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RT 피자’ 놓고 벌어진 이념 소비 논쟁
'E-MART 피자’ 놓고 벌어진 이념 소비 논쟁
"소비를 이념적으로 하시는군요?”
지난 9월 중순 중소 피자가게를 몰락시키는 이마트의 즉 석피자 판매를 중단하라는 한 트위터리안의 요구를 접하고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이렇게 응수했다. 국내 1호이자 최대 할인점인 이마트는 신세계 계열사다. 이마트가 지난 7월 말 팔기 시작한 피자는 역시 신세계 계열사인 조선호텔베이커리가 입점해 만든다. 지름이 45㎝로 유명 피자 전문점의 일반적 피자 사이즈보다 12㎝나 길지만 가격은 1만5000원으로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사서 먹을 수 있는 공간도 갖추지 않은 채 테이크아웃 판매만 하는 데도 폭발적 인기를 누리는 비결이다. 한 트위터러는 10월 17일 오전 트위터에 “이마트에서 파는 초대형(?) 피자를 40분이나 기다려 겨우 사왔다”고 글을 올렸다.정 부회장은 “(어느 피자를 소비하느냐는) 고객의 선택에 달렸고, 많은 소비자가 재래시장을 이용하면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최종 소비자가 좋은 상품을 싸고 손쉽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유통업의 사명”이라고 덧붙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소비를 실질적 소비와 이념적 소비로 구분했다.
이념적 소비에 대해서는 이런 유통업의 사명을 부정하는 소비라고 설명했다. 값싸고 이용하기 편리한 제품을 외면하고 명분에 이끌려 그렇지 않은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이념적 소비라는 이야기다.
조국 교수 ‘착한 소비에 나서라’정 부회장의 이런 입장에 대해 9월 말 진보 진영의 대표적 논객 가운데 한 사람인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신문 칼럼을 통해 반박했다."국가와 시민이 정용진에게 답하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조 교수는 "시민이 정 부회장이 비웃는‘이념적 소비’를 보란 듯이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이 재래시장, 동네 상점, 동네 카페, 지역생산자조합이 만든 ‘로컬 푸드’ 등을 외면하고 대기업 백화점, 기업형 수퍼마켓, 대기업 소유 프랜차이즈 카페, 대기업 생산 음식 등을 향해서만 달려갈 경우 대기업은 영역 확장을 위한 ‘무한도전’을 계속할 것이고, 자본력과 유통망이 취약한 중소상인은 계속 몰락할 것이다. 시민은 눈물을 머금고 가게 문을 닫는 이웃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미래일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중략) 가격과 편리함을 유일 잣대로 삼지 않는 ‘착한 소비’가 필요한 시간이다.”
이념적 소비라는 개념 규정은 정 부회장의 의도를 떠나 진보 진영을 자극했다. 이념적이라는 수식어가 우리 사회가 채 극복하지 못한 레드 콤플렉스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이번엔 조 교수의 글을 읽은 보수주의 논객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장이 다음날 자신의 블로그에 반박 글을 올렸다. 공 소장은 소비 행위를 윤리적 소비와 비윤리적 소비, 또는 이념적 소비와 비이념적 소비로 구분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주장했다. 소비는 그냥 소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착한 소비를 하라는 권고는 그다지 호소력이 없다고 지적하고 이렇게 반문했다.
“그러면 내가 이마트에 가 물건을 사는 것은 착한 소비가 아니고 나쁜 소비인가?” 그는 “가격과 편리함처럼 소비자에게 귀중한 판단 기준이 있을까요?”라고 묻고는 이렇게 스스로 답했다.“개중에는 대기업 상품 대신 다른 것을 사겠다는 판단 기준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소비자에게 가격과 편리함을 넘어 경제적 약자의 것을 사야 한다고 권하는 것은 지나치게 '지사적인’ 태도라고 봅니다.”
시민사회에 ‘착한 소비’를 제안한 조 교수의 태도에 대해 지나치게 지사적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소비자는 우국지사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착한 소비가 다시 ‘지사적 소비’로 변주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일반 시민이 경제활동을 할 때 들이대는 이중잣대를 꼬집는 조 교수의 태도는 다분히 지사적인 것이 사실이다. 위의 칼럼에서 그는 이를 모순이라고 규정했다.
“시민은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에 대기업이 ‘문어발’을 뻗으면 화를 내면서 다른 분야에 진출한 대기업의 상품과 서비스는 ‘싸고 질 좋다’며 애용하는 모순을 종종 드러낸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에서, 대기업의 문어발식 영토 확장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급여가 높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대기업에 취업하려고 하는 것은 과연 모순일까? 편법을 동원해 가면서 까지 성적이 우수한 지원자를 과점하는 명문대의 행태에 목소리를 높이고도 부모로서 취업률이 높은 명문대에 자식을 진학시키려고 하는 건 이중적이라고 비판 받아야 하나? 아니 이 복잡다기한 세상을 단일 잣대로 살아가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어쩌면 인간은 본래 모순적 존재가 아닐까?
조 교수 말마따나 “눈물을 머금고 가게 문을 닫는 이웃의 모습이 바로 나 자신의 미래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될때 시민들의 태도는 달라질 것이다. <88만원 세대>의 저자이기도 한 좌파 경제학자 우석훈 2.1연구소장은 이념적 소비 논란의 와중에 한 인터넷 매체에 실은 칼럼을 통해 소비자 쪽에서도 미세하지만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가 속속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착한 소비 vs 지사적 소비
“제3세계 생산자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득을 주고 싶다는 ‘공정무역’,대기업의 횡포를 견제하겠다는 ‘윤리적 소비’, 심지어 관광지 주민과 생태계에 되도록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책임관광’ 등 소위 ‘싼 것이 최고’라는 소비자에서 ‘현명한 소비자’ 아니면 ‘착한 소비자’ 등 사회적 주체로 소비자가 점점 자신의 위상을 전환시키는 것이 21세기의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관찰한 것이다.”
이런 변화가 남의 일이 아니라며 그는 신세계를 직격한다. 국내에도 주체적 소비를 하는 현명한 소비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이마트 피자 사건’은, 신세계라는 회사가 너무 옛날 방식으로 ‘박리다매’ 그리고 ‘문어발식 독점’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한국 국민도 이미 1970~80년대 저개발 국가시절의 그 국민이 아니다. 국제 사회에서 한국이 어떤 책임감을 갖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고,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떤 식의 소비를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소비자들도 이미 등장했다.” 파리10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우 소장은 파리의 경우 시내에 대형 할인매장이 들어올 수 없다고 소개했다.
“대형 할인매장은 보통 지하철 종점이 있는 2존과 3존에 자리잡고 있다. 대형 할인매장이 시내로 들어오면 프랑스가 자랑하는 문화와 럭셔리 업종이 위험해질뿐더러 지역 경제가 붕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이 시내 1존에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
좌파 논객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은 그래서 시민에게 착한 소비를 촉구할 게 아니라 시장의 자유에 대한 경계심을 심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소비든 선택은 소비자 몫소비의 사전적 뜻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재화를 소모하는 일’이다. 재화를 공급하는 생산자는 소비자의 이런 욕구에 맞춰 물품 또는 서비스를 제공하게 마련이다. 유통상은 소비자의 욕구를 파악해 양자를 중개한다. 소비자의 가장 기초적 욕구 내지 원초적 욕망은 물론 해당 물품과 서비스를 싼 값에 편리하게 구매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낮은 가격과 높은 편의성이 구매의 유이한 동기는 아니다. 유통 약자에 대한 배려로 얻는 만족감 등 다른 보상이 경우에 따라 더 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평소 실질적 소비에 충실한 사람도 상황에 따라 이념적 소비를 할 때가 있다. 평소 가격 비교 사이트에 빠져 살지만 추운 겨울날 늦은 귀갓길에 나이 든 군고구마 장수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이렇듯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때로는 개인적 이익에 반해 불매운동을 하는 것이다. 이념적 소비라고 해서 합리적 동기를 갖추지 못한 것도 아니다.결국 선택은 소비자의 몫이다. 이념적 소비든, 개념 소비든,또는 착한 소비든 소비자가 하기로 마음먹으면 그런 소비가 일어나게 돼 있기 때문이다. 용어의 타당성을 떠나 실질적 소비가 무뇌적(無腦的)인 것이 아니듯 이념적 소비도 엄연한 소비자의 선택이다. 고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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