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의 은퇴 준비 - 연금제도 탄탄하고 시니어 일자리 많아
선진국의 은퇴 준비 - 연금제도 탄탄하고 시니어 일자리 많아
미국 디트로이트 교육위원회에서 30년 동안 학생 지도원으로 일한 재클린 칸(64)은 1999년 정식 은퇴 후 중환자실 간호사로서 2막 인생을 살고 있다. 그는 교육위원회에서 20년가량 일하면서 50세를 넘어 은퇴시점이 다가오자 새로운 일에 대한 열망이 생겼다. 원래 어릴 때부터 간호사가 꿈이었던 그는 직장을 그만두기 전부터 간호학과로 진학해 2년간 공부한 후 준학사학위를 땄다. 55세에 간호학 학사가 됐고, 지금은 중환자실 간호사로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고 있다. 간호사가 된 후 그는 환자나 환자 가족들과 깊이 교감하면서 월급보다 훨씬 큰 보답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재클린 칸처럼 선진국의 은퇴자나 은퇴문화는 우리와 여러 가지로 다르다. 지난해 HSBC그룹이 세계 17개국을 대상으로 은퇴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영국, 캐나다, 미국, 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 응답자는 은퇴에서 주로 ‘자유’를 연상했다. 그 다음으로 행복, 만족, 기회, 지혜가 뒤따랐다. 반면 우리나라 응답자들은 55%가 은퇴라는 단어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떠올려 대비를 보였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이 은퇴에 대해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이유는 은퇴 준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가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의 은퇴 준비 정도를 측정한 결과 100점 만점에 58.3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반적으로 선진국보다 훨씬 낮은 준비상태를 보였다. 특히 가족, 친구, 여가, 주거, 마음의 안정, 건강 등 7가지 부문별로 나눠 분석해 본 결과 일과 재무 영역의 준비상태가 매우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선진국 은퇴자 ‘은퇴=자유’선진국에서는 일하기를 원하는 은퇴자에게 일할 기회와 여건을 마련해주고, 일하기를 원치 않는 은퇴자에게는 일생을 통해 연마해 온 지식과 기술을 활용해 자원봉사를 할 수 있도록 하면서 고령화 사회를 대처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은퇴자들이 활동적 노화(active aging)와 성공적 노화(successful aging)를 추구하면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나이 때문에 일자리에서 물러나는 정년 제도는 본래 산업혁명 이후 나이가 든 근로자를 공장에서 내보내기 위해 고안됐다. 하지만 산업환경의 변화와 고령화 등으로 정년의 필요성이 사라진 지 오래다.
이에 따라 선진국에서는 일찌감치 사회적 토의 과정을 통해 법적 정년을 없애거나 연장해 오고 있다. 미국은 1967년에 65세 미만의 강제퇴직을 금지한 이후 1978년에는 70세로 상향 조정했다가 1986년에는 연령에 기반한 강제퇴직제도를 법적으로 완전히 폐지했다. 영국도 2011년 10월에 65세로 정한 정년퇴직 제도를 폐지했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이미 60세로 정년퇴직 나이가 늘어나 있지만, 기업이 정년 연장, 계속 고용, 정년 폐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2013년까지는 65세로 정년퇴직 나이를 연장하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다. 또한 1980년부터 임금 피크제를 도입해 법적 정년을 초과한 근로자를 계속 고용하고 있다. 이렇듯 선진국에서는 정년연장과 동시에 가능하면 오랫동안 일할 수 있도록 해서 공적연금을 탈 수 있는 연령을 늘리고 있다. 미국에서는 현재 66세부터 공적연금을 수령할 수 있으며, 영국은 현재는 65세(남자), 60세(여자)이지만 2044년까지 68세로 늘어나게 되어 있다. 일본은 65세부터이며, 독일은 현재 65세에서 2030년 67세로 연장될 예정이다.
선진국에서는 또한 은퇴 후에도 시니어의 장점을 충분하게 발휘할 수 있는 일자리, 즉 시니어 일자리(senior job)가 잘 발굴돼 보급되고 있다. 은퇴자들이 차지할 수 있는 시니어 일자리란 향후 발전 가능성이 크지 않은 시장 성숙한 분야이면서 6개월에서 2년 안에 집중적인 교육으로 가볍게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으며, 젊은이들이 선호하지 않는 분야로 정의한다. 예를 들어 교육 분야에서 전통적인 교사보다는 교사를 지원하면서 교과서를 개발하고 계속 수정하는 전문가들이 시니어 일자리로 소개되고 있다. 특히 성인대상 교육기관이나 단체가 다양한 사회경험을 가진 시니어를 고용해서 업무를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은퇴자들에게 시니어 일자리를 보급하고 알려주고 있는 미국 시빅 벤처스(civic ventures)에 따르면 은퇴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일자리를 5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건강분야, 환경분야, 정부분야, 교육분야, 비영리단체 분야인데 이 중 건강과 교육분야에서 일자리가 가장 많이 창출되고 있다. 건강분야에서는 홈건강관리자(Home Health Aides), 노인대상 헬스트레이너, 노인대상 물리치료사, 노인 의료행정 보조사 등이 유망하며 교육분야의 경우 초·중·고등학교의 방과 후 특별 프로그램 교사들, 교과목 개발전문가, 코치나 멘토, 교사보조자, 교육컨설턴트 등이 대규모로 채용되고 있다.
선진국의 은퇴자들이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는 근본적인 원동력은 잘 갖춰진 연금제도와 풍부한 금융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은퇴설계는 연금으로부터 출발해 의료비 마련과 간병에 대한 대비책 등 포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타워왓슨 자료(2011년)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금 비중이 미국은 104%, 영국 101%, 호주 103%로 대부분의 선진국이 100%를 넘는다. 캐나다 73%, 일본 64% 등의 수준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45%에 불과할 정도로 연금자산이 상대적으로 적다. 이는 선진국들이 일찍부터 공적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 등 3층 연금제도를 갖춰 온데다 각층의 연금제도들이 상호 영향을 받으며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으로 노후 대비 세계적으로 연금재정이 건전하고 개인의 은퇴설계가 잘 되어 있는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선진국의 노후준비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미국 젊은이들은 병역의무가 없으므로 22~23세에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온다고 가정할 수 있다. 기업에 취업하자마자 401(k)라는 대표적인 퇴직연금에 가입한다. 거의 모든 종업원들이 가입하므로 사회 분위기상 마치 가입이 의무화되어 있는 것인 양 생각이 들 정도다. 동시에 상당수의 젊은 근로자들이 소득세가 면제되는 개인연금(IRA)도 가입하고 있다. 퇴직연금 상품인 401(k)는 59.5세가 되어야 비로소 인출이 가능하므로 가능하면 계속해서 유지해야 하며, 개인연금 역시 59.5세가 넘어야 인출이 가능하다. 국민연금이 66세가 되어야 나오기 시작하므로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이 나이까지 근로를 하려고 애를 쓰고 있으며 기업들 역시 법으로 고령자를 일찍 정년퇴직 시키는 것이 금지돼 있다. 결국 미국 국민들은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이라는 3가지 연금으로 노후자금을 충분하게 마련하는 사회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가까운 일본 역시 은퇴자들이 풍부한 자산을 바탕으로 풍요로운 노후를 보내고 있다. 본격적인 은퇴를 앞둔 일본의 베이비부머 ‘단카이 세대’는 일본 인구의 5% 정도이지만 개인 금융자산은 약 130조엔으로 전체 개인금융자산의 12.7%(삼성경제연구소 분석)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자산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다가 올해부터 수령하는 약 50조엔의 퇴직금까지 더한다면 이들의 노후는 더욱 풍족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단카이세대가 부유한 데는 일본의 고도성장기 후기에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이후 일본 경제 및 기업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며 성장한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2006년 이후 고령자고용안정법으로 65세 정년이 의무화되면서 근로기간이 늘어났다.
이들의 주된 노후자금인 연금소득은 국민연금과 후생연금 등 공적연금, 기업연금과 개인연금 등 사적연금으로 구분되는 4층 구조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공적연금은 국민연금과 후생연금으로 이원화돼 제도별 형평성 문제로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며 제도 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 일본정부는 국민연금 재정불안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고 보조를 50%까지 인상하도록 했으나 국가 부채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막대한 규모의 재원 조달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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