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누구 품에 안기나
현대건설 누구 품에 안기나
현대건설 인수전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입찰에 참여한 후보는 두 곳. 현대자동차그룹과 현대그룹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번 인수전은 현대가(家)의 형제 대결이라는 점에서 특히 관심을 끈다. 현대건설은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나라 대표 건설업체다. 세계 건설사에 굵직한 획을 많이 그었다. 또 현대가의 뿌리이자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여러 이유 때문에라도 현대차와 현대그룹은 승부를 피할 수 없다. 이번 인수전에서 양사는 전혀 다른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현대그룹은 감성에 호소하는 TV, 신문 광고를 통해 여론몰이에 나서고 있다.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을 등장시키는가 하면, 현대차에 대해선 ‘자동차나 열심히 하라’며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정주영 명예회장께서 유지를 남기셨다시피 현대가의 적통은 현대그룹이 물려 받았기 때문에 현대건설은 현대그룹이 인수해야 한다”며 “인수에 필요한 실탄도 충분히 확보한 상태”라고 밝혔다.
현대차그룹은 ‘실력’으로 보여주겠다는 태도다. 현대건설의 성장 가능성, 자동차·철강 분야와 건설의 시너지 효과, 풍부한 자금력, 그리고 인수에 성공한 기업을 성공적으로 발전시켜온 노하우를 내세우고 있다. 기업 인수 문제는 경제논리로 풀어야 인수 기업은 물론 피인수 기업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현대차는 2009년 생산 기준 세계 5위의 자동차 메이커다. 글로벌 기업으로 올라섰지만 성장 증가율은 점점 둔화되는 추세다. 세계 자동차 업계의 생산능력이 9000만 대 규모인 데 비해 수요는 약 6000만 대에 그치고 있는 까닭이다. 여기에 각국의 규제 강화와 원자재, 환율, 유가 변동폭이 커지고 있다. 그만큼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현대차는 자동차는 계속 영토를 확대해 나가되 현대건설 인수를 통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자동차에 집중되어 있는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해 지속성장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건설 인수에 나섰다”고 설명했다.
현대건설은 한국 해외 건설의 개척자다. 중동과 동남아에서 수십 년간 공사를 진행하며 네트워크와 노하우를 쌓았다. 글로벌 기업과 경쟁을 통해 기술력과 프로젝트 진행 능력도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른 명문 건설기업이다. 하지만 해외시장 수주가 중동 시장에 편중됐다는 단점이 있다. 현대건설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진출 국가를 다변화해야 한다. 제2, 제3의 중동을 찾아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현대차는 현대건설을 인수할 경우 이 같은 문제는 금세 해결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현대차는 세계 150여 개 국가 8000여 곳에 글로벌 생산설비와 판매거점을 확보하고 있다. 이 같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현대 건설이 신흥시장을 공략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브라질과 칠레가 좋은 예다. 이곳에서 현대차는 높은 시장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지역 인지도가 높은 현대차는 로컬 네트워크를 활용해 건설을 남미시장에 진입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현대차가 현대건설의 도움으로 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는 게 현대차의 주장이다. 예컨대 현대건설이 중동에 쌓아놓은 높은 인지도와 인맥, 네트워크를 활용해 현대차의 중동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다는 것. 실제로 파키스탄에 먼저 진출해 많은 공사를 진행한 대우건설 덕에 나중에 진출한 대우차는 수월하게 점유율을 높일 수 있었다.
현대차 관계자는 “단순히 건설회사를 인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키워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킬 장기 플랜과 자금력을 갖고 있다”며 “이를 위해 수년 전부터 건설 인수를 염두에 두고 조용히 전략을 세워왔다”고 밝혔다. 글로벌 자동차 기업의 화두는 친환경이다. 여기에는 전기차나 하이브리드 같은 친환경 차량뿐만 아니라 에너지 절감을 위한 도심 교통 시스템과 철도 교통의 확대까지 포함된다. 대
표적인 사례가 교통·건설·산업 분야가 망라된 스마터 시티(Smarter City) 프로젝트다. 스마터 시티는 그린 주택·빌딩, 친환경 교통수단, 친환경 플랜트를 포괄하는 미래 도시를 말한다.스마터 시티는 교통수단과 빌딩 등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 운영되는 구조다. 사람이 살고 움직이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효율적이고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운용하는 개념이다.미래 도시 프로젝트를 주도하기 위해서는 모든 시스템을 통합할 수 있는 기술적 이해와 역량이 필요하다. 현대건설 인수를 자동차 기업인 현대차가 중요하게 여기는 배경이다. 이미 일본 경쟁 브랜드인 도요타와 닛산은 친환경 주택과 전기차 개발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독일의 BMW도 스마터 시티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기선제압에 나섰다.
현대차 관계자는 “현대건설 인수는 차세대 자동차 개발은 물론 교통 환경까지 포함된 새로운 형태의 경쟁에서 현대차가 한발 앞서 나가는 데 필요한 과정”이라고 밝혔다. 외국 메이저 자동차 회사들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현대건설 인수는 필요하다는 얘기다.
지난 수년 사이 한국에서 이뤄진 대형 M&A 중 실패한 게 많다. 금호그룹의 대우건설 인수가 대표적인 사례다. 금호그룹은 인수 과정에서 자금 부족으로 재무적 투자자에 의존했다. 결국 풋백옵션 같은 불리한 약정에 발목이 잡혀 ‘본체’가 워크아웃 당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대건설 채권단은 후보들의 자금력과 경영 상태를 면밀히 따져볼 계획이다. 대우건설 사태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날 경우 국가경제가 흔들리는 것은 물론이고 채권단도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건설 인수액은 대략 4조원 정도로 추산된다. 현대그룹은 현대건설 인수를 위해 1조5000억~2조원가량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는 투자자를 모아 조달하겠다는 계산이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대상선 등 계열사의 현금 흐름이 좋고, 재무적 투자자도 확보한 만큼 현대건설 인수 자금을 마련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며 “자금 조달 문제는 더 이상 논쟁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현대차는 자금력이 채권단의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불완전한 재무상황이 인수 기업에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여러 사례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 자본이 들어올 경우 장기적 성장보다는 투자이익 극대화를 위한 단기적 성과에만 집착해 결국 대우건설처럼 나중에 껍데기만 남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대건설이 보유한 우수한 기술의 해외 유출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는 게 현대차의 지적이다.
그래서 현대건설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자금력과 글로벌 네트워크가 있는 비즈니스 파트너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현대차 관계자는 “현대건설 성장의 가속엔진이 돼 성장에 날개를 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누가 지속성장 기업으로 키우나 현대차는 M&A 기업을 우량기업으로 키워낸 경험이 있다는 점도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면서 기아자동차 M&A를 꼽았다. 실제 기아차는 대규모 적자에 시달리다 법정관리 신세가 됐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경영정상화에 최소 5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하지만 현대차는 인수 1년 만인 99년 1824억원의 흑자를 냈다. 기아차는 지난해 당기순이익 1조4500억원을 올리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카드업계 점유율 3%로 업계 최하위였던 현대카드도 현대차가 인수한 다음 우량 기업으로 변신했다. 현대카드는 현재 점유율 16.9%로 업계 2위에 올라섰다. 2004년 인수한 현대제철은 6조2300억원 규모의 과감한 투자를 통해 친환경 제철소로 재탄생했다. 현대제철의 경영이 정상화되며 당진군에는 매년 100개 이상의 새로운 기업이 생기고 있다. 유재환 정책금융공사 사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현대건설 매각과 관련해 “가격 이외에도 인수 주체의 자금 조달능력과 경영비전 등을 따져볼 것”이라며 “그래도 가격에 대한 부분이 3분의 2는 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정책금융공사는 현대건설 지분 11.13%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업계 관계자는 “채권단이 단순히 가격 중심으로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할 경우 제2의 대우건설, 쌍용차가 나올 수 있다”며 “그래서 가격뿐 아니라 재무적 건전성, 사업 역량 등의 요소를 심도 있게 고려해 기업과 국가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수자를 선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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