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산 끼고도는 부암동 - 예술가와 돈 모이는 ‘서울 속 시골’
북악산 끼고도는 부암동 - 예술가와 돈 모이는 ‘서울 속 시골’
서울 종로구 삼청동은 한옥을 개조한 와인바와 커피숍, 와플가게 등이 즐비하게 들어서면서 어엿한 ‘강북의 중심가’가 됐다. 애초 한국적 전통미로 인기를 모았지만 지난해 삼청동길 주변에 들어선 식당과 카페가 1300곳을 넘어서면서 예전의 고즈넉한 맛이 사라졌다.
의식주와 관련한 새로운 유행을 만드는 트렌드 세터들은 종로구 부암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삼청동 번화가에 지친 이들이다. 부암동은 경복궁에서 자하문터널을 지나 자하문로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북악산과 인왕산이 주변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마치 어느 산골 마을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실제로 이 지역은 조선조 한양을 지키던 서울 성곽과 인접한 곳으로 인왕산~북한산으로 이어지는 녹지축상에 자리해 ‘도심의 허파’로 불린다. 자연 풍광이 좋아 조선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정자였던 무계정사,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 등 명소가 즐비하다. 자하문로 초입에서 만난 김혜연(29)씨는 “터널 하나 지났을 뿐인데 서울이 아닌 기분”이라면서 “번잡스러운 시내 분위기가 싫어 교통이 좀 불편해도 조용한 부암동을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서울 속 시골’인 부암동 대로변에 최근 들어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오래된 수퍼마켓과 상점 사이로 레스토랑이나 와인바가 심심치 않게 들어서고 있다. 기존의 낡은 상가를 새로 단장하거나 단독주택을 점포로 리모델링 한 것이다. 대로 뒤편 연립주택가 너머 산중턱에는 고급 단독주택촌이 형성돼 있고 미술관도 눈에 띈다.
‘도심의 허파’로 불려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을 비롯해 각종 드라마·CF의 촬영 현장으로 각광 받으며 이곳을 찾는 이들이 더욱 늘었다. 외국인 전용택시를 대절해 부암동을 찾은 일본인 노리히사 요코씨는 “드라마를 보고 꼭 한번 와보고 싶었다”면서 “카페 말고도 서울 시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정취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상점 관계자는 “중국인 관광객의 경우 관광버스를 타고 30~40명씩 단체로 찾기도 한다”고 전했다.
자하문로 초입에 위치한 카페인 ‘클럽에스프레소’는 부암동이 유명해지기 전인 2000년대 초반에 문을 연 ‘터줏대감’이다. 1990년대 대학로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마은식 클럽에스프레소 사장은 본격적으로 커피를 연구하기 위해 더 넓은 공간을 찾았다. 마 사장은 “커피도 문화상품의 하나인 만큼 동네 고유의 분위기를 생각해 입지를 택했다”면서 “부암동은 시내에서 가까우면서도 옛 향수를 자극하는 장소”라고 말했다. 1층 커피숍, 2층은 로스팅 기계가 있는 커피공장으로 운영하는 이곳을 찾는 손님은 주말 기준으로 하루에 1000명이 넘는다. 개업 당시와 비교하면 20배 이상 늘었다.
부암동주민센터 측은 “1968년 청와대 기습을 노린 북한 무장공비 침투 사건 이후 보안상의 이유로 막은 창의문~북악산 서울 성곽길 4.3km 구간을 40년 만인 2008년에 전면 개방하면서 등산객을 포함한 방문객이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방문객이 늘어나자 새로운 가게가 속속 문을 열었다.
주로 카페나 공방, 인테리어소품가게 등이다. 1년 전 부암동에 발을 들인 ‘새내기 입주자’인 최윤경(31)씨는 세월의 흔적이 좋아 이곳을 택했단다. ‘플라워무브먼트’라는 오픈작업실 겸 꽃집을 운영하는 최씨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좋아하는 아티스트들이 이곳에 많이 모여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태원에서 작업실을 쓰다가 저렴한 임대료와 상업적이지 않은 분위기에 끌려 이곳에 왔다”며 “부암동에 한번 들어온 사람은 좀처럼 나가는 법이 없어 가게 자리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부동산 값은 꾸준히 올라옛 정취를 즐기고자 하는 이들만큼이나 예술·문화적 감성을 느끼기 위해 부암동을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 삼청동에는 예술가들이 먼저 모이고 카페와 레스토랑이 들어섰지만 이곳은 거꾸로다. 예술가들이 나중에 들어왔다. 부암동에 거주하고 있는 김정찬 마을공동체 품애 이사는 “주민 가운데 상당수가 예술 종사자”라면서 “젊은 작가들이 모이면서 그런 분위기에 더욱 활기를 띠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부암동 환기미술관은 이런 점에 주목해 3월말에 ‘부암동 아트밸리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부암동에 거주하는 작가 20여명이 힘을 합쳐 부암동 일대에서 다양한 예술행사를 펼칠 예정이다. 채영 환기미술관 전시팀장은 “부암동에 거주하는 작가, 주민은 물론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새로운 ‘서울 속 시골’을 소개할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람이 몰리면 부동산 가격이 오르게 마련이다. 이 지역 인왕부동산 관계자에 따르면 대로변 건물 시세는 33㎡(옛 10평) 기준으로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원 선이다. 그는 “카페·레스토랑 상권이 형성된다는 소식에 문의가 잦지만 가격이 오른데다 물건이 많지 않아 거래가 쉽게 성사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권리금을 2배 이상 높인 사례도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공인중개사는 “자하문로 주변 건물 주인들이 최근 3.3㎡ 당 3000만원 수준에 매도가를 내고 있다”면서 “규제 탓에 삼청동처럼 큰 상권이 형성되긴 어려워도 임대가는 계속 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부동산 값이 오르고 있지만 규제가 많아 개발은 더딘 편이다. 서울시는 2004년에 부암동 14만8750㎡ 일대의 그린벨트를 해제했지만 해제지역의 94%가 여전히 1종 전용주거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부암동 주민들도 개발을 꺼리는 분위기다. 최근 논의된 공용주차장 건립도 주민 반대로 무산됐다. 40년 넘게 ‘동양방앗간’을 운영하는 차옥순(74)씨는 “주말만 되면 관광객이 몰려와 주차전쟁을 치른다”면서도 “녹지를 훼손하지 않으려고 주민들도 주차공간을 넉넉하게 쓰지 않는데 외부인을 위해 녹지를 훼손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김정찬 품애 이사는 “최근 5년 사이에 신규 유입된 거주자가 늘어나면서 상대적으로 원주민들의 발언권이 커졌다”면서 “부암동 주민은 한적한 자연 속에 있다는 자각이 강해 외부와 거리를 유지하길 바라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허정연 이코노미스트 기자 jypow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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