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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ity] The Hague 헤이그에선 감자를 바이올린 상자에 넣고 다닌다

[The City] The Hague 헤이그에선 감자를 바이올린 상자에 넣고 다닌다


허세와 속물근성의 역사 넘쳐나… 테니스클럽에 가입하려 조상의 혈통을 내세우기도
과거 헤이그는 도시라기보다 13세기 귀족들의 사냥 별장을 중심으로 발전한 마을에 가까웠다.



IAN BURUMA헤이그 사람들은 감자를 장바구니 대신 바이올린 상자에 넣어 다닌다는 오래된 농담이 있다. 자신의 세련됨을 자랑하려고 포장한다는 뜻이다. 헤이그 사람의 특징을 날카롭게 꼬집은 이 말에서 잘 드러나듯, 내 고향 헤이그는 참을 수 없는 속물 근성으로 악명이 높다.

그 이유를 알고 싶다면 우선 헤이그라는 도시의 특징을 유념해야 한다. 네덜란드의 문화・상업 중심지는 암스테르담이지만, 헤이그는 네덜란드 정치와 외교, 행정의 중심지다. 헤이그의 엘리트 스포츠클럽이나 신사 클럽에서는 아직도 ‘장사꾼’을 회원으로 받아주지 않는다. 헤이그에선 부자도 자수성가형은 별로 없다. 그보다는 저명한 조상들이 식민지, 정확히 말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지금의 인도네시아)에서 축적한 부를 엄청나게 긴 이름과 함께 물려받는 경우가 많다. 그게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렇게 보이고 싶어한다.

과거 헤이그는 도시라기보다 13세기 귀족들의 사냥 별장을 중심으로 발전한 마을에 가까웠다. 그러다가 네덜란드가 전성기를 누렸던 17세기에 헤이그는 “유럽 최강의 마을”로 부상했다. 안타깝게도 17세기 건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암스테르담에 더 많을 정도다.

헤이그의 장대한 건물은 대부분 18세기에 지어졌다. 가톨릭의 탄압에서 도망친 프랑스 위그노 교도들이 정착해서 지은 건물이다. 그래서인지 루이 16세 시절의 화려한 건축 양식이 많고, 상류층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 자신들끼리 대화할 때조차 프랑스어를 사용할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는 내가 유년기를 보낸 1950년대와 60년대에도 남아 있었다. 마치 프랑스 사람처럼 완벽하게 프랑스식으로 네덜란드어를 발음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른 사람이 못 알아들어도 개의치 않았다. 바로 그걸 노렸으니까.

환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도시인의 욕망은 건축 양식에서도 느껴진다. 베벌리힐스에 즐비한 신 바로크, 신 튜더, 신 르네상스 양식의 주택들을 보라. 전쟁 전 베를린의 모습을 재현한 비엔나, 파리와 런던, 시카고의 모습을 모방한 상하이 도심도 마찬가지다.

외양을 가꾸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외국 양식의 모방은 상류층의 전형적 특징이라 할 만하다. 다른 많은 속물 도시와 마찬가지로, 헤이그에도 부르주아 상류층에 대비되는 프롤레타리아가 있다. 축구 훌리건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관중이 바로 헤이그 출신이고, 헤이그 암흑가 또한 악랄함으로 유명하다. 노동자 거주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온 터키 이민자들이 그곳을 문명화할 정도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는 ‘숲의 북쪽’이라는 뜻을 지닌 베노르덴하우트다. 베노르덴하우트는 헤이그 상류층의 중심이라 할 만한 주거지다. 화창한 일요일 아침이면 마을에는 잔디에 물을 뿌리는 스프링클러 소리와 테니스 치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프랑스 양식 대신 영국식 분위기가 자리 잡았고, 여기에 미국적 느낌도 약간 가미되기 시작했다. 회원이 되려면 조부모의 혈통을 상세하게 읊어야 하는 테니스 클럽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 남자 어른이나 소년들은 영국식 블레이저를 입고 영국식 클럽 넥타이나 레지멘털(왼쪽 가슴에서 오른쪽 허리로 내려가는 사선 방향의 넥타이) 넥타이, 혹은 대학생 스타일 넥타이를 느슨하게 매고 다녔다. 타임스지를 블레이저 주머니에 꽂고 다니는 신사들도 있었다. 진짜 읽기보다는 남에게 보여주려는 용도였다.

다른 모든 도시나 특정 규모 이상의 마을과 마찬가지로 헤이그 또한 세월과 함께 발전했고, 지금은 현대적, 또는 최신식으로 지어진 고층 빌딩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1960년대 그곳에 살았던 나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래도 베노르덴하우트가 옛 모습을 간직해 기뻤다. 최근 그곳을 찾았을 때, 예전처럼 블레이저와 코듀로이, 캐시미어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래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곳도 있다니 조금은 위안이 됐다.

[필자의 근저로 ‘3개 대륙의 종교와 민주주의(Taming the Gods: Religion and Democracy on Three Continents)’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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