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형 세계 질서
21세기형 세계 질서
수 세기 동안 우리는 정치인들이 정한 국경을 표시하는 데 지도를 이용해 왔다. 그러나 이제 인류의 조직화 방식에 관한 우리의 관념 중 다수를 버릴 때가 됐는지도 모른다. 세계적으로 부족적 유대가 되살아나면서 글로벌 연합이 더 복잡해져간다. 한때 외교로 국경이 정해졌지만 지금은 역사·인종·민족·종교·문화에 따라 인류의 역동적인 합종연횡이 이뤄진다.
세계주의적인 지도층은 광범위한 개념(녹색, 사회주의, 또는 시장자본주의 이념)에 열광할지 몰라도 대다수 일반인은 대체로 그런 문제에 관심이 없다. 대신 ‘부족(tribe)’에 어떤 보편적인 이념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가 주어진다. 아랍의 위대한 역사가 이븐 할둔의 말마따나 “집단의식으로 뭉친 부족만이 사막에서 살아남는다.”
부족적 유대는 역사만큼이나 오래됐지만 정치적 격변과 세계화로 그 영향이 확대돼 간다. 냉전종식과 함께 세계의 새 판도가 짜이기 시작했다. 미국이나 소련과 동맹을 맺은 별개 진영들을 분류하는 지도가 별안간 무의미해졌다. 더욱 최근 들어서는 단합된 제3세계 진영의 개념이 중국과 인도의 부상으로 대체됐다. 그리고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국가 같은 더 새로운 개념은 이들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크게 다르다는 사실로 인해 근거가 약화됐다.
이 새로운 세계의 국경은 가변적이어서 시간이 지나면서 바뀔 가능성이 있다. 일부 지역은 대분류 항목에 제대로 들어맞지 않아(프랑스 같은 특이한 곳이 대표적) 독자국가(Stand-Alones)로 분류하기로 했다. 그리고 런던이나 싱가포르처럼 르네상스 시대 위대한 도시국가의 계승자들도 있다. 이들 모두를 하나로 묶는 요인은 지리가 아니라 동질적 특성을 지닌 유대감이다.
1. 신(新)한자동맹덴마크, 핀란드, 독일,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13세기 한자동맹이라는 북유럽 지역의 연합은 역사가 페르난드 브라우델이 말하는 이른바 “무역에 의한 단일 문명”을 낳았다. 요즘의 한층 확대된 신한자동맹은 게르만 민족의 문화적 뿌리를 공유하며 선진국뿐 아니라 러시아·중국·인도의 신흥시장에 고부가가치 제품을 판매하는 방식으로 틈새를 찾았다. 탄탄한 복지제도로 널리 부러움을 사는 이들 국가의 대부분은 근년 들어 경제를 자유화했다. 이들은 레거텀 번영지수의 상위 8개국 중 여섯 자리를 차지하며 일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저축률(25% 이상)뿐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고용, 교육, 기술혁신을 자랑한다.
2. 국경지역벨기에, 체코 공화국, 에스토니아, 헝가리,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영국
이들 국가는 새로운 부족세계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찾을 방안을 모색한다. 루마니아와 벨기에 등 이들 중 다수는 잡탕 문화다. 변동이 심한 편이어서 한때 ‘켈트의 호랑이’로 불렸던 아일랜드가 경제파탄에 이르기도 했다. 과거 이들 국가는 막강한 이웃나라 군대에 짓밟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앞으로 경쟁적인 영향권에 맞서 자치권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3. 올리브 공화국불가리아, 크로아티아, 그리스, 이탈리아,
코소보,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포르투갈, 슬로베니아, 스페인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뿌리를 둔 이들 올리브와 포도주 산지는 거의 모든 항목에서 북구 국가들에 뒤진다. 빈곤율은 두 배 가까이 높고 노동 참여율은 10~20% 낮다.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하는 거의 모든 올리브 공화국이 대다수 한자동맹 국가에 비해 막대한 정부부채를 안고 있다. 출산율도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이탈리아는 세계 최고령 인구 국가로 일본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4. 도시국가
• 런던 금융과 미디어 중심지이지만 이류국가의 세계 정상급 도시로 이해하는 편이 가장 적절할지 모른다.
• 파리 프랑스 국내총생산(GDP)의 25% 가까이를 담당하며 프랑스 글로벌 기업 중 다수가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런던만큼 중요하지는 않지만 가장 아름다운 이 도시를 필요로 하는 시장은 항상 존재한다.
• 싱가포르 갈수록 아시아가 주도하는 세계에서 태평양과 인도양 사이에 자리 잡은 이 나라 입지가 지상 최고일지 모른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항구, 높은 수준의 소득과 교육을 자랑하는 이 나라는 훌륭한 도시 성공 신화다.
• 텔아비브 민족주의적-종교적인 이스라엘의 상당지역이 경비가 삼엄한 국경지대지만 텔아비브는 경제가 번창하는 세속 도시다. 이스라엘 첨단기술 수출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며 1인당 국민소득이 전국 평균보다 50%나 높다고 추산되며 이스라엘의 억만장자 9명 중 4명이 텔아비브 또는 그 교외지역에 거주한다.
5. 북미동맹캐나다, 미국
이들 두 나라는 경제, 인구구성, 문화 측면에서 밀착 관계에 있다. 각자 서로의 최대 교역 파트너 역할을 한다. 이 방대한 지역의 쇠퇴는 불가피한 운명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지만 적어도 지금으로선 틀린 말이다. 북미는 뉴욕을 중심으로 하는 다수의 세계 정상급 도시, 세계 최대 첨단기술 경제, 최대 농업 생산, 유럽이나 아시아의 네 배에 달하는 1인당 수자원을 자랑한다.
6. 자유주의국가 칠레,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멕시코, 페루
이들 국가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본보기다. 여전히 낮은 가구소득과 높은 빈곤율에 허덕이지만 중국 같은 고도성장 경제의 대열에 합류하려 애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지역의 지배적인 경제강국인 미국과의 관계단절론은 이 중 몇몇 국가에는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특히 지리적·인종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멕시코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들 경제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이들은 더 국가지향적이 될까, 아니면 자유경제를 추구할까?
7. 볼리바르 공화국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쿠바, 에콰도르,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주도 아래 라틴 아메리카의 상당 지역이 독재정치로 회귀하면서 역사적으로 미국과 자본주의에 반감을 품은 페론주의의 양상을 따른다. 차베스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은 대체로 가난하다. 볼리비아의 경우 빈민의 비율이 60%를 웃돈다. 반미의식이 강하고 광물자원과 에너지가 풍부한 이들 나라는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강대국들이 탐낼 만한 표적이다.
8. 독자 국가
• 브라질 남미 최대 경제인 브라질은 볼리바르 국가들과 중남미 지역 자유주의 공화국들의 중간지대에 걸쳐 있다. 심해 석유 등의 자원과 경제력 덕분에 북미, 인도권, 중국에 이어 2류 초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특히 범죄와 빈곤 등 커다란 사회문제가 뿌리 깊다. 브라질은 최근 북미의 품에서 벗어나 대표적으로 중국과 이란 등의 새로운 우방에 손을 뻗었다.
• 프랑스 프랑스는 변함없이 앞서가는 고급문화를 지닌 국가로 앵글로-아메리칸 문화에 저항하고 유럽연합(EU)의 줄어드는 영향력을 유지하려 애쓴다. 더는 대국이 아니며 올리브 공화국보다는 영향력이 크지만 한자동맹만큼 강하지는 않다.
• 인도 인도는 세계 최고의 고도성장 경제로 꼽혔지만 가구소득은 여전히 중국보다 3분의 1가량 낮다. 13억 인구 중 최소 25%가 빈곤 속에서 허덕이며 특히 뭄바이·콜카타 등 성장 중인 대도시에는 세계 최대의 빈민가 일부가 자리 잡았다. 그러나 또한 자동차 제조로부터 소프트웨어 생산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발전해 나간다.
• 일본 금융자원과 뛰어난 공학기술을 갖춘 일본은 변함없이 세계 강국이다. 그러나 중국에 세계 2위 경제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부분적으로 이민억제 정책 때문에 2050년에는 60세 이상의 고령자가 전체 인구의 35%를 웃돌 가능성이 있다. 한편 일본의 기술적 우위가 한국, 중국, 인도, 미국에 잠식당하는 추세다.
• 한국 한국은 진정한 기술 강국이 됐다. 40년 전 한국의 1인당 소득은 가나와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지금은 그 15배에 이르며 한국의 평균 가구소득은 일본과 얼추 비슷하다. 글로벌 불황으로부터 솜씨 좋게 벗어났지만 팽창하는 중국의 엔진 속으로 빨려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 스위스 본질적으로 해상 항로가 아닌 전자송금과 항공기로 세계에 연결된 도시 국가다. 번영, 풍부한 수자원, 뛰어난 경제환경을 향유한다.
9. 러시아 제국아르메니아, 벨라루스, 몰도바, 러시아 연방, 우크라이나
러시아는 막대한 천연자원, 상당한 과학기술 능력, 막강한 군대를 보유한다. 중국이 강대해지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그루지야,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키우려 애쓴다. 과거의 차르 왕조와 마찬가지로 신러시아 제국은 러시아의 슬라브계 정체성의 강한 유대에 의지한다. 러시아 슬라브계는 러시아 1억4000만 인구 중 80%가량을 차지하는 민족집단이다. 가계소득 측면에서 중간 수준(이탈리아의 절반가량)이며 또한 인구 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된다.
10. 동부 황무지아프가니스탄,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파키스탄, 타지키스탄
세계의 이 지역은 중국, 인도, 터키, 러시아, 북미 등 경쟁 지역 간 분쟁의 중심지로 남을 듯하다.
11. 이란권바레인, 가자지구, 이란,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풍부한 석유자원, 비교적 높은 교육수준, 터키와 엇비슷한 규모의 경제를 가진 이란은 떠오르는 초강대국이 될 만하다. 그러나 극단적인 이념 탓에 서방 국가들뿐 아니라 아랍권과도 충돌하며 영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부실한 경제운용으로 이 지역은 소비재, 첨단기술 장비, 식품, 심지어 정유 제품의 순수입국으로 전락했다.
12. 아랍권이집트, 요르단, 쿠웨이트, 팔레스타인 영토, 사우디 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예멘
석유자원 덕분에 이 지역이 정치와 금융의 중심이 됐다. 하지만 사우디나 아랍에미리트 같은 페르시아만 국가들과 더 가난한 국가들 사이에 커다란 골이 있다. 아부다비의 1인당 소득은 어림잡아 4만 달러지만 예멘의 경우는 그 수치의 5%에 불과하다. 강한 문화적 유대(종교와 인종)가 이 지역을 결집시키지만 다른 세계와의 관계에는 문제가 많다.
13. 신(新)오스만족터키,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터키는 부족으로 복귀하는 현재의 추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나라는 유럽 쪽에서 눈길을 거두고 동쪽으로 다가선다. EU와의 유대가 경제의 연결고리로 남아 있지만 터키는 중동에서 옛 오스만의 유산과 중앙아시아의 동포 쪽으로 경제·외교정책의 방향을 틀었다. 러시아나 중국과의 무역도 증가세에 있다.
14. 남아프리카 제국보츠와나, 레소토, 나미비아, 남아공, 스와질란드, 짐바브웨
남아공 경제는 아프리카에서 단연 최대 규모며 가장 다각화됐다. 좋은 인프라, 광물 자원, 비옥한 땅, 탄탄한 산업기반을 갖췄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로 아프리카의 기준으론 비교적 부유하다. 역시 기본적으로 기독교 국가인 이웃 레소토, 보츠와나, 나미비아와 문화적 유대가 강하다.
15.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앙골라, 카메룬,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콩고-킨샤사, 에티오피아, 가나, 케냐, 라이베리아, 말라위, 말리, 모잠비크, 나이지리아, 세네갈, 시에라리온, 수단, 탄자니아, 토고, 우간다, 잠비아
주로 영국이나 프랑스의 옛 식민지였던 이들 나라는 무슬림과 기독교도, 프랑스어 사용자와 영어 사용자로 분리되며, 문화적 응집력이 약하다. 천연자원은 풍부하지만 70~80%에 이르는 빈곤율 탓에 중국, 인도, 북미 같은 돈 많은 나라들이 이 지역을 이용하려 달려들 게 거의 확실하다.
16. 마그레브 벨트알제리, 리비아, 모리타니, 모로코, 튀니지
지중해의 아프리카 해안에 뻗어 있는 이 지역에선 리비아와 튀니지 같은 비교적 부유한 국가에서 발전의 싹이 보인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빈곤이 상당히 집중된 지역이다.
17. 중화권중국, 홍콩, 대만
국제통화기금(IMF)이 최근 예견했듯이 중국이 10여 년 내에 국내총생산(GDP) 면에서 미국을 추월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국이 세계의 신흥 초강대국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민족적 단결력과 역사적 우월감이 하늘을 찌른다. 중국 한족이 전체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세계 유일의 최대 민족-문화 집단을 이룬다. 이 같은 민족·문화적 응집력 탓에 이 거대 시장에 침투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을 많은 외국 기업이 깨닫는다. 중국의 확대되는 자원수요는 아프리카, 볼리바르 공화국, 그리고 ‘동부 황무지’에서 경제팽창 정책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중국의 문제는 수두룩하다.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인 정권, 확대되는 빈부격차, 환경악화 등이 대표적이다. 인구 고령화도 급속도로 진행돼 향후 30년에 걸친 주요 문제로 떠오른다.
18. 고무 벨트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베트남
이들 국가는 광물, 수자원, 고무, 각종 식료품이 풍부하지만 크고 작은 정치 불안정에 시달린다. 모두 공업화와 경제 다변화를 추진한다. 말레이시아를 제외하곤 가계소득이 비교적 낮은 편이지만 이들이 다음 고성장 지역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있다.
19. 행운의 국가호주, 뉴질랜드
경제의 다변화 정도가 크게 떨어지지만 가계소득은 북미와 비슷하다. 이민과 공통의 앵글로-색슨 혈통 덕분에 북미 및 영국과 문화적 유대를 형성한다. 그러나 입지와 원자재 기반 경제 탓에 앞으로는 중국이, 어쩌면 인도가 주요 통상 파트너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
[필자는 캘리포니아주의 오렌지 카운티 채프먼대 연구원이며 런던에 있는 레거텀 연구소의 비상근 연구원이다. 이 기사의 리서치 자료는 레거텀이 제공했다.]
번역·차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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