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vs 정유사, 전쟁이 시작됐다
공정위 vs 정유사, 전쟁이 시작됐다
5월 25일 오후 서울 서초동 공정거래위원회 6층 심판정. SK·GS칼텍스·현대오일뱅크·에쓰오일 등 4개 정유사의 담합 사건을 안건으로 전원회의가 열렸다.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이 안건 상정을 선언하면서 나란히 앉은 4대 정유사 관계자와 공정위 심사관 사이에선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심판정에는 국내 굴지의 로펌이 총출동했다. SK는 세종, GS칼텍스는 율촌, 현대오일뱅크는 태평양, 에쓰오일은 김&장이 각각 대리해 2~3명씩의 변호사를 대동했다. 공정위와 정유업계는 6시간 넘게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논리 싸움을 벌였다.
공정위는 5월 26일 이들 정유사가 ‘주유소 나눠 먹기’ 담합을 했다며 시정명령과 더불어 과징금 4348억원을 부과했다. 이날 공정위가 매긴 과징금 액수는 2009년 6개 LPG(액화천연가스) 업체의 가격 담합에 부과한 6689억원에 이어 역대 둘째 규모다. 업체별로는 SK 1379억원, GS칼텍스 1772억원, 현대오일뱅크 744억원, 에쓰오일 452억원 등이다. 에쓰오일을 제외한 3개사는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기로 했다. 공정거래위원회와 정유업계의 악연이 재연된 것이다.
공정위에 따르면 이들은 1993년 주유소 사이 거리 제한을 두는 규정이 폐지돼 주유소 확보 경쟁이 벌어지자 2000년 3월 ‘석유제품 유통질서 확립 대책반’ 모임을 갖고 경쟁을 제한하기로 합의했다.
역대 둘째 규모의 과징금 부과 정유사 상표를 뗀 이른바 ‘무폴 주유소’를 기존 정유사의 동의 없이 유치하지 말자는 이른바 ‘원적(原籍) 관리’가 주요 내용이다. 이에 따라 정유사들은 주유소 확보 경쟁을 중단했다. 불가피하게 다른 정유사의 주유소를 유치할 경우에는 정유사끼리 합의해 비슷한 규모의 다른 주유소를 넘겨주는 ‘트레이드(협의 교환)’를 하기도 했다. SK와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는 2001년 주유소 복수상표 표시제도가 도입되자 복수상표를 신청하는 주유소에 대해서는 기존 정유사의 상표를 철거하도록 했다. 여러 정유사와 거래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정유사의 담합으로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정유사별 주유소 점유율은 SK 36%에서 35.3%, GS 26.5%에서 26.8%, 현대오일뱅크 20.9%에서 18.7%, 에쓰오일 13.2%에서 14.7%로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공정거래위원회 신영선 시장감시국장은 “정유사들은 프로야구 구단이 선수를 관리하는 것처럼 다른 브랜드로 옮겨가지 못하게 막고 서로 확보한 주유소를 트레이드하면서 시장 점유율을 일정하게 유지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담합이 없었다면 정유사가 주유소를 확보하기 위해 좀 더 싸게 기름을 공급했을 것이고 결국 소비자 가격도 떨어졌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유사들은 ‘주유소 나눠 먹기’ 담합 발표에 반발하고 있다. SK와 에쓰오일은 “담합한 사실이 없으며 의결서를 받은 후 내용을 검토해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GS칼텍스 역시 “의결서를 보고 대응 방침을 정하겠다”고 말했다. 현대오일뱅크는 강한 톤으로 반박했다. 현대오일뱅크 관계자는 “특정 정유사의 전직 영업직원 개인 진술에 의존해 과징금을 부과한 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담합 사실이 없는 만큼 과징금 부과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사회정의를 실현한다는 차원에서 모든 법적 조치를 강구해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2000년 이후 시장 점유율 변화가 거의 없다는 공정거래위원회 주장도 조목조목 반박했다. 전국적으로 주유소가 급증하던 1990년대와 달리 2000년을 전후해선 각사가 어느 정도 주유소망을 갖춘 상태라 점유율이 안정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또 과점 상태에선 일반적으로 전면전을 피하게 마련인데 이때 나타나는 게 균형이란 설명이다. 현대오일뱅크 측 변호사는 “그래프를 보면 2000년대 들어 우리 측의 점유율이 눈에 띄게 떨어졌는데 시장 3위 업체가 점유율에서 크게 손해 보면서 선두업체와 담합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주장했다. 개별 연도나 구간으로 따지면 공정거래위원회 주장과 달리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는 주장도 나왔다. SK측 변호사는 “적어도 2004~2007년에는 서로 빼앗고 뺏기는 치열한 유치전이 벌어졌고, 설령 담합이 있었다고 해도 이때 깨졌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유사들은 강하게 반발하며 이의신청이나 소송을 제기할 방침이어서 법정 공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정유업계는 특히 공정거래위원회가 정부의 입맛에 맞는 결과를 내기 위해 무리수를 두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올 초 이명박 대통령의 “기름값이 묘하다”는 발언이 나온 후 곧바로 정유사에 대한 대규모 현장 조사에 착수했다. 애초 공정거래위원회는 정유사가 소비자 가격을 담합해 적정 수준이 넘는 초과 이윤을 얻었는지를 들여다봤지만 여의치 않자 원적지 관리라는 과거 영업관행 조사로 방향을 틀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은 5월 27일 “명확한 증거도 없이 엄청난 과징금을 부과했다고 하는데 정유사 원적지 관리와 관련된 담합에 대해 1년 넘게 세밀하게 조사해 구체적인 증거가 있다”고 강조했다.
과징금 4348억원을 둘러싼 공정거래위원회와 GS칼텍스를 제외한 정유사의 기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가장 많은 과징금이 부과된 GS칼텍스는 담합 사실을 인정하면 혜택을 주는 리니언시(자진신고자 감면제) 제도를 이용해 과징금을 면제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GS칼텍스가 서둘러 자진신고에 나선 건 2009년 12월의 LPG(액화석유가스) 담합사건의 학습효과로 보고 있다. 당시 SK에너지와 SK가스는 사전에 자진신고를 해서 과징금을 각각 100%와 50% 면제받았다.
공정위 패소율 높아 실효성 의문공정거래위원회가 법원에서 패소하는 사례가 많아 이번에도 솜방망이 제재로 끝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공정거래위원회 제재 조치가 법원에 제소됐을 때 부분 패소율이 30% 이상, 완전 패소율도 10%에 이르렀다. 정유사와 관련된 건만 해도 그랬다. 공정거래위원회는 1998~2000년 군납 유류 입찰 과정에서 담합한 정유사에 과징금 1901억원을 부과했지만 결국 1211억원으로 경감됐다. 2004년 4월 1일 이후 71일 동안 SK·GS칼텍스·에쓰오일·현대오일뱅크 등 4개사 담합에 대해 과징금 526억원을 부과했지만 에쓰오일이 행정소송을 제기해 고등법원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받았다.
재계에서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잇따른 패소는 아니면 말고 식으로 무리하게 제재 결정을 내리는 데 있다고 본다. 경쟁법 집행 경험이 선진국에 비해 많지 않아 법리해석에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특히 과징금 계산 근거가 되는 경쟁법 위반행위 기간과 매출액 등 산출에서 번번이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물론 ‘아니면 말고’로 끝나더라도 정유업계는 부담이다. 골드먼삭스는 5월 27일 “공정거래위원회의 결정은 한국 정유사에 리스크로 작용할 것”이라며 “특히 고유가가 2012년까지 지속될 것으로 전망돼 계속되는 인플레이션 압박이 이런 리스크를 키울 것”으로 봤다.
남승률 기자 namo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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