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ver story - 사람과 떠나는 마지막 해저탐사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내려갔다. 쿵! 갑자기 둔탁한 소리가 났다. 우리가 탄 잠수정이 험난한 태평양 아래 수심 457m 밑바닥에 닿는 순간이었다.
아침 나절, 하와이 해변에서 8km 떨어진 곳이었다. 갑자기 물 위의 세계가 상상에 불과한 듯했다. 세계에서 가장 깊이 내려가는 심해 잠수정(deep-diving subs) 중 하나인 파이시스 4호(Pisces IV)의 작고 둥근 창을 통해 보이는 우리의 세계는 어둡고, 공기가 없으며, 처음 보는 생명체로 가득했다.
우리 세 사람(기자와 잠수정 조종사, 그리고 실비아 얼)은 양말만 신고 높이 2.1m인 답답한 둥근 강철통 안에 갇혀 있었다. 실비아 얼은 전설적인 해저탐사 전문가였던 자크 쿠스토 이래 가장 뛰어난 해양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77세인 그녀는 미국 해양과학과 탐사 분야의 대모다.
그러나 우리 잠수정의 해치를 닫은 순간부터 그녀는 초등학생처럼 활짝 웃으며 창밖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보며 크게 외쳤다. “푸름 … 더 푸름 … 가장 푸름(Blue ... bluer ...blueissimo).” 바닥에 닿자 그녀는 어두컴컴한 밖을 내다보며 손을 모아 입에 대고 “거기 누구 있어요(Is anybody home)?”라고 외쳤다. 그러고는 만화에 나오는 바리톤으로 목소리를 내려깔며 스스로 답했다. “예! 있어요. 모두 다요.”
그 다음 6시간 동안 우리는 해저를 스치듯이 누비며 갖가지 생명체가 가득한 거대한 바위 덩어리와 비탈, 절벽과 협곡을 향해 조명등을 비췄다. 대형 오징어가 우리를 스쳐지나갔고 작은 애완견만한 게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한듯 우리를 쳐다봤다. 닥터 수스(Dr. Seuss)의 동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해저를 걸어 다니는 물고기들은 우리를 무시했다.
공식적인 임무는 해송(black coral) 수집이었다. 과학계에 알려진 최장수 동물로 라텍스 장갑처럼 다른 생명체를 덮어 씌워 잡아먹는 포식자다. 과학자들은 그 속에 남은 다른 생명체 겉껍질에 기후변화의 비밀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곳은 인간이 탐사한 적이 없는 처녀 해저다. 그냥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만해도 충분히 유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군 함정에서 버려진 군용 커피 머그잔들이 보였다. 가끔씩 알루미늄 깡통도 눈에 띄었는데 대개는 버드와이저 맥주캔이었다. “환경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맥주”라고 잠수정 조종사 테리 커비가 말했다. 점심은 땅콩버터 샌드위치였다. 갑자기 잠수정 내벽에 물방울이 맺혀 흐르는 것을 보고 내가 질겁했다. “기체 응결현상(condensation)”이라고 커비는 천연덕스럽게 설명했다. 우리는 계속 해저를 누볐다. 그러다가 잠수정 조명등 불빛이 진짜 수수께끼 같은 물체 위에 떨어졌다.
바위 위에 털썩 주저 앉은 그 물체는 인간 두뇌 같았다. 다만 표면이 닭살 돋은 것처럼 오돌토돌했다. 털 뽑은 닭일까? 커비가 자매 잠수정 파이시스 5호에 무전 연락을 취했다. 과학자들이 탄 그 잠수정은 바로 우리 곁에 있었다. 그들은 로봇팔을 이용해 그 샘플을 채취했다. 얼마 후 과학자 한명이 “새로운 종일 가능성이 크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생명체가 확실히 새로운 종인지 알 도리가 없을지 모른다. 이제 다시는 유인 해저탐사가 없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지난해 봄 제임스 캐머런(영화 ‘타이태닉’과 ‘아바타’ 감독)이 최대 수심 1만1000m인 마리아나 해구(Mariana Trench) 바닥에 내려가 현대판 뉴스영화의 영웅이 됐다. 그러면서 해저탐사에서 새로운 황금기가 도래할 듯했다. 버진 오시아닉의 리처드 브랜슨 회장과 실비아 얼은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이 제공한 자금으로 각각 독자적인 심해 잠수정을 개발했다. 미 항공우주국(NASA)이 우주 탐사를 민간기업에 넘긴 것처럼 이런 ‘해저 착륙 경주(race to the bottom)’도 민영화되기 시작했다.
민간탐사 시대의 개막! 개인 모험사업의 시작! 캐머런은 해저 바닥에 도착한 뒤 트위터에서 “바닥에 닿은 기분이 이렇게 좋을 수 없다(Hitting bottom never felt so good)!”고 희열을 표현했다(트위터는 그 글이 ‘단순한 경외심 표현’의 2012년 최고 순간 중 하나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1년도 채 못 가 황금기는커녕 암흑기가 찾아왔다. 대중이 한눈을 파는 사이에 유인 해저탐사(piloted exploration)가 중단됐다. 슈미트 회장은 얼에게 대던 자금 제공을 중단했다. 브랜슨도 사업을 무기한 중단했다. 캐머런도 호주와 파푸아뉴기니 주변에서 8차례 해저탐사로 ‘제1단계’ 작업만 마무리한 뒤 시간과 돈이 바닥났다.
그는 자신이 보유한 역사적인 잠수정이 캘리포니아주 샌타바버라에 있는 작업실에 보관돼있다고 말했다. “언제든 잠수할 준비가 돼 있고” 과학자들이 사용할 수 있지만 지금은 곰팡이 냄새나는 젖은 옷처럼 보관돼 있다. 기대하던 ‘제2단계’ 탐사에는 아무도 자금을 대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동시에 정부 지원도 전례 없이 삭감됐다. 미국 과학자들에게 최상의 해저 접근을 제공했던 파이시스 잠수정들에 대한 지원은 캐머런이 마리아나 해구 밑바닥에 닿은 바로 그달 중단됐다. 지금은 그중 어느 하나도 운용되지 않는다. 마지막 장기 해저 체류 실험실도 문을 닿았고, 학계 잠수정 중 최소한 40%가 향후 10년 안에 퇴역할 예정이다.
이런 기록적인 해저탐사 정체는 예산 삭감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인식의 변화가 불러온 사태이기도 하다. 사람보다 기계가 더 싸고, 안전하고, 효율적인 데 왜 하필 극한적인 공간에 사람을 보내야 하는지를 둘러싼 수십 년 묵은 논쟁이 이제 확실히 끝났다.
잠수정 앨빈(Alvin)을 타고 ‘타이태닉’호를 발견한 해양 지질학자 로버트 발라드는 유인탐사의 문제점에 관한 공통된 생각을 이야기하며 “인간의 신체는 매우 성가시다(The body is a pain)”고 말했다. “화장실에 가야하고 불편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우리 정신은 어떤 조건에서도 견딜 수 있다. 빛의 속도로 움직일 수도 있다.”
발라드는 지난 20년 동안 ‘텔레프레즌스(telepresence, 원격 현존감)’ 기술의 미덕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조종되는 잠수정과 탐사장치로 뭍에 있는 세계 각지의 모든 연구자들에게 영상을 제공하는 기술을 말한다. 올해 그는 마침내 논쟁을 끝낸 듯하다. 유인탐사에 재정지원을 중단한 미 해양대기청(NOAA)은 발라드의 텔레프레즌스 프로젝트를 두고 “지구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대양의 체계적 탐사에 전념하는 유일한 정부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했다.
“멋진 차세대 탐사로 옮겨가는 인식체계의 대전환(paradigm shift)이다.” 로드아일랜드대에서 발라드가 말했다. 그는 이전에 모든 세대가 방문한 곳보다 더 많은 지구 구석구석에 대한 디지털 데이터를 과학자들에게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고도 집에서 느긋하게 칵테일을 마실 수 있다.”
유인 해저탐사를 위해 재정을 확보하느라 애쓰는 얼과 캐머런 같은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관점이다. 탐사가 끝난 후 갑판에서 얼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인탐사를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은 가당찮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50여 년 전만해도 인간이나 기계 둘 다 심해 잠수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다가 발라드와 얼이 과학자가 되려고 꿈꾸던 시기에 자칭 ‘물고기 인간(fish man)’인 자크 쿠스토가 산소통을 이용한 수중 호흡기 아쿼렁(Aqua-Lung)과 소형 잠수장치(bathyscaphe)를 발명했다. 1934년 박물학자(naturalist) 윌리엄 비비는 강철선에 묶인 둥근 잠수구를 타고 해저 922m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온 뒤 그 황홀한 광경을 한편의 시로 표현했다. 얼과 발라드는 쿠스토와 비비를 따라 유인 해저탐사 혁명의 열렬한 팬이 됐다. 그들은 해저 생명체를 자주 접한 첫 세대 인간이었다.
1950년대 말 뉴욕타임스 사설은 이렇게 선언했다. “수 천 년 전 나무에서 내려왔거나 동굴에서 기어 나온 인류가 이제 믿기 힘든 여정을 앞두고 있다.” 그 말이 한동안 진실로 입증됐다.
1960년 스위스 엔지니어 자크 피카르와 미 해군 대위 돈 월시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태평양 마리아나 해구 가장 밑바닥에 도달해 허시 초콜릿바를 나눠 먹고 20분을 머물다가 돌아왔다. 미 해군은 두 번째 심해 잠수장치를 제작한 뒤 그 다음 혁명적인 앨빈을 개발했다. 진짜 납으로 만든 비행선처럼 해저를 떠돌아 다닐 수 있고 조종이 가능한 첫 유인 잠수정이었다.
그 직후 듀크대 대학원생이던 얼은 실험실의 죽은 물고기나 책에 나오는 흐릿한 이미지가 아니라 “진짜 물고기를 보려고” 스쿠버를 처음 사용한 과학자 중 한명이 됐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쓴 그녀의 멕시코만 논문은 생물학 학술지가 한호 전체를 할애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이전에 비비가 그랬듯이 얼도 직접 해저에 내려가지 않으면 “실제로 여행하지 않고 여행 일정표만 보는것과 다름 없다”고 확고히 믿었다. 그녀는 언변을 동원해 탐사선에 여러 차례 승선했고 한번은 인도양에도 갔다. 그 여행으로 그녀는 최초로 언론을 통해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뭄바사 데일리타임스는 “남성 70명과 항해하는 실비아, 문제 없다고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냈다.
곧 국제적인 우주탐사 경쟁이 시작되면서 해저탐사도 활기를 띠었다. 신문들은 하늘의 외계 공간(outer space)과 바다의 내계 공간(inner space), 바다에 떨어지는 우주 캡슐과 잠수정의 해면 부상, 우주비행사(astronauts)와 잠수 전문가(aquanauts)를 앞다퉈 다루기 시작했다.
얼은 1970년 해저 실험실에서 2주간 머물렀다. 우주탐사에서 달 착륙에 해당하는 쾌거였다. 그런 실험실은 세계 전역에 약 50개로 늘었다. 얼의 해저 체류로 “인간은 원초적인 주거지로 돌아가 재적응해서 성공적으로 살 수 있다는 점이 입증됐다”고 워싱턴포스트는 격찬했다. 뭍으로 올라간 얼은 유명인사가 됐다. 백악관에 초대됐고, 무개차를 타고 시카고 시내를 퍼레이드했으며, NBC 방송 ‘투데이’쇼에 출연했다. 또 롤렉스의 환대를 받았고, 라이프지에 “물 요정의 집(A Nest of Naiads)”에서 생활한 모습이 소개됐다.
얼은 성차별에 시달리기도 했다[언론은 여성 잠수 전문가들을 ‘아쿼노트(aquanauts)’가 아니라 ‘아쿼베이브(aquababes)’로 불렀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바다라는 거대한 미개척지에 대중적 관심을 환기시켰다. 탐사도 계속했다. 테스트용 잠수정을 타고 카리브해를 탐사했고, 달려드는 상어의 주둥이를 걷어찼으며, 신비에 싸인 실러캔스(coelacanth, 3억5000만 년 전에 살았던 어류로 멸종됐다고 알려졌지만 한 어부가 낚아 올렸다)를 찾으려고 야간 잠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1979년 얼은 빛을 발하는 푸른 생명체들을 헤집고 수심 380m인 태평양 바닥에 단독으로 내려가는 기록을 세웠다. 그녀는 그곳에 미국 국기를 세우고 올라와 TV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되면서 ‘해저 여왕 폐하(Her Deepness)’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 로버트 발라드도 잠수함을 이용해 심해를 탐사하는 과학자였다(규모가 큰 앨빈을 이용했다). 그는 1960년대 말 얼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그때 그녀는 이미 자크 쿠스토와 함께 어울리는 떠오르는 스타였고, 발라드는 대학원생에 불과했다.
발라드도 얼처럼 비비와 쿠스토가 쓴 책을 읽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그는 쥘 베르느의 소설을 더 좋아했다. ‘해저 2만리’를 읽으며 ‘기술 전문가’이자 ‘모험가’인 주인공 네모 선장을 우상으로 삼았다. 얼이 고래와 함께 헤엄치고 물고기를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songbirds)’라고 말하며 다니는 동안 발라드는 해양 지질학을 전공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해군에 입대해 기계를 만지기 시작했다.
발라드는 유인탐사 프로젝트에도 많이 참여했다. 그러나 가족과 떠나 있어야 한다는 점과 오랜 여행이 가정생활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혐오했다. 그는 우즈홀 해양연구소의 선임 과학자로서 10년 이상 1년에 몇 달씩 바다에서 생활하며 지구를 둘러싼 약 6만4000㎞ 길이의 해저산맥 대양중앙해령(Mid-Ocean Ridge)을 탐사했다. 한번은 해저 약 6000m에서 화산암벽에 충돌했다. 잠수정이 바위틈에 끼어 한동안 꼼작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늘 위험했고 가족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발라드는 집을 그리워했다.
1977년 발라드는 기존 과학을 쓸어버릴 정도로 유명한 발견을 했다.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약 320㎞ 떨어진 지점에 설치된 센서가 해저 부근 해수 온도의 급상승을 탐지했다. 발라드와 동료 두 명이 앨빈 잠수정을 타고 내려가자 아주 뜨거운 열수가 뿜어져 나오는 구멍이 보였다. 그곳에서 수많은 화학물질이 분출되면서 기이한 생명체 군락이 형성돼 있었다. 나중에 연구자들은 그 열수구를 “에덴동산(the Garden of Eden)”이라고 이름 붙였다. 태양과 공기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이 어쩌면 모든 생명체의 근원일지
모른다.
그러나 해저 바닥에서 발라드에게 다른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때까지는 유인 잠수정이 해저탐사를 이끌었다. 로봇 잠수정은 예를 들어 분실된 폭탄이나 침몰한 장비를 찾는 데 큰 도움이 됐지만 과학은 인간의 현장 존재를 요구했다. 그게 통념이었다. 그러나 발라드는 그 열수구에 도착했을 때 동료의 눈을 본 순간 그런 통념이 헛소리라고 믿게 됐다.
“뭘 보는 거야?” 발라드가 그렇게 물었다고 기억했다. “모니터를 보고 있어”라고 동료가 말했다. 앨빈 내부의 비디오 스트린을 가리켰다. “창을 통해 육안으로 내다보는 것보다 훨씬 나아.” 그때 발라드는 깨달았다. 그는 기자에게 “인간의 몸을 그 아래에 보내는 건 이득이 없다”고 말했다. “과학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돈을 낭비하고 가족을 망치며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지 못하게 만든다.”
수년이 흐르는 동안 얼의 명성이 계속 치솟았지만 발라드는 유인탐사가 “비인간적이고 만족스럽지 못하며” 한물간 모델이라는 점을 더욱 확신했다. 그는 탐사를 중단하고 스탠퍼드대에 안식년을 신청한 뒤 자신과 동료 과학자들을 영원히 뭍에 머물게 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다음해 그는 한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그 구상으로 과학과 탐사를 새로운 시대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1981년 12월호에서 그는 그 아이디어를 ‘텔레프레즌스’라고 명명했다.
한편 얼은 1979년 381m 단독 잠수 기록을 세웠을 때 투박한 잠수장치(그녀는 ‘걸어다니는 냉장고’라고 불렀다) 속에 들어가 두시간 동안 해저를 걸었다. 매우 불편했다. 특히 그 잠수장치의 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대체 물체가 잡히지 않아! 막대기 끝에 펜치를 달아놓은 것 같아.”
그녀는 나중에야 강철선의 다른 쪽 끝에 있는 남자(그녀가 무엇엔가 얽히거나 끼일 때 생명을 구해주려고 대기했다)가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는 그 장치를 만든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의 이름은 그레이엄 호크스였다. 당시 32세로 엔지니어였던 호크스는 자칭 영국의 ‘3류’ 도시에서 우편집배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리하고 안경을 낀 그는 그 도시에서 세계 최고의 잠수정을 설계했다. 얼은 그런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불평을 계속했다. 갑판에서, 부두에서, 술집에서, 식당에서 그에게 따졌다. 하와이에 함께 머문 동안 그녀는 오로지 ‘왜?’만 이야기했다. 해저 바닥까지 도달할 수 있고 조종이 가능한 잠수정을 왜 만들지 못했느냐?
호크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돌이켰다. “어휴, 좀 그만 하세요. 그 이유를 대 볼까요? 우선 바다 밑바닥은 머리를 돌게 할 정도로 악조건이죠.” 그는 어둡고, 춥고, 부식성 강하고, 9m 하강할 때마다 압력이 배로 증가하기 때문에 잠수정이 붕괴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얼은 물러서지 않았다. 호크스는 영국으로 돌아간 뒤 얼이 던진 질문과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녀는 열두살 연상으로 세 자녀의 어머니이며, 두 번 이혼했고, 경력이 아주 화려한 여성이었다.
호크스는 얼이 쓴 책 ‘해저 미개척지 탐험(Exploring the Deep Frontier )’의 출판 기념회에 맞춰 미국으로 갔다. 거기서 해저 밑바닥까지 내려가 돌아다닐 수 있는 잠수정 모습을 냅킨에 그려 보여줬다. 몇 달 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얼을 만나서는 그녀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확신하는 다른 무엇을 내놓았다. 새로운 잠수정 팔의 설계였다. 그 안에 탄 다이버의 손이 그대로 연장된 듯이 부드럽게 작동하는 로봇팔이었다.
얼마 후 호크스는 캘리포니아주로 가서 오클랜드 힐스에 있는 얼의 집으로 들어가 동거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해저탐사를 위한 잠수정 설계 작업에 몰두했다. “우리 둘 사이엔 아이가 없었다”고 30여 년 뒤인 최근 얼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대신 우리에겐 잠수정이 있었다.”
그들은 회사를 두 개 세웠다. 처음에는 자녀들, 어머니, 거북이, 말 두 필, 꼬리 없는 검은 고양이 여러 마리, 희귀한 도마뱀, 늙은 애견 블루와 함께 사는 공간에서 작업했다. 호크스는 뒤뜰 마구간을 차지했다. 얼의 장녀 리즈가 버클리대에서 돌아왔을 때 집안의 수영장은 과학 실험장으로 변해 있었다. 다이빙 보드가 사라지고 대신 새로 개발한 기계를 잠수시키는 금속 받침대가 놓여 있었다. 수영장 바닥은 칠흑같이 검게 칠해져 있었다. 보통 사람 눈에는 해저로 통하는 관문처럼 보였다.
1984년 꿈이 실현됐다. 호크스는 냅킨에 스케치했던 설계를 바탕으로 1인용 잠수정에 들어가 910m 이상 잠수에 성공했다. 그 기록은 나중에 캐머런이 깼다. 얼도 그 뒤를 따라 단독 잠수에 성공하면서 여성 최고 기록을 세웠다.
곧 그들은 해저 바닥까지 내려 갈 수 있는 잠수정 개발을 시작했다. 호크스가 테스트를 했고, 얼은 곧 개발될 그 잠수정이 과학을 수행하고 유인탐사를 위한 꿈의 기계를 만들기 위한 첫 단계라고 홍보하며 투자를 유치했다. 얼과 호크스는 그 프로젝트를 ‘대양 에베레스트(Ocean Everest)’로 불렀다. 인기가 좋았다. 전문 잡지 파퓰러 사이언스와 파퓰러 미캐닉스에서 상세히 소개됐다. 해양기술학회 학술지는 특별호로 그 프로젝트를 다뤘다.
얼과 호크스는 1986년 결혼했다. 1990년까지 매년 실제 잠수정이 드디어 만들어지는 해인 듯했다. 그러나 필요한 자금이 확보되지 않았다. 결혼도 그 스트레스를 견디지못했다. “너무도 슬픈 일이었다”고 얼의 딸 리즈가 말했다. 두 사람은 1990년 갈라섰고 ‘대양 에베레스트’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과학계 인식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발라드가 앨빈을 이용한 해저탐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계속 유인탐사를 비판했다. 학술대회가 열릴 때마다 발라드와 얼은 공개적으로 언쟁을 벌였다. “사람들 앞에서 말다툼을 했다”고 발라드가 돌이켰다. 싸움은 계속 됐다. “그녀는 인간적이고 거의 영성적인 차원에서 주장을 폈다”고 발라드가 말했다. “하지만 난 논리적으로 뛰어난 독일인 손에 자랐다.”
발라드는 1980년대 초 미 해군 당국을 찾아가 해저 바닥에서 영상을 전송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간을 해저에 아예 보내지 않는 방법이었다. 해군은 그 아이디어에 투자했다. 1982~87년 그는 처음엔 ‘아르고’호, 다음은 ‘제이슨’호를 만들었다. 완전히 원격으로 조종되는 심해 잠수정이다. 바다에 있는 잠들지 않는 ‘전자 눈’인 셈이다.
그는 자신이 아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그 잠수정의 가치를 입증해 보이려 했다. 타이태닉호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그는 로봇을 이용해 해저 바닥을 수색하면서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침몰 사건 3건의 현장을 찾아내는 탐사를 이끌었다. 타이태닉호, 비스마르크호, 루시타니아호였다. 그때도 그는 잠수정을 타고 해저로 갔지만 이제 그에게 중요한 것은 로봇이었다.
거의 곧바로 변화의 조짐이 분명해졌다. 얼은 호크스와 이혼한 뒤 NOAA의 책임 과학자 자리를 수락했다. NOAA는 ‘바다의 NASA’로서 1970년 설립됐다. 그 자리를 맡으면서 얼은 NOAA에 ‘O(해양)’를 다시 찾아 넣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그러나 1980년대와 90년대에 해양연구 지원은 거의 50%가 줄었다. 얼은 좌절하고 1992년 사임했다. 발라드의 프로젝트가 뜨기 시작할 때였다.
발라드는 미국 각지에 있는 교실과 강당을 연결해 500만 달러짜리 무인 잠수정에 설치된 ‘전자 눈’을 통해 학생들에게 해저 가상 탐험을 제공했다. 2003년 그는 NOAA와 함께 ‘탐사 지휘소’ 네트워크 설립에 착수했다. 뭍에 있는 과학자들이 생중계되는 해저비디오를 제공받고 탐사를 원격 조종하는 관제실을 말한다.
이 네트워크의 ‘관제 센터’가 2009년 로드아일랜드대에 설립됐다. 공식 명칭은 ‘내계 공간 센터(Inner Space Center)’다. 내부에는 거대한 화면, 수많은 컴퓨터, 데이터가 가득하다. 과학자 팀이 커피를 마시고, 간식을 하러 자리를 비우고, 실시간으로 해저를 모니터한다. NASA 관제팀이 화성에 착륙시킨 로봇을 추적하는 방식과 똑같다.
이제 발라드는 텔레프레즌스를 새로운 극한으로 가져갈 생각이다. 이번 여름 그는 최초로 24시간 대양탐사실을 가동할 예정이다. 로봇 잠수정 수를 3배로 확충하는 제휴도 체결했다. 발라드는 “바로 지난 두 달 동안 텔레프레즌스가 해양탐사계에서 공식 인정되면서 본격적인 무인 해저탐사 시대가 개막됐다”고 말했다. 탐사 모선 자체도 자동화해서 바다에 아예 사람을 보내지 않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발라드는 텔레프레즌스를 아주 실용적인 논리로 옹호했다. 그러나 따져 묻자 그 역시 좀 더 개인적인 영역으로 들어갔다. 바다에 나가 일하면서 생긴 심리적, 대인관계적 손실도 텔레프레즌스를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인 듯했다. 그는 인간을 극한의 해저로 내려 보내는 일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unnatural)”고 말했다. 해저탐사라는 미명 아래 계속 사람들을 희생하도록 만들 도덕적 근거와 권리가 누구에게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발라드는 코네티컷주에 있는 자택에서 전화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녹색 물체와 약간의 물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렇다. 지금 나는 딸과 아내가 귀가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중에 우리는 와인 한잔씩 할 것이다. 하지만 옆방에 가면 지중해 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다. 어디든 갈 수 있다.”
해저탐사를 위한 재정지원은 발라드가 거의 전부 흡수하고 있지만(학계에서 별명이 ‘스폰지밥’이다) 모두가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건 아니다. 크리스 저먼은 우즈홀 해양연구소 심해탐사 담당 책임 과학자다. 우즈홀 연구소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곳에 도달0할 수 있는 로봇과 아직도 작동하는 가장 오래된 심해 잠수정을 운영한다.
앨빈의 난해한 개조 작업은 예정보다 수년이나 늦어지고 있지만 저먼은 오는 5월 운영 재개를 기대한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과학 센서가 무엇인가(What’s the best scientific sensor we have)?” 그가 말했다. “인간의 마음이다(The human mind). 인간의 마음 만이 유일하게 3D로 사물을 볼 수 있다(It’s the only thing that sees in 3-D).”
몬터레이만 해양연구소의 선임 과학자 브루스 로빈슨은 해저 로봇이 제공하는 영상을 작은 파이프를 통해 볼 수 있는 이미지에 비유한다. 나무는 보이지만 숲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유인 잠수정이 해저 연구에서 훨씬 큰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고 강조했다.
지난 10년 동안 정부가 주관한 패널 두 개도 유인 잠수정을 지지했다. 그들은 3단계 연구 과정을 제시했다. 첫째 로봇으로 해저를 무조건 훑고, 둘째 원격 조정되는 전자 눈으로 흥미 있는 모든 것을 자세히 관찰하고, 마지막으로 사람이 내려가 최종적으로 검토하는 단계다. 기계가 질문을 찾고 사람이 답하는 식이다.
실비아 얼도 동의했다. “빌라드의 로봇 잠수정은 한가지 과정은 아주 잘 할지 모른다. 그 점은 충분히 인정한다. 하지만 해저를 탐사하는 다른 방법을 포기하거나 경멸해선 안 된다.” 얼은 호크스와 이혼 후 독자적인 회사를 차렸다. 지난해 여름 그 두 사람은 해저탐사 경주에서 서로 다른 팀에 속했다. 호크스는 비행기 설계 원칙을 바다에 적용하는 해저 ‘비행’을 추진했다.
그 결과가 1990년대에 선보인 딥플라이트(DeepFlight)였다. 그 모형이 수정을 거쳐 리처드 브랜슨이 탄 버진 오시아닉의 잠수정이 됐다.
한편 얼은 캐머런과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2010년 세계에서 가장 깊은 러시아 바이칼 호수 바닥에 잠수해 캐머런의 50회 생일을 축하했다. 그들은 아나톨리 사갈레비치 러시아 심해 잠수정 연구소장의 초청으로 그곳에 갔다. 사갈레비치는 캐머런에게 호화스러운 만찬을 베풀었다. 코사크 춤 공연이 펼쳐졌고, 마지막에는 기병도 칼날 위에 얹어 제공되는 보드카 한잔이 나왔다.
캐머런이 사용한 잠수정의 로봇팔, 압력 테스트를 통과한 잠수정 하단부, 그리고 여러 작은 부품은 얼의 회사인 딥오션 엔지니어링 앤 리서치에서 제작됐다고 그 회사를 운영하는 얼의 장녀 리즈가 말했다. 무상이 아니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그러나 다른 대가도 있다. 캐머런이 직접 잠수하면 유인탐사 노력이 각광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캐머런이 잠수에 성공했을 때 얼은 나지막히 “예스!”라며 기뻐했고 리즈는 소라고둥 껍질을 메아리치게 불었다.
캐머런 자신도 마리아나 해구 잠수를 인간 존재의 승리라며 자찬했다. 그는 e-메일 쿡제도 멕시코 벨리즈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라서 로봇이 되겠다고 꿈꾸는 아이는 없다. 대신 그들은 탐험가가 되는 꿈을 꾼다. 인간 탐험가를 제외시키고 로봇으로만 탐사하면 흥미와 열의가 사라진다.”
리처드 브랜슨도 동의했다. “해양의 99.9%가 아직 탐사되지 않았다”고 그는 뉴스위크에 말했다. “우리는 바다 저 아래서 인어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반면 진짜 해저 연구자들은 지구의 맥 뛰는 핵심부와 인간 존재의 비밀, 그리고 생존 방법을 찾으려 한다.
캐머런이 깊은 해저 밑바닥에 도착했을때 호크스는 수천㎞ 떨어진 남태평양에서 벤처 자본가 톰 퍼킨스의 대형 요트를 타고 새로운 잠수정 수퍼 팰컨을 테스트했다. “우리는 럼주와 콜라를 마시며 캐머런의 성공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호크스는 말했다. “경주에서 우리가 이기지 못했다. 물론 실망스럽다.” 하지만 그에게 새 잠수정은 재미를 위한 것에 불과하다. 과학적 측면에서 그는 무인탐사를 주장하는 발라드 편으로 돌아섰다.
그래서 이제 얼은 외톨이가 됐다. 지난해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은 심해 해저에 닿을 수 있는 쌍둥이 잠수정을 제조하려는 얼에게 투자를 거부했다. 그러나 ‘해저 여왕 폐하’인 얼은 멋지게 되살아났다. 최근 비영리 기관 글로벌 오션스와 제휴해 글로벌 딥 서브머전스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세계적인 유인 해저탐사를 위한 마지막 노력이다. 잠수정 설계와 운용 계획은 마련됐다. 이제 약 5000만 달러만 있으면 된다. 옛 우주왕복선 변기 두 개의 값보다 싸다.
하와이에서 우리가 헤어질 때 얼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우리는 모선 뒤에 서서 가랑비를 맞으며 미래를 이야기했다. 부근을 지나가는 트롤 어선에서 돛대에 장식된 크리스마스 등불이 반짝였다. “꿈이 실현되고 있다”고 얼은 평생에 걸친 해저탐사를 두고 말했다. “지금 모든 조건이 최적이다.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이제 처음 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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