돋워야죠.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이런 풍토를 조성하려는 노력을 범사회적으로 기울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민·관이 하나가 되는 일치와 협력이 필요합니다. 지속적인 성장의 페달을 밟으려면 선진국 대열에 끼어야 합니다. 방법은 세 가지뿐입니다.
바로 가격, 품질, 속도 면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죠. 좋은 품질의 상품과 서비스를 남보다 앞서 제공하는 것도 경쟁력입니다. 반도체 사업이 좋은 예죠. 반도체 사업의 성패는 첨단 제품을 누가 먼저 내놓느냐에 달려 있어요. 이제 안 교수에게 묻겠습니다. 요즘 나더러 사람들이 벤처 기업인이라고 합디다. 나로서는 용어조차 생소해 겸연쩍은데, 안 교수도 그렇게 봅니까?
안철수 당연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회장님이 창업하실 때야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시작하신 것 아닙니까? 불확실성이 상당히 많은 가운데 나름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셨을뿐더러 그 결과에 책임을 지셨으니 당연히 벤처 기업가라고 할 수 있죠.
참 기업가 정신은 가치 창조 활동
이병철 기업을 하는 동기엔 여러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그중엔 금전욕을 뛰어넘는 창조적 충동이랄까, 무엇이든 값어치 있는 것을 남보다 앞서서 만들어 내고자 하는 본능과 그 본능에 따르려는 의욕도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요소를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기업가 정신이란 바로 이런 본능과 사회적 책임감이 잘 화합해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나는 봅니다.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는 학자로서 안 교수는 어떻게 봅니까?
안철수 우선 기업가 정신에 대한 오해부터 풀고 싶습니다. 대기업 CEO들조차 기업가 정신이라고 하면 경영자 마인드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가 정신에 대해 강의한다고 하면 “우리 사회에 반기업 정서가 있는데 경영자들이 얼마나 많은 고충을 겪는지 설명해 달라”고 합니다. 이때 도모할 기(企) 자를 쓰는 기업가(企業家) 정신은 실은 비즈니스맨십입니다.
반면 흔히 기업가 정신으로 번역하는 엔트러프러너십(entrepreneurship)은 일으킬 기(起) 자를 쓰죠. 이때의 기업가는 새로운 업을 일으키는 창업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가치나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해 마침내 이룩하는 것, 그게 곧 기업가 정신이죠. 여기에 사회적 책임의식을 더해야 한다는 말씀은 정말 적절하다고 봅니다.
저는 여기에 두 가지를 더 보태고 싶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고 사람들의 삶에 혜택을 줄 수 있는 상품·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마음가짐, 다른 하나는 급변하는 트렌드를 앞서서 읽는 통찰력이랄까 비전입니다. 이때의 통찰은 단순히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좋은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정말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느리고 지루하고 점진적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탄생하더군요. 진정한 의미의 통찰이란 탄탄한 전문성, 숱한 고민, 갖은 시행착오의 산물입니다. 바로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가 이런 진화 과정을 겪었습니다. 얄팍한 아이디어로 실패를 거듭해 애플에서 쫓겨났지만 넓은 세상에 나가 여러 경험을 쌓다 보니 통찰력이 생긴 거죠.
기업가의 본령은 가치 창조라는 점에서 기업가 정신은, 멋은 없지만 가치 창조 활동이라고 번역하는 게 타당하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기업가 정신은 정신이 아니라 활동입니다. 리더로서의 마음가짐만 있는 사람을 리더십이 있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죠. 이런 기업가 정신은 창업자뿐 아니라 기업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도 필요합니다.
회사 전체에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내고 위험 부담을 안고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사내 기업가(corporate entrepreneur) 에게 바로 이런 자세가 요구되죠. 이런 사람들까지 포괄해 전반적으로 기업가 정신이 쇠퇴하고 있습니다.
불확실성이 갈수록 높아가는 데다 구조적인 모순이 심각하다 보니 사회의 구성원들이 안정지향적인 경향을 띠게 되는 것이겠죠. 이런 가치 창조 활동까지도 위축됐다는 점에서 저는 한국 사회 전체가 큰 병을 앓고 있다고 봅니다.
창업 리스크가 기업가 정신 죽여
이병철 그러나 내가 사업을 할 땐 심혈을 기울여 키운 기업을 빼앗기기도 했어요. 사업 환경 탓을 많이 하는데, 요즘 기업가들이 너무 안일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 아닙니까?
안철수 물론 북한보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낮았던 시절 창업을 하신 회장님으로선 그렇게 보실 만합니다. 그 시절과 비교하면 기업을 하는 여건이 당시엔 상상할 수도 없었을 만큼 좋아졌죠. 어쨌거나 잠재적인 창업자들이 구조화된 벽이 높아 위험을 감수하려 들지 않고 취직을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저는 이 위험도를 조금 낮추면 창업자가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중견기업들이 거의 도태돼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직거래를 합니다. 덩치가 이렇게 서로 차이가 나면 불공정한 거래가 생길 수밖에 없어요. 이 역시 양극화죠.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우리나라의 미래가 어둡습니다.
이병철 그러게 요즘은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지 않고 대기업이 된 중견기업도 거의 없습니다. 새로운 기업이 잘 출현하지 않고요. 안 교수는 그 원인을 어떻게 진단합니까?
안철수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중견기업이 거의 말살되다시피 했죠. 사실 중소기업은 중견기업이 되고 싶어 합니다. 이 정도로 중견기업이 적은 건 제도의 문제, 구조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병철 내가 반도체 사업에 투자하겠다고 대외적으로 공표한 게 만 73세 때 일입니다. 창업하기 힘들다고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패기와 도전정신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안 교수는 어떻게 봅니까?
안철수 오늘은 젊은 세대를 좀 옹호하고 싶군요. 제가 네 학기째 대학에서 가르치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호기심도 많고 도전정신도 있습니다. 구조적인 모순에 눌려 기를 못 펴고 있는 거죠. 우리나라에서 산업이 위축되고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기업가 정신의 쇠퇴로 창업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지만 이미 창업해 활동하고 있는 기업들의 실패 확률이 높은 것도 원인이라고 봅니다.
창업이 줄어든 데는 창업에 따르는 리스크가 너무 큰 현실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만일 창업에 실패하더라도 다시 도전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많은 사람, 특히 젊은 사람들이 도전할 텐데 현실은 일단 실패하고 나면 평생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혀 거의 재기 불능 상태에 빠지거든요. 그래도 소수가 용기를 내 창업을 하는데 이 사람들도 실패를 많이 합니다.
실패 확률이 높다는 거죠.저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고 보는데 우선 남 탓할 것 없이 실력들이 부족합니다. 둘째, 멀티 태스킹을 잘 못하는 벤처·중소기업을 위한 우리 사회의 인프라가 굉장히 부실합니다. 대학 등 교육기관, 금융권, 벤처 캐피털, 콜센터 등 아웃소싱 업체, 연구개발(R&D) 정책 등 정부의 정책·제도 등이죠.
셋째,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불공정한 거래 관행입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이익을 빼앗아가는 이런 구조에서는 중소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이 세 가지 때문에 창업의 성공 확률이 낮습니다. 저는 이게 우리 사회가 풀 수 없는 숙제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장님이 반도체 사업에 투자하셨을 때보다는 훨씬 젊었지만 불혹을 넘긴 나이에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노안이 오기 전에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사실 의사를 그만뒀을 때와 비슷한 맥락입니다. 당시 저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보다 병의 원인을 밝히고 치료법을 개발하는 길을 가면 훨씬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환자 한 분, 한 분의 건강을 회복시키는 것도 정말 보람 있는 일이죠.
아, 젊은이로서 도전정신이 부족하다는 이 회장님의 지적에 수긍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KAIST만 하더라도 국민 세금으로 이 나라에 필요한 엔지니어와 과학자를 길러내는 학교인데 많은 졸업생이 의학대학원·법학대학원에 진학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죠. 대학 당국도 대책을 세우고 있습니다만.
이병철 투자 부진, 신수종 사업 부재, 일자리 부족 등이 요즘 심각한 것 같습니다. 안 교수는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라고 봅니까? 나름의 해결책은 뭔가요?
안철수 양극화라고 봅니다. 자본주의, 특히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불가피한 현상 같습니다. 그런데 빈부격차를 비롯한 양극화가 굳어지고 대물림되는 것이 심각합니다. 사회 계층이 고착화하는 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기득권이 유지되는 것은 기득권층에도 독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득권이 유지되면 안주하게 되고 결국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죠. 이때 외부로부터 도전을 받으면 다같이 무너집니다. 기득권이 도전받고 그래서 일부 기득권층은 도태되고 개인이든 기업이든 새로운 세력이 부상하는 구조가 돼야 건강한 사회입니다. 이상론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저는 기득권층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봅니다.
성공은 혼자 노력해 이룰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대기업 위주의 산업 구조도 바뀌어야 합니다. 대기업이 해당 산업에서 창출되는 이익의 90%를 차지하는 건 불공정한 이익 배분 구조예요. 그 바람에 중소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중산층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이 제대로 성장하도록 나서지 않으면 양극화 문제는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양극화의 핵심 대책은 중소기업이 처한 이 문제를 푸는 거라고 단언합니다. 국가 경제의 포트폴리오 차원에서도 중소기업이 튼실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대기업 위주였던 우리나라가 과거 외환위기에 빠진 것도, 대부분 중소기업인 대만이 이번 글로벌 경제위기에 취약한 것도 산업구조의 편중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정도로 경제 규모가 커지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모두 튼튼해야 합니다. 투자 부진을 지적하셨지만 이 역시 기업가 정신의 퇴조와 관계가 있습니다. 기득권이 유지되다 보니 새로운 투자가 잘 일어나지 않는 거죠. 단적인 예로 아이폰의 국내 진출을 지연시킨 결과 우리 휴대전화 제조사들이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안정된 구조라는 기득권을 지킨 게 아니라 스스로 무덤을 판 거죠. 혁신은 남들이 하는 것보다 스스로 하는 게 좋습니다. 남이 하게 내버려 둘 때 불행이 싹트기 시작하죠. 기득권엔 세습된 경영권도 포함됩니다. 저는 소유 경영이 꼭 나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단 소유권을 쥐고 있더라도 능력이 없으면 경영을 못 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 최대의 문제는 양극화
이병철 나는 인사를 할 때 나의 가족을 굳이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각별히 신경을 써 공정한 인사원칙에 어긋나지 않도록 했습니다. 공정한 승진 기회 부여와 적재적소 배치는 나의 확고한 경영방침이자 경영비결이었죠. 돌아보면 나는 평생 사람을 중시하는 경영을 했습니다. 모든 일이 일의 규모를 떠나 사람이 그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이 오랜 경험을 통해 내가 체득한 진리입니다.
역사의 새 장을 여는 것도, 기술과 지식의 혁신을 가능케 하는 것도 바로 인간의 능력이죠. 그런데 요즘 생산의 효율성을 높이려다 보니 안타깝게도 고용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내가 경영을 할 땐 겪지 못한 현상이죠. 고용 없는 성장의 대책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습니까?
안철수 제조업은 산업이 성숙할수록 고용 없는 성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효율성을 높이고 비용을 낮추려면 아웃소싱을 하고 공장도 해외로 이전해야죠. 그래야 기업도 발전합니다. 산업 특성상 고용이 줄 수밖에 없는 분야에 자꾸 고용을 하라는 건 기업 논리에도 맞지 않고, 그랬다가는 해당 기업의 경쟁력만 약화될 뿐입니다.
실은 대기업이 효율성을 추구하는 한편 공정거래를 통해 협력관계에 있는 중소기업을 키울 때 거기서 일자리가 창출됩니다. 결국 대기업을 향해 일자리를 창출하라고 하기보다 중소기업과의 사이에서 불공정 거래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중소기업이 사람도 뽑고 R&D 투자도 해 경쟁력을 확보하는 선순환이 일어납니다. 반대로 은행 이자 비용 정도만 남기도록 하청업체들을 쥐어짰다가는 국가 전체적으로 오히려 고용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기업인들 사업보국 신념 약해
이병철 ‘사업보국(事業報國)’은 평생 기업인으로 산 나의 신념입니다. 평생토록 나라에 기여할 수 있는 새 사업을 모색하는 게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디. 그런데 요즘 기업인들에겐 이런 사명감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나라야말로 모든 것의 기본입니다. 나라가 잘돼야 기업도 잘되고 국민이 행복해질 수 있죠. 이렇듯 나에겐 삼성보다 나라가 더 중요합니다. 안 교수는 이런 나의 생각이 낡았다고 봅니까?
안철수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회장님 생각에 100% 공감합니다. 저도 창업을 할 때 바이러스 백신 개발·보급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일인데 아무도 안 하기에 시작했습니다. ‘보국’이란 생각까지는 안 들었지만 우리나라 전체를 위한 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임했죠.
이런 의미 있는 일이 명맥이 끊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저는 지금도 많다고 봅니다. 다만 경제 규모와 기업의 사이즈가 커지다 보니 리스크도 커져 성공의 문턱이 너무 높아진 것이죠.
이병철 나는 평생 기업인이었습니다. 요즘 기업가 정신의 쇠퇴가 극심한데, 안 교수 같은 분이 계속 사업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안연구소를 세계 최대의 소프트웨어 회사인 마이크로 소프트 같은 기업으로 키우는 것도 보람 있는 일 같은데요?
안철수 저한테는 안연구소 CEO 자리가 더 편했습니다. 인정받을 수 있고 여러 가지로 보람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쫓겨날 일 없는 안정적인 직장이었죠. 아마 우리나라 기업 간 거래의 구조와 관행이 실리콘밸리 같았다면 구태여 한눈팔지 않았을 겁니다. 안연구소가 소프트웨어 회사 중 1위 업체다 보니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가장 먼저 체감했습니다.
당시 저희 회사는 잘됐고 이후로도 잘될 게 분명해 보였지만 다른 소프트웨어 업체를 포함해 벤처 기업, 중소기업들이 어려워졌습니다. 구조적인 모순 때문이었죠. 이런 상황에서는 노력을 해도 미국 기업만큼 성장하기 힘듭니다. 이 구조적인 문제를 푸는 게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죠. 안연구소는 전문경영인이 맡아도 저만큼 할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고요. 누가 먼저 나서서 이런 일을 하고 있었다면 제가 나설 필요가 없었겠죠.
이병철 안 교수도, 얼굴은 동안인데 지천명을 바라보는군요. 나는 그 나이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사원 공채를 했고, 전경련의 전신인 한국경제인협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지냈습니다. 나로서는 평생 단 한 번 맡은 대외직이죠. 안 교수는 인생 후반기를 어떻게 설계하고 있습니까?
안철수 저는 장기 계획은 없습니다. 솔직히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의대 교수로 있을 때 제가 그 일을 그만두는 건 상상도 못했고, 안연구소를 시작할 때도 앞으로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풀기 위해 대학에 자리 잡으리라고는 꿈도 못 꿨어요.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금까지 그랬듯이 제가 의미를 느낄 수 있고, 재미있게 할 수 있고, 또 잘할 수 있는 일을 할 겁니다. 그러면서 남들과 차별화하는 방식으로 열심히 살 겁니다. 저는 옳다고 믿는 일에 대한 신념과 책임감이 강한 편입니다.
리더형 CEO가 바람직
이병철 CEO 출신이자 기업가 정신을 연구, 강의하는 학자로서 안 교수는 바람직한 CEO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안철수 과거 목표지향적인 관리자형 CEO를 요구했다면 요즘은 리더형 CEO가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리더는 구성원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협조를 이끌어내 임무를 완수하죠. 더욱이 사회가 복잡해지고 급변하면서 천재적인 CEO라 하더라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시대가 됐습니다.
과거 경영진일수록 고급 정보가 많았다면 요즘은 반대로 고급 정보가 현장에 있습니다. 당연히 각 분야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더 전문성이 뛰어나죠. 그런데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협조를 끌어내려면 투명성과 솔선수범이 필수입니다. CEO 개인의 이익과 조직의 이익이 상충할 때 개인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조직의 이익을 추구할 때 리더십이 강화됩니다.
또 자기 회사만 생각하기보다 전체를 조망하는 CEO가 요구된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주주 이익만 극대화하는 경영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주주를 비롯해 구성원, 투자자, 고객 나아가 우리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해관계자를 아우르는 경영을 해야 존경받는 기업이 됩니다.
이병철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서 삼성에 대한 바람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특히 세계 최대의 전자회사가 된 삼성전자에 필요한 것이, 안 교수는 무엇이라고 봅니까?
안철수 상생정신 같습니다. 과거에야 앞만 보고 달려갈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회사, 가장 존경받는 기업이 됐습니다. 그런 만큼 주주뿐 아니라 시선을 주위로 돌려 협력관계에 있는 중소기업 등 이해관계자, 나아가 우리나라 전체를 바라보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봅니다.
단적으로 삼성 정도 되면 불공정거래로 벌금을 무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외국의 존경받는 기업들처럼, 삼성전자라면 해당 지역 사회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고 사람들이 잘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 과정에서 부닥치는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이를 풀어 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우리 사회에 이 문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반기업 정서도 잦아들 겁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인천시 “태어나는 모든 아동에게 1억 준다”…출생아 증가율 1위 등극
2경기둔화 우려에 ‘금리 인하’ 효과 ‘반짝’…반도체 제재 우려↑
3얼어붙은 부동산 시장…기준금리 인하에도 한동안 ‘겨울바람’ 전망
4연간 1000억? 영풍 환경개선 투자비 논란 커져
5 야당, '예산 감액안' 예결위 예산소위서 강행 처리
6‘시총 2800억’ 현대차증권, 2000억원 유증…주가 폭락에 뿔난 주주들
7삼성카드, 대표이사에 김이태 삼성벤처투자 사장 추천
8업비트, 투자자보호센터 서포터즈 '업투' 3기 수료식 개최
9빗썸, 원화계좌 개설 및 연동 서비스 전면 개선 기념 이벤트…최대 4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