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제일제당 햇반 - 집밥보다 좋은 맛으로 시장을 요리하다
CJ제일제당 햇반 - 집밥보다 좋은 맛으로 시장을 요리하다
이재현 CJ그룹 회장(당시 제일제당 기획관리부 부장)은 1989년 임원회의에서 깜짝 아이디어를 내놨다. “빵과 햄버거의 품질이 많이 개선됐습니다. 맛이 좋은 즉석밥을 이젠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집 밥보다 맛 좋은 즉석밥을 출시해 봅시다.” 그룹 안팎에서 논란이 일었다. ‘누가 즉석밥을 먹겠느냐’는 것이었다. 햇반 1기 개발팀의 팀원이었던 김상유 CJ제일제당 진천공장 공장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만 해도 ‘밥은 집사람이 짓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어요. 그래서 소비자가 즉석밥을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의견이 많았죠.”
이런 논란에도 이 회장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89년 즉석밥 개발팀이 구성됐다. 개발팀은 즉석밥의 첫번째 원료로 ‘알파미(건조쌀)’를 택했다. 당시로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뜨거운 물만 부으면 밥을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파미가 전투식량의 원료로 사용되는 이유다.
알파미 즉석밥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개발팀을 구성한 지 한 달여 만에 출시한 시제품은 ‘맛이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상유 공장장은 “알파미 특유의 푸석푸석함을 없애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개발팀은 두번째 원료로 ‘동결건조미’를 선택했다. 동결건조미는 밥을 얼린 뒤 다시 녹여 수분을 제거한 것이다. 회사의 기대도 컸다. 동결건조미 즉석밥을 출시하면 회사가 진행하던 즉석국 사업과 연계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이번에도 맛이 문제였다. 최동재 CJ제일제당 햇반팀장은 “스펀지를 씹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동결건조미 즉석밥의 식감은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개발팀의 즉석밥 프로젝트는 1994년까지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그 사이 천일식품 등 경쟁사가 냉동즉석밥을 시장에 내놨다. 식품업계 1위를 자부하던 CJ제일제당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개발팀은 즉석밥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어야 했다. 이들은 일본으로 눈을 돌렸다. 1980년 출시된 일본 즉석밥에서 힌트를 얻기 위해서였다. 개발팀 연구원들은 일본의 즉석밥 관련 논문을 모조리 훑어봤다. 이 과정에서 ‘무균포장’을 하면 맛 좋은 즉석밥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무균포장방식은 말 그대로 밥을 무균상태로 만들어 보관하는 것이다. 정효영 CJ식품연구소 곡류가공팀장은 “무균포장방식으로 즉석밥을 만들면 알파미·동결건조미처럼 원재료 단계에서 수분을 제거하지 않기 때문에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알파미·동결건조미 프로젝트 실패문제는 초기투자 비용이었다. 무균포장을 위해선 반도체 공장 수준의 ‘클린룸’을 만들어야 했다. 즉석밥 용기의 미생물을 제거하는 장비, 살균된 포장용 필름을 만드는 자외선 장비도 필요했다. 이런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만 100억원이 필요했다. 당연히 반대가 많았다. 초기투자 비용이 많이 드는 무균포장방식 대신 레토르트 밥을 출시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레토르트 식품은 밀봉 포장 후 열을 가해 멸균하는 방식으로 만든다. 즉석카레·즉석짜장이 대표적이다. CJ제일제당은 당시 레토르트 방식으로 짜장면·카레·미트볼을 생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CJ제일제당은 1996년 초 클린룸을 비롯한 무균포장설비 구축에 100억원 규모의 투자를 단행했다. 고가의 설비를 구축했다고 당장 품질 좋은 즉석밥을 만들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누구의 입맛에 맞춰 즉석밥을 만드느냐’도 풀어야 할 숙제였다. 최동재 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일반적으로 연령이 높은 소비자는 수분이 많은 밥을 좋아해요. 연령이 낮은 소비자는 꼬들꼬들한 밥을 원하죠. 소비자가 가장 원하는 적정선을 찾는 데만 6개월이 넘게 걸렸어요.”
개발팀은 1996년 무균포장방식으로 즉석밥 시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자체 품평회에서 ‘맛이 좋다’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CJ제일제당이 넘어야 할 벽은 또 있었다. ‘즉석밥은 저품질’이라는 선입견을 무너뜨려야 했다. 이를 위해 햇반이라는 브랜드명을 만들었다. 햇반은 ‘방금 만든 맛있는 밥’이라는 뜻이다.
햇반은 출시 직후 예상보다 좋은 성과를 냈다. 1996년 첫해 35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2000년에는 이보다 5.7배 늘어난 20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농심(2002년)·오뚜기(2004년) 등 식품경쟁업체가 즉석밥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햇반의 시장점유율은 2004년 80%까지 치솟았다.
후발주자의 추격은 만만치 않았다. 농심·오뚜기 즉석밥의 품질이 좋아지면서 햇반의 아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햇반의 시장점유율은 2005년 67%로 떨어졌다. 1년 만에 시장점유율이 13%포인트나 떨어진 것이다. CJ제일제당에 비상이 걸렸다. ‘즉석밥 시장을 어렵게 개척했는데, 이렇게 무너져선 안 된다’는 긴장감이 흘렀다. 가격을 낮추자는 제안도 나왔다. 출혈을 감수하면 후발주자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CJ제일제당은 정공법을 택했다.
CJ제일제당 경영진은 식품연구소에 즉석밥의 맛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밥의 재료는 쌀과 물 밖에 없다. 조미료가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흔히 말하는 손맛이 가미되는 것도 아니다. 정효영 팀장은 “식품연구소에 품질개선 지시가 내려왔는데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회상했다.
식품연구소 연구원들은 품질개선 지시가 떨어진 날부터 발품을 팔았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미곡장과 미곡종합처리장(RPC)을 일일이 찾아 다녔다. 좋은 쌀을 찾고, 쌀의 도정(搗精)과정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도정이란 현미의 껍질을 깎아 백미로 만드는 것이다. RPC에서 담당한다. 도정과정을 거친 쌀은 부산에 있는 햇반생산공장으로 이동한다. 일반적으로 3~4시간 걸린다.
도정과정에서 문제점을 찾지 못한 연구원들은 부산 생산공장으로 가는 트럭에 올라탔다. 여기서 이들은 품질개선의 해법을 찾아냈다. 정 팀장의 회상이다. “쌀 수송 트럭에 올라탔는데, 실내 온도가 50도까지 올라갔어요. 밥을 짓기도 전에 쌀이 발화하기 시작했죠. 모두 무릎을 쳤죠. ‘아, 이러니 쌀의 신선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고, 품질이 개선되지 않는 것이구나’라면서요.”
식품연구소는 햇반의 품질을 개선하려면 ‘자가도정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RPC에서 부산 생산공장으로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줄여야 햇반의 맛이 좋아진다’는 결론에서였다. CJ제일제당은 2006년 3월 도정기를 구입해 자가도정시스템을 구축했다. 그 결과 평균 5일 걸리던 햇반 제조일수가 3일로 줄어들었다. 최동재 팀장은 “2006년 이전에는 RPC에서 도정한 백미를 생산공장으로 가져와 햇반을 만들었다”며 “이동시간까지 감안하면 도정이 끝난 날로부터 5일이 지나야 햇반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최 팀장은 “자가도정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았다면 햇반의 제조기간을 단축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가 도정시스템을 갖춘 후 햇반의 맛이 좋아졌다는 평가가 잇따랐다. 시장점유율은 2006년 말 71%로 다시 올랐다.
위기는 또 찾아왔다. 2007년 동원F & B까지 즉석밥 시장에 뛰어들면서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가장 먼저 햇반이 타격을 받았다. 햇반의 시장점유율은 2010년 초 사상 최저치인 59%로 떨어졌다. CJ제일제당은 다시 정공법을 택했다. 2010년 5월 ‘1일 도정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탄력적 교대근무를 통해 주말에도 공장을 가동한 결과였다.
독점적 지위에도 가격 거의 올리지 않아좋아진 밥맛은 소비자가 먼저 느꼈다. 햇반의 지난해 시장점유율은 70%까지 늘어났다. 지난해 9월에는 75%를 넘어섰다. 시장점유율 75%는 ‘꿈의 MS(Market Share·마켓쉐어)’라고 불린다. 최동재 팀장은 “햇반의 시장점유율이 75%를 넘었을 때 ‘마의 벽’을 깼다는 생각까지 들었다”며 “무엇보다 가격을 낮추지 않고 품질개선으로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1996년 출시된 햇반은 현재 1억개가 넘게 팔렸다. 소비자에 팔린 햇반을 길게 늘어뜨리면 지구를 2.5바퀴 감을 수 있다. 햇반의 인기는 해외에서도 높아지고 있다. 2010년 수출액은 150억원에 이른다. 2010년 8월부터는 중남미에서도 햇반이 팔리고 있다. 최 팀장은 “지난해 170여개 매장을 갖고 있는 멕시코 샘스클럽에 햇반이 입점했다”며 “멕시코에서만 1000만 달러 가량의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햇반은 이제 즉석밥의 고유명사가 됐다. CJ제일제당이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결과를 보면 소비자의 95% 이상이 즉석밥 하면 햇반을 떠올렸다. 단골고객도 많다. 햇반 매출 중 60% 이상은 연간 50개 이상을 구입하는 단골고객의 몫이다.
CJ제일제당은 햇반을 통해 즉석밥 시장의 지배적 사업자로 우뚝 섰다. ‘독과점 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은 시장점유율이 50% 이상인 사업자를 독과점 기업으로 규정하고 있다. 시장을 독과점했다고 무조건 손가락질 해선 곤란하다.
경쟁에서 정당하게 승리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면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반대로 시장 지배적 사업자가 제품가격 등을 통해 시장을 교란하면 독과점 기업으로 규제를 받는다.
1996년 햇반의 제품가격은 1050원(210g·소비자가격 기준)이었다. 16년이 흐른 현재 가격은 1280원이다. CJ제일제당은 햇반을 무기로 시장을 흔들지 않았다.
이윤찬 이코노미스트 기자 chan487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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