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po] 리모델링으로 달라진 서울 지하상가

회사원 최상희(30)씨는 1주일에 2번 영어회화를 배우기 위해 서울 강남역 부근의 학원을 찾는다. 지하철로 학원을 오갈 때마다 최씨의 눈길을 끄는 건 지하상가에 줄지어 들어선 여성의류 가게와 액세서리 가게다. 강남역 지하상가에서 신발과 머리핀 등을 구매했다는 최씨는 “지하상가가 리모델링 후 훨씬 깔끔하고 가게도 많아져 일반 쇼핑몰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강남역 지하상가는 11개월에 걸쳐 195억원을 들여 리모델링 공사를 한 후 7월에 다시 문을 열었다. 천장과 바닥을 새로 깐 건 물론 조명과 냉난방 설비도 모두 교체했다. 들쑥날쑥 꾸며져 있던 점포가 정돈되고 노후한 시설도 교체해 밝은 느낌을 준다.
상인 중심으로 리모델링 작업이곳에서 의류 상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모씨는 “손님들이 가게 물건까지 더 좋아 보인다고 말해 오랫동안 장사를 쉬면서 공사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지하철역 중 하나인 강남역은 오가는 승객만 하루 40만명에 이른다. 역에 따라 이용객 수가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지하철 승객을 잠재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는 지하상가는 다른 곳보다 ‘황금상권’으로 꼽힌다. 그러나 서울 시내 지하상가는 30여년 동안 대대적인 보수나 수리 없이 장사를 해온 까닭에 시설이 낙후돼 있다. 강남역·영등포역 지하상가가 최신 시설로 탈바꿈한 걸 계기로 다른 지하상가의 상인들도 시설을 개·보수해 고급 상권으로 거듭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지하상가는 지하철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1974년 지하철 1호선 개통을 시작으로 서울을 잇는 지하철 교통망이 형성되면서 지하도에서 지상으로 이어지는 공간이 생겼다. 당시 정부는 방공호로 활용하는 한편 도심의 교통 혼잡을 줄이고 상업용지도 확보하는 차원에서 지하도에 상가를 조성했다. 일부 시설은 서울시 재정으로 건설했지만, 자금이 부족했던 서울시가 조성 당시 건설회사 등 민자를 유치해 20년 후 서울시에 시설을 기부 채납하는 조건으로 일부 지하도를 건설하기도 했다. 지금은 기부채납 기간이 끝나 지하도상가 29개가 서울시 소유다.

서울시는 개별 점포 상인과 수의계약을 맺어 임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공개 경쟁입찰을 시행해 위탁관리 업체를 지정하는 방향으로 바꿀 방침이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관계자는 “위탁관리 업체가 입찰 때 내건 조건대로 개·보수를 하거나 편의시설을 설치해 노후한 시설을 개선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남역과 영등포역의 지하상가는 상인이 주주가 돼서 만든 주식회사인 강남역지하쇼핑센터와 영등포역쇼핑센터가 위탁 사업자로 선정돼 리모델링 공사를 마쳤다. 이들은 입찰 조건대로 리모델링 비용도 나눠 부담했다. 종각과 명동역, 시청광장, 을지로 등 도심의 지하상가도 최근 관리운영회사를 선정해 위탁 계약을 맺은 상태다.
여느 상권과 마찬가지로 같은 지하도상가에 있는 점포라고 해도 목에 따라 매출이 천지차이다. 유동인구가 많은 출입구 쪽에 위치한 상점일수록 손님 눈에 잘 띄게 마련이다. 시설관리공단도 목이 얼마나 좋은지를 고려하고 사업성을 평가해 임대료를 차등해 책정한다. 강남역의 경우 가장 사람이 많이 오가는 10, 11번(구 6,7번) 출구의 자리세가 가장 비싸다. 반면 과거 분수대가 있던 자리에 7년 전 새로 들어선 점포 임대료는 비교적 저렴하다.
그렇다고 출구에서 가까운 쪽에 마냥 손님이 몰리는 것도 아니다. 김진원 강남역쇼핑센터 대표는 “출구에 너무 가까우면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 가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상인들은 출구에서 약간 떨어져 중간쯤 위치한 가게에 손님 발길이 더 자주 멈춘다고 말한다. 가게가 가장 눈에 띄기 쉬운 장소는 지하도의 길과 길이 교차해 동서남북으로 이동하는 사람 모두가 지나게 되는 사거리 모퉁이다. 이런 모퉁이 중에서도 지하철 역에 가까운 곳일수록 사람의 발길이 잦다.
동대문 지하상가에서 침구전문점을 운영하는 박영수씨도 “가게가 입구와 가까울수록 꼭 좋은 건 아니다”라고 말한다. 동대문 지하상가는 한복과 침구, 수공예품 등 혼수 품목을 위주로 상권이 형성돼 있다. 즉흥적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게 아니라 큰 마음 먹고 좋은 물건을 고르려는 손님이 주로 찾다 보니 오히려 입구 쪽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은 드물다. 예전에는 혼수품을 장만하러 온 사람들이 발품을 팔아가며 물건을 비교했지만, 요즘은 인터넷 등을 통해 가게 정보를 미리 알고 오는 경우가 많아 목보다는 가게의 마케팅 능력이 중요해졌다.

지역 특성 따라 주력 제품 달라지하상가는 지역에 따라 상권의 업종이 뚜렷하게 나뉜다. 젊은 직장인과 대학생, 특히 여성의 출입이 잦은 강남역의 경우 여성의류, 신발 등의 패션 잡화가 주요 품목이다. 동대문 인근의 지하상가는 동대문 지상 상권을 찾아 온 손님을 잡기 위해 한복, 침구류, 식기 등 동대문과 동일한 품목을 주로 취급하고 있다.
일본 관광객 등 외국인 손님을 주로 대상으로 하는 명동 지하상가의 경우 해외에 비해 저렴한 가격을 내세운 안경점과 인삼 상품, 한국 특산 공예품 등을 판매한다. 전체 지하상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업종은 역시 여성 의류다. 상인들은 “초기 투자 비용이 적게 들고 손님도 별 고민 없이 쉽게 사는 상품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동대문처럼 한결같이 혼수 품목을 고집하는 상권이 있는 반면 유행에 따라 업종이 자주 바뀌는 상권도 있다. 강남역이 대표적이다. 2~3년 전까지 강남역에는 휴대전화 판매 대리점이 무려 50여 곳이나 있었다.
최근에는 대부분이 업종을 바꾸며 자취를 감췄다. 스마트폰 이용자가 많아지면서 휴대전화를 교체하는 수요가 부쩍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젊은 여성을 겨냥한 신발가게가 성황을 이루고 있다. 다른 품목을 취급하던 가게들까지 신발로 업종을 변경할 정도다.

초창기 강남역 지하상가에 가장 흔했던 가게는 귀금속을 판매하는 금은방이었다. 한때 10여개의 금은방이 들어설 정도였는데 금값이 오르자 가격을 감당 못한 영세한 상인들이 업종을 바꾸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후반에는 개당 2000~3000원 하는 머리끈을 파는 가게가 많았다. 잘되는 가게는 하루 400만원씩 매출을 올렸다고 한다. 김진원 대표는 “지하상가 중에서 가장 빠르게 트렌드가 바뀌는 곳이 강남역”이라며 “그러나 한 가게가 잘되면 너도 나도 같은 업종으로 바꾸는 현상은 상권의 다양성 측면에서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한다.
시설 개선을 위해 지하상가 상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최근 지하상가는 심각한 불경기를 겪고 있다. 명동의 한 상가 주인은 “서울시가 횡단보도를 지상에 만드는 바람에 손님이 너무 없어 빚을 내어 임대료를 내는 상황”이라고 불만을 나타냈다. 문제는 리모델링을 마친 지하상가도 손님이 줄어 울상이라는 점이다.
불법 재임대 등 문제도 여전

유동인구가 가장 많다는 강남역 지하 상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곳이 가장 북적이는 토요일 오후 2시쯤 10번 출구 근처 지하상가를 찾았다.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지만 가게에 들어가 물건값을 치르는 이는 드물었다. 새로 들어선 화장품 매장에도 잠시 시간을 보내려 구경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상인들은 “경기가 안 좋다지만 너무 손님이 없어 나날이 매출이 떨어진다”고 푸념했다. 한때 강남역 지하상가의 하루 매출은 2억 2000만 원으로 추산했다. 한 점포가 하루에 100만 원 가량을 올린다는 건데, 상인들은 “지금은 그 수준의 70%도 못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와중에 임대료는 올랐다. 서울시와 임대 계약을 새로 맺는 과정에서 그동안 주변 상권에 비해 저렴하게 책정돼 있던 임대료를 올린 것이다. 원래는 계약을 맺은 사람이 가게도 실제로 운영하도록 되어 있지만 월세를 실제보다 올려 다른 사람에게 다시 임대를 놓는 불법 재임대가 암암리에 만연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중간에 부동산 중개업자까지 끼어 임대료 거품을 키우고 있다. 최근 이를 비판한 언론보도가 잇따르자 상인들은 ‘불법 재임대는 임대차 계약 해지 조건’이라고 쓴 공문을 돌리며 자정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불경기에도 손님을 끌기 위한 상인들의 노력은 이어질 것이다. 상인들은 앞으로 지하상가 리모델링을 비롯한 시설 개선 작업과 더불어 상가별 특색을 살리는 마케팅을 활발하게 추진할 계획이다. 예컨대 명동역 지하상가는 외국인 관광코스에 상가 투어를 넣고, 종각역은 패션 아울렛 매장을 컨셉트로 잡는 등 상가 특화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박미소 이코노미스트 기자 smile8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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