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 REPORTER AT LARGE - 광대들의 정치극
NB REPORTER AT LARGE - 광대들의 정치극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유명한 야외 꼭두각시극에 이탈리아 어린이들이 몰려든다. 역사 중심지 로마의 위쪽 자니쿨러 언덕에서 열리는 테아트리노 디 풀치넬라(Teatrino di Pulcinella)다. 두 캐릭터가 뚜렷한 이유 없이 서로를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는 인형극이다.
비명을 지르는 꼭두각시 인형들의 멍청함에 필적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최근 이탈리아 정치인들의 행동이 그와 다를 바 없다. 2월 24~25일 이탈리아 유권자들은 새총리를 선출하는 투표를 한다. 그러나 진지한 선거라기보다는 입후보자 면면이 마치 부조리극을 광고하는 전단지의 등장인물 리스트를 옮겨 놓은 듯하다.
어쩌면 그것은 이탈리아인의 무관심을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서 마음을 정하지 못한 유권자가 전체의 3분의 1을 웃돌았다. 선거가 결선투표까지 간다고 점치는 분석가가 많다. 이탈리아가 또다시 선장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포퓰리즘 대 현실주의로 귀결된다.” 로마에 있는 존 캐벗 대학 정치학과의 페데리고 아르젠티에리 교수가 말했다. “나라가 가진 문제들에 뛰어난 해결책을 제시하는 후보가 거의 없다.”
이탈리아에는 2011년 11월 이후 민주선거로 선출된 지도자가 없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당시 총리가 금융 및 섹스 스캔들의 허리케인에 휘말려 추락했다. 76세의 그 억만장자는 그 뒤 탈세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게다가 낯뜨거운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로 재판대에 섰다. 17세의 모로코 벨리 댄서와 최소 13회 이상 돈을 주고 성관계를 한 혐의다. 총선 후 몇 주 내에 그 재판의 평결이 내려진다. 유죄로 인정될 경우 항소하겠다고 베를루스코니는 공언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눈짓과 손짓으로 적당히 얼버무리며(wink-and-nudge) 태평하게 선거운동을 해왔다. 사립학교 무상 교육부터 그의 사퇴 후 국민이 납부해야 했던 부담스러운 재산세 환급 등 온갖 공약을 내걸었다. 그가 소유한 AC 밀란 구단은 스타 축구선수 마리오 발로텔리를 영입했다. 그것이 축구팬의 표를 끌어모으기 위한 책략이라는 추측도 있다. 발로텔리는 총선 첫날 AC밀란 데뷔전을 갖는다. 그가 어림잡아 4만 표를 베를루스코니에게로 끌어올 것으로 라 스탐파 신문은 추산한다.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에선 규칙이 탄력적으로 운용된다.” 로마 아메리칸대학의 정치분석가 제임스 월스턴이 말했다. “진지하든 않든 베를루스코니는 그가 잘 아는 유권자들에게 어필한다.”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중도우파 정당은 외국인 혐오증의 분리주의 정당 북부동맹과 다시 손을 잡았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그들이 3분의 1에 가까운 표를 획득하리라고 예상됐다.
그러나 이번 선거운동에서 정말 웃기는 캐릭터는 베를루스코니뿐이 아니다. 이번 총선의 진짜 광대는 코미디언 베페 그릴로(64)다. 그의 광적인 추종세력은 망언을 일삼는 베를루스코니의 과장된 연설보다 이탈리아의 안정을 훨씬 위협한다. 그 만담 코미디언은 17세기 영국의 반역자 가이 포크스를 우상화한다.
그릴로는 이탈리아 항의시위 무리의 지지를 얻었다. 항의자들은 그를 의회에 진출하는 통로로 여긴다. 그가 내세운 후보 중 의원 경력자는 한 명도 없다. 그렇지만 그릴로는 파이브 스타 운동(Five Star Movement)으로 상당한 지지세력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 자체로 정당은 아니지만 분명 정치조직처럼 활동한다. 그는 이번 선거운동의 다른 어떤 후보보다 소셜미디어를 능숙하게 활용한다. 그의 beppegrillo.it 블로그는 정치를 뛰어넘어 이탈리아의 사이트를 통털어 온라인 구독자가 가장 많다.
그릴로는 2007년 ‘V 데이’ 항의시위를 개최하면서 국민적인 컬트 아이콘으로 떠올랐다(V는 ‘꺼져라’는 뜻의 vaffanculo를 상징한다). 부패정치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는 취지였다. 코미디언 출신인 그는 정치집회를 매번 강도 높은 무대극으로 탈바꿈시킨다. 사이코 전도사 역을 맡아 나라의 병폐를 큰소리로 열거하며 욕설을 퍼붓는다. 일장 연설이 끝날 무렵에는 벌겋게 달아오르고 복어처럼 부푼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린다. 거침없이 인신공격을 해대며 반체제 프로파간다를 토해낸다.
최근 어느 날 밤, 밀라노의 고딕 성당 앞에 3만 명가량이 운집해 그릴로의 광적인 연설에 귀기울였다. “정치인들에게 고한다. 항복하라.” 그가 큰소리로 외쳤다. “너희들은 나라를 말아먹고 수많은 국민의 삶을 망쳤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 군중이 고함으로 호응했다. “도둑들! 도둑들!”
그릴로의 정치노선은 엄밀히 말해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다. 양 극단에서 포퓰리스트 아이디어만 뽑아왔다. 유로존(유로화 사용권)에 반대하며 자신의 후보들이 승리하면 유로존 회원국 문제를 국민투표에 붙이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반체제 구호는 반부패를 토대로 한다. 자신의 블로그에 전과자 의원이 몇 명인지 발표한다.
그릴로는 의원으로 출마하지 않고 제3자로 남겠다고 약속했다. 의회 밖에서 소속 계파 의원들을 인도하겠다는 뜻이다. 그의 파이브 스타 운동이 승리할 경우 누가 총리를 맡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제껏 어떤 인물도 부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선 그릴로의 인기가 가장 높다. 현실에 염증을 느낀 이탈리아인들에게 확실하게 어필하는 항의의 상징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그의 비정당 운동이 20% 가까운 지지를 받았다. “그릴로가 인상만큼 위협적이지는 않다”고 아르젠티에리가 말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갈수록 불어나는 불만세력을 대변한다. 전통 정당으로는 그들을 달래지 못한다.”
여론조사에선 피에르 루이지 베르사니(61)의 중도 좌파 정당이 34% 가까운 지지로 선두를 달린다. 따라서 베를루스코니나 그릴로 모두 총선에서 완승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 베르사니를 견제하는 야당을 형성할 만큼 충분한 권력을 얻게 된다. 베르사니가 승리한다 해도 결코 호감을 주는 후보는 아니다.
카리스마라곤 거의 없는 매력 없는 정치인이다. 그의 선거진영은 미묘한 베를루스코니 때리기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베를루스코니에게 더 강력한 카운터펀치를 연달아 맞고 말았다. 한번은 베를루스코니가 베르사니 흉내로 사람들을 배꼽 빠지도록 웃게 만들었다. 베르사니 선거운동의 그 무엇보다 훨씬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베르사니가 승리한다 해도 거의 분명 마리오 몬티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분석가들은 입을 모은다. 그 기술관료 출신 과도내각 총리와 연합해야 통치에 필요한 권력을 얻는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그 뒤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풀리아주 출신의 니치 벤돌라와도 연정 파트너를 구성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부자연스럽고 위험한 연정이 구성될 경우 몬티와 니치 벤돌라를 붙잡아 두기 위해 많은 양보를 해야 한다.
할아버지 같은 이미지의 경제학 교수 몬티는 최근 ‘공감(Empathy)’이라는 애완견을 캠페인 얼굴 사진으로 내세웠다. 그는 2011년 11월 베를루스코니의 뒤를 이어 재정난 해결의 과업을 맡아 총리에 올랐다. 취임 후 몇 달도 안 돼 글로벌 무대에서 이탈리아의 신뢰성을 원상회복시켰다. 베를루스코니 시절 웃음거리였던 이탈리아가 진지한 파트너의 위상을 되찾았다.
그러나 예산안 투표에서 베를루스코니 정당 의원들이 지지를 철회했다. 결국 지난해 12월 몬티가 사퇴하면서 베를루스코니는 복수에 성공했다. 이탈리아는 몬티 덕분에 국제무대에서 다시 성인 대접을 받게 됐다. 하지만 많은 이탈리아인은 그의 냉철함과 진지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엄격한 긴축조치와 개혁으로 많은 국민이 사업체를 잃고 부채의 늪으로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니 유권자들이 그에게 좋은 감정을 갖기가 어려울 듯하다.
그릴로와 마찬가지로 몬티도 그의 이념을 지지하는 비정당 후보들을 이끈다. 최근 여론조사에선 그의 지지율이 14%에도 못미쳤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의 후보들이 승리할 경우 몬티가 총리직을 맡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베르사니가 그에게 재무장관직을 맡기는 시나리오가 더 가능성 있다. 그럴 경우 긴축이 여전히 중요한 현안이라는 뚜렷한 메시지를 시장에 보내게 된다.
총선을 불과 며칠 남겨둔 시점에서 모든 후보들이 전국 각지를 돌며 선거운동을 벌였다. 군중을 상대로 약속을 하고 사탕발림을 하고 윙크를 했다. 우스꽝스러웠지만 이 순회공연은 의기소침한 이탈리아 국민의 시름을 잠시나마 덜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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