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 있으면 눈치 볼 필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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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이노텍 임원회의에 참석하는 임원들은 대부분 50대였다. 최근에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지난해 이 회사의 박상호(43) 상무가 임원으로 승진하면서다. 박 상무는 최연소 임원으로 발탁됐다. 그룹 내에서 40대 임원을 승진시킨 건 이번이 처음이다. LG이노텍 관계자는 “15년간 영업과 마케팅의 한 우물만 판 결과”라며 “특히 LG이노텍 카메라모듈이 애플의 아이폰4에 탑재될 수 있는데 기여한 것을 높이 평가해 승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직장인 49.5% 고속승진 긍정적성과와 업무 능력 위주로 평가해 동기나 선배보다 먼저 승진하는 발탁인사는 익숙한 제도다. 특히 외국계 기업에서는 발탁인사가 흔하다. 국내 기업들은 2000년 초 능력 있는 인재 양성을 위해 ‘고속승진제도(패스트 트랙)’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 제도는 학벌이나 배경보다는 능력 위주로 평가하기 때문에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고 조직에서 인재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권위주의적이고 상명하달식인 국내 기업문화를 뛰어넘지 못하면서 고속승진이 이벤트로 그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최근 고속승진제도가 다시 자리를 잡는 모습이다. 금융위기 이후 성과주의로 바뀐데다 글로벌화가 더욱 진전돼 실력 있는 인재를 영입하고 키우는데 긴요한 제도라서다. 또 자신의 능력에 따라 이직할 수 있는 기회도 늘어나면서 기업들이 인재 이탈을 막기 위한 대안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서열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금융권에서도 고속승진제도가 퍼지고 있다. KB국민은행의 이상원(52) 신성장사업그룹 부행장은 올 1월 승진했다. 부행장은 보통 부장에서 본부장을 거쳐 맡지만 이 부행장은 본부장을 건너 뛰고 부행장 직함을 달았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이번 인사는 그동안 보여준 업무 능력과 성과에 따른 보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글로벌사업부 부장 재직 시절 국민은행이 2008년 인수한 카자흐스탄 센터크레디트은행(BCC)을 2370억원의 적자에서 200억원의 흑자로 전환시키는 데 기여하면서 승진할 수 있었다.
CEO가 적극 독려해야7월 말 하나은행에서 근무하는 서종국(33) 과장도 입사 7년 만에 과장으로 승진했다. 보통 행원에서 대리까지 9년 정도 근무해야 승진할 수 있지만 서 과장은 대리로 진급한 지 2년 만에 과장 자리로 올랐다. 서 과장은 2008년 7월부터 10개월간 진행된 차세대 전산시스템 구축에 기여하고 2009년 지점 내에서도 개인평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아직 제도가 도입된 것은 아니지만 능력 위주의 인재상으로 인사 트렌드가 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아예 승진 연한을 줄인 기업도 있다. CJ그룹은 내년부터 사원부터 대리, 과장, 부장, 선임부장 등 직급별 승진 연한을 4년에서 2년으로 줄인다 이렇게 되면 빠르면 10년 만에 임원으로 승진할 수 있다. CJ그룹 관계자는 “아직 시행되기 전이지만 이번 제도에 대해 직원들의 반응은 대부분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취업포털 사이트인 커리어가 7월 직장인 27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한 결과, 49.5%가 고속승진의 기회가 온다면 “받아들이겠다”고 답했다. 하나은행에 다니는 A과장은 “자신이 일한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라며 “점점 능력을 갖춘 직원 입사가 늘면서 이런 제도는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고속승진에 대한 부담도 여전히 큰 것으로 나타났다. 잡코리아에 따르면 고속승진을 거절하는 이유(복수응답)로 ‘직책에 대한 부담과 책임감이 너무 커서’라는 대답이 66.7%로 가장 많았지만 ‘직장선배나 동료들간의 관계가 껄끄러워져서’ 라는 대답도 30.3%에 달했다. 그래서 일부 인사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의 정서에 맞지 않아 신중하게 적용해야 하는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잡코리아 관계자는 “한국 조직에서는 여전히 유대관계를 중요시하는 만큼 아랫사람이 먼저 승진할 경우 사내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한때 일부 인재를 대상으로 패스트 트랙 제도를 운영했다가 이런 이유로 2004년 조용히 없앴다. 대기업에 다니는 B대리는 “어제까지 같은 직급이었던 동기가 갑자기 상사가 되면 관계가 껄끄러워질 수 밖에 없
다”고 말했다.
외국계 기업들의 이런 제도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잡코리아(2010년 기준)에 따르면 외국계 기업 중에 발탁인사 제도가 있는 기업은 43.3%인 반면 국내 기업은 28.6%에 불과했다. 한국금융연구원 서병호 연구위원은 “여전히 인재 양성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 높아졌지만 만연한 학벌 중심 구조와 보수적인 시스템은 쉽게 변화하기는 어려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고속승진제도가 제대로 뿌리 내리려면 최고경영자(CEO)와 직원들이 함께 적극 나서야 한다. KB국민은행 민병덕 행장은 “앞으로 인사 때 능력을 갖춘 사람을 대상으로 최소 20%를 발탁승진을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고속승진은 무엇보다 잣대가 공정하고 투명해야 한다. 서울대 경영대 김성식 교수는 “인원을 제한하거나 제도적으로 만드는 것도 좋지만 남들이 인정할 수 있는 인재를 수시로 발탁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양한 승진제도 필요인재를 발탁하기도 하지만 재목을 미리 선발해서 따로 키우는 방법도 있다. 국내 탈모제시장 1위로 유명한 한국MSD가 그렇다. 여기에선 사내 반발을 의식해 인재를 비밀리에 관리한다. 임원급 리더로 성장할 수 있는 젊고 잠재력 높은 핵심 인재군의 교육 프로그램인 ‘탤런트 리뷰’를 실시하고 있다. 매년초 각 부서장 추천을 통해 전 직원의 5% 가량인 30~35명의 사원을 뽑아 마케팅직무 프로그램과 전략 부서전환 배치 프로그램, 영업 매니저 후보군 교육 프로그램, 아태지역 지사 직무 경험 프로그램 등의 교육을 받는다.
또 직원 스스로가 역량을 개발해 승진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포스코는 올해부터 매니저급(대리, 과장)에 대해 인사고과나 제2 외국어 등에서 일정 수준의 점수를 얻으면 승진할 수 있는 승진 포인트제를 도입했다. 포스코 관계자는 “남녀, 연차 상관없이 성과에 따라 승진과 보상이 이뤄진다”며 “투명한 승진체제를 통해 개인의 성장과 회사가 발전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김성식 교수는 “미국 구글의 경우 자신의 승진에 대한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하면 관리자에게 인사 조치를 요구하는 ‘자기주도형 승진제도’처럼 국내 기업도 다양한 승진 기회를 열어주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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