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의 정치학
축구의 정치학
남아공 기자들은 대체로 혐오하는 눈길로 월드컵을 맞았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독자의 관심을 끌기 어려운 정치나 스캔들 기사가 하찮은 경기 중계와 외국 스포츠 기자들이 쏟아내는 보도 속에 묻혀버릴 게 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개막 며칠 전 남아공 기자들은 요하네스버그에서 점심을 함께한 자리에서 월드컵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그러다가 한 기자가 자신도 축구에 관해 쓸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동료 기자가 “은유적인 의미에서 쓴다는 얘기겠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기자는 축구 자체를 의미했다. 드리블, 크로스 패스, 골 등 진정한 ‘오랜 세계 역사적인 문제’ 말이다. 하지만 그의 동료가 좀 더 선견지명이 있었다.
결국 남아공 월드컵은 ‘은유로서의 축구’ 월드컵이 돼버렸다. 특정 국가대표팀의 드리블, 크로스 패스, 득점이 해당 국가의 정치 상황, 국가 분위기, 또는 미래의 향방을 반영한다는 논평이 쏟아졌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의 패배는 ‘늙은 유럽(Old Europe)’의 쇠퇴를 상징하고, 가나의 승리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경제적 열망을 상징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범주의 오류(category error)’다. 가장 잘생긴 사람이 가장 똑똑하다는 가정이 잘못됐듯이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잘하는 국가들이 축구 외의 문제에서도 능력이 출중하다는 생각 역시 잘못이다. 이런 식의 ‘범주 오류’ 발상은 올해 남아공에서 시작됐다.
사실 처음에는 비합리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남아공은 월드컵 개최 준비 과정에서 많은 우려를 자아냈기 때문이다. 인종차별 정책을 철폐한 지 15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제대로 대회를 치러낼까? 음푸말랑가 등 스캔들로 얼룩진 지방정부가 경기장을 제시간에 맞춰 완공할까?
국가적인 재앙인 범죄를 억제할 수 있을까? 흑인과 백인 축구팬들이 나란히 앉아 경기를 관람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러나 월드컵이 개막되면서 축구를 국가의 다른 현실적인 문제와 연결하려는 시도가 대회 준비에서 남아공팀의 경기 실적으로 옮겨갔다. ‘바파나 바파나’(남아공 축구 국가대표팀의 애칭)가 멕시코팀과 맞선 첫 경기가 열리던 날 조간 신문들은 “만델라를 생각해서라도 꼭 이겨야 한다”고 외쳤다.
경기의 승리가 흑인 해방 후 남아공 사회를 화해시킨 만델라의 업적을 추인이라도 해주듯 말이다(1 대 1로 비겼다). 그렇다면 우루과이전에서 3 대 0으로 패한 사실은 남아공 사람들이 만델라의 기준에 못 미쳤다는 식으로 해석된다. 한 신문이 지적했듯이 ‘자신감이 충만할 때는 번성하다가 역경이 닥치면 곧바로 시들어버리는’ 경향을 가리킨다.
우루과이전에서 불안한 경기 운영이 남아공이 현재 겪는 성장통과 사회통합의 결여를 상징했다면 조별 리그 마지막인 프랑스전의 승리(2 대 1)는 남아공의 미래를 낙관하는 점괘로 간주됐다. 남아공 집권여당의 청년조직은 공식 성명을 통해 이렇게 주장했다.
“남아공 국민이라면 바파나 바파나의 성원이 곧바로 국가 자체, 그리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국가의 능력을 지지하는 마음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한 축구팬은 한 언론사 인터뷰에서 “바파나 바파나가 바로 우리!”라고 말했다. 프랑스인들이라면 자신들을 ‘레 블뢰’(Les Bleus: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라고 생각하지 않을 듯하다.
팀 내부의 갈등과 선수들의 스트라이크, 패배라는 진부한 자중지란의 멜로드라마를 연출하며 허무하게 침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 블뢰 역시 국가로서의 프랑스에 끊임없이 비유됐다. 선수들의 파업을 보라. 그 얼마나 프랑스다운가! 더구나 프랑스 국가대표팀의 붕괴는 프랑스 사회의 임박한 인종적 붕괴를 예시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뉴욕타임스는 그 문제 하나에 한 기사 전체를 할애했다. 기사에 인용된 한 프랑스 철학자는 선수들의 행동이 파리 주변 빈민가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북아프리카 출신 청소년들의 행동을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부총재 마린 르팽은 다인종으로 구성된 월드컵 프랑스팀이 “마치 개인인 듯 행동했다”고 말했다.
프랑스가 다문화 국가의 정체성을 구축하기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한편 미국인들은 자국의 월드컵팀이 미국의 정체성을 구원했다며 반색했다. 알제리전에서 경기 종료 직전 터진 랜든 도노번의 기적 같은 골은 실제로 기막혔을 뿐 아니라 기막히게 미국적인 일로 간주됐다.
미국인들의 복원력, 성실성, 그리고 실제론 능력이 없다고 해도 인내로 극복이 가능하다고 믿는 불굴의 철학을 반영한다는 뜻이었다. 뉴욕 데일리 뉴스는 “랜든 도노번은 미국의 정신을 구현하는 승리의 골을 성공시켰다”고 외쳤다. 뉴욕포스트지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미국은 해결책을 찾는다”고 선언했다.
정치잡지 뉴 리퍼블릭지에서 일하는 나의 옛 동료 프랭클린 포어는 미국팀의 ‘무모함’이 ‘미국 공공외교의 효과적인 수단’이라고까지 말했다. 그 다음 가나전에서 미국이 2 대 1로 패하자 미국인들은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라며 황당해 했다.
포어는 그 경기는 축구의 ‘버락 오바마 순간(Barack Obama Moment: 예상 밖으로 거의 무명에서 최초의 미국 흑인 대통령이 된 상황을 의미한다)’이 돼야 마땅했다며 개탄했다. 결승골을 넣은 가나의 아사모아 기안은 미국인들에게 멕시코만 원유유출 사고를 낸 시추선 딥워터 호라이즌의 월드컵판이 된 듯하다.
미국의 패배는 가나팀이 더 잘했기 때문이지 ‘버락 오바마 순간’의 전반적인 허약함이 지난 한 해 동안 드러난 결과가 아니다. 지금은 월드컵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려는 놀이가 분명히 재미있다. 월드컵은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벌어지는 국가들 간의 경쟁이다. 각 나라 자체는 현실이지만 그들이 서로 우승하려는 치열한 다툼은 종종 현실과는 다른 결말로 이어진다.
오직 한 국가만이 우승한다. 따라서 그 마지막 결과가 승리팀의 감독만이 아니라 국가의 문화 전체와 철학까지 정당화한다고 생각하고픈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 그러나 그런 은유와 유추에는 명확히 한계가 있다. 프랑스를 보라. 12년 전 프랑스팀은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을 3대 0으로 격파하고 FIFA컵을 거머쥐었다.
프랑스팀의 우승은 다문화주의의 성공 사례로 간주됐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수 세대에 걸친 이민자들이 프랑스에 재능, 신체적 강건함, 두뇌의 풍부한 유입을 가져왔다는 증거”라고 논평했다. 한 정치인은 프랑스팀이 국민에게 ‘사회 통합의 교훈’을 가르치는 ‘비밀 임무’를 완수했다고 격찬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이 그리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4년 뒤 프랑스 대선에서 유권자들은 이민에 반대하는 극우 정치인 장-마리 르팽(마린 르팽의 부친)을 2위로 지지했다. 스위스는 어떤가? 조별 리그 스페인전에서 1대 0으로 승리한 스위스팀은 스페인팀보다 인종적으로 더 다양하다. 터키, 알바니아, 콩코, 카보베르데(아프리카 서쪽의 섬나라) 출신도 있다.
하지만 스위스는 지난해 국민투표에서 이슬람 사원 첨탑의 건설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아무튼 월드컵 국가대표팀에 지나친 의미 부여는 어리석을 뿐 아니라 위험할지도 모른다. 프랑스는 국가 정체성 위기를 겪을 필요가 전혀 없다. 특히 선수와 감독 사이의 불화 같은 하찮은 일로 그런 위기를 겪을 이유는 더더욱 없다.
이곳 남아공에서 축구팀을 향한 불만이 국가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불만으로 비화하는 경우를 적잖이 목격했다. 바파나 바파나는 23명의 남자일 뿐이다. 결코 그들이 ‘국가의 영혼’은 아니다. 7월 3일 요하네스버그에서 가나-우루과이전이 열렸다. 8강에 오른 유일한 아프리카 국가로서 가나팀은 ‘공공연한’ 비밀 임무를 떠맡았다.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부상을 입증하는 임무였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내가 아는 남아공 사람 대다수는 가나를 응원했다. 공격수 아사모아 기안의 현란한 발놀림을 숭배해서가 아니었다. 6월 27일엔 가나-미국전을 케이프 타운의 한 술집에서 남아공 친구 한 명과 TV로 지켜봤다. 그때 그에게 지도에서 가나의 수도 아크라가 어디 있는지 찾지도 못하면서 내 면전에서 어떻게 미국의 패배를 기뻐하느냐고 따졌다.
그는 “같은 아프리카인으로서 가나를 응원해야 마땅하다”며 흥분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독일팀을 응원해야 하지 않을까? 가나의 스타 선수였던 제롬 보아텡이 독일 국가대표팀의 수비수로 뛰지 않는가? 이번 월드컵에 굳이 은유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면 국경의 완전한 붕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그처럼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대표팀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독일팀을 응원하는 한 남아공 친구의 태도가 마음에 든다. 그가 독일을 응원하는 이유는 뭘까? 보아텡의 이력 때문일까? 베를린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니면 ‘독일의 정신’을 숭배하기 때문일까? 그는 웃으며 아니라고 말했다. 단지 독일팀의 전술과 기술이 멋지기 때문이란다.
[필자는 미국 언론인으로 세계 현안문제 연구소(Institute of Current World Affairs) 소속으로 남아공에 주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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