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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파워피플 [26] - 온라인 경제정보산업 창조한 혁신가

글로벌 파워피플 [26] - 온라인 경제정보산업 창조한 혁신가

12년 뉴욕시장 지내며 행정 수완도 … “전 재산 나눠주고 가겠다” 기부 열중
미국 뉴욕시장을 12년 간 역임한 마이클 블룸버그는 연임 제한에 걸려 12월 31일 시장직에서 물러난다.



현직을 떠나도 위력이 넘치는 사람이 있다. 넘치는 총기와 반짝이는 아이디어, 강한 추진력으로 언제, 무슨 일을 새롭게 벌여 세상을 바꿔놓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마이클 블룸버그(71)가 그런 사람이다. 블룸버그는 12년 간 재임한 뉴욕시장 자리를 올해 12월31일로 물러난다. 2002년 1월1일 취임해 3선에 성공했지만 연임 제한에 걸려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다. 시장으로 재임하며 다양한 정책을 시도해 미국은 물론 세계의 경제수도인 뉴욕의 위상에 걸맞은 각종 진보적인 정책을 펼쳤다.

뉴욕시장 자리에 도전하면서 그만둔 블룸버그통신 회장이라는 직함은 아직도 사람들에게 기억된다. 나이가 71세지만 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의 인생이 워낙 창조적이고 정열적이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는 지금까지 세 가지 분야에서 활약해오며 이미 큰 족적을 남겼다. 사업가·정치인, 그리고 자선가로서의 면모다.



연임 제한 걸려 연말 뉴욕시장 물러나우선, 사업가로서 온라인 미디어에 혁명을 일으키며 엄청난 부를 쌓았다.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는 올 3월 블룸버그의 재산을 310억 달러로 추정했다. 세계 13위의 부자다. 그는 지난 한 해 사이 재산을 가장 많이 불린 인물이기도 하다. 지난해에는 재산 220억 달러로 세계 20위였다. 재산뿐 아니라 영향력도 대단하다. 그는 포브스가 올 10월 발표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사람 명단 29위에 이름을 올렸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한 뒤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마친 유대인 출신의 블룸버그는 월가에 뛰어들어 주식중계인으로 경력을 쌓았다. 1973년 당시 세계 굴지의 투자은행이던 샐러먼 브러더스(Salomon Brothers)에서 제너럴 파트너에 올라 자산거래 부문에 이어 시스템 개발을 담당했다. 잘나가던 블룸버그는 1981년 창업을 하며 기업인으로 변신했다. 변신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 해 샐러먼 브러더스가 원유·광물·곡물 등을 거래하는 거대 상품 교역업체 피보에 인수되면서 회사에서 나가게 됐기 때문이다. 39세에 직장을 잃었지만 퇴직금은 만만한 금액이 아니었다. 1000만 달러나 됐으니 말이다. 여생을 편안하게 먹고 살 수 있는 액수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창업이라는 도전이었다. 그것도 그때까지 세상에 없던 새로운 비즈니스를 상대로 삼은 벤처 창업이었다.

그가 선택한 사업 아이템은 금융계에서 근무하는, 또는 근무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필요성을 절감하던 것이었다. 그것은 경제 정보였다. 블룸버그는 정보에 목마른 금융계에 이를 가장 이른 시간에, 가장 효과적으로 제공하는 사업 모델을 고안했다. 그는 대형 단말기 화면을 통해 주가와 환율, 주요 물품 가격 등 경제지표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금융정보 제공업체를 세웠다.

블룸버그 단말기로 불리는 이 단말기에는 이 같은 정보가 그래픽으로 제공돼 주식거래인 등이 즉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줬다. 실시간 경제 뉴스도 함께 제공했다. 금융 데이터·뉴스 서비스라는 새로운 비즈니스를 고안한 것이다. 금융계나 경제계에서 누구나 필요성을 느꼈지만 이를 비즈니스로 만든 건 그가 최초였다.

블룸버그는 혁명을 불러왔다. 블룸버그 단말기는 금융계는 물론 미디어 업계, 정보기술(IT) 업계에까지 뒤흔들었다. 그는 금융정보산업이라는 새로운 산업을 창조한 것은 물론 컴퓨터를 이용한 온라인 미디어라는 혁신적인 상품을 만들어냈다. 인터넷이 나오기도 전에 온라인의 중요성을 먼저 간파한 것이다. 그가 단말기를 통해 정보를 제공하는 블룸버그 방식은 이후 인터넷 미디어와 정보 제공방식에서 하나의 모델이 됐다.

그는 자사가 제공하는 이런 정보를 마켓 마스터 단말기라는 이름의 특수단말기를 통해서만 볼 수 있도록 했다. 정보를 원하는 회사에 단말기를 제공해주고 요금을 받는 식이다. 월가의 금융업체는 신속히 제공되는 고급 정보에 돈을 지불할 준비가 돼 있었다. 보가 돈을 낳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장 활용하기가 쉽도록 고차원 기술을 적용해 정보의 상태와 변화를 그래프 모양으로 나타내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블룸버그 단말기는 나오자마자 금융계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창업 이듬해인 1982년 월가의 금융업체인 메릴린치가 블룸버그의 첫 고객으로 나섰다.

메릴린치는 22대의 마켓 마스터 단말기를 설치한 것은 물론 3000만 달러를 투자하기까지 했다. 블룸버그는 1990년까지 8000대의 단말기를 설치해 사업을 궤도에 올려놨다. 그 뒤 블룸버그 뉴스, 블룸버그 메시지, 블룸버그 트레이드북 등 부속상품도 내놨다. 지난해 연말 기준으로 블룸버그 단말기는 전 세계에 31만 대가설치됐다. 뉴욕에서 라디오도 운영하고 있다.

성공한 혁명가에겐 보상이 따르는 법이다. 그는 이후 20년 동안 블룸버그 통신의 회장이자 대표이사로 일하면서 IT와 미디어 분야에 걸쳐 혁신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혁신가이자, 기업가이자 부자이자 미디어 경영자로서도 이름을 떨치며 전 세계에서 영향력을 자랑했다. 블룸버그는 블룸버그 통신의 창립자로서 지분 88%를 보유하고 있다. 이 지분이 블룸버그 재산의 원천이다.

정치인으로선 뉴욕시장을 맡으며 행정 솜씨를 발휘했다.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어 뉴욕의 면모를 일신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평생 민주당원이던 그는 2001년 뉴욕시장에 출마하기 위해 공화당으로 말을 갈아탔다. 그가 공화당 뉴욕시장 후보경선을 치르던 날 세계무역센터 9·11 테러가 벌어졌다.

하지만 그는 법인세 유예, 상업용 건물 리모델링에 대한 재산세 경감 혜택 등의 정책으로 기업을 불러들이고 뉴욕의 이미지 변신을 꾀했다. ‘비만과의 전쟁’ ‘금연 정책’ ‘정크 푸드 추방운동’ 등을 벌여 뉴욕을 건강한 21세기형 첨단유행도시로 변모시킨 것도 빼놓을 수 없다.

2001년 뉴욕시장에 당선됐을 때의 마이클 블룸버그(가운데).





성공비결 “소변 참고 휴가 짧게 가는 것”이런 친기업 정책에 힘입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뉴욕은 건재를 과시했다. 올 3월 미국 인구통계국은 60여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해 뉴욕시의 전입 인구가 전출 인구보다 많았다고 발표했다. 830만명을 기록해 2010년 이후 16만1500여명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뉴욕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외곽지역이 베드타운으로 발달하면서 꾸준히 인구가 줄었다. 블룸버그는 “시민의 평균수명 증가는 뉴욕 시민의 삶의 질이 좋아진 때문이며 전입자 증가는 뉴욕 생활에 대한 전 세계 사람의 동경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2005년 뉴욕시장에 재선된 지 2년 만에 공화당을 탈당해 무소속이 됐다. 이후 미국 무당파 정치인의 아이콘으로 통해왔다. 세 번째 시장선거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했다. 2008년과 지난해 미국 대선 후보와 2010년 뉴욕주지사 후보로 거론됐지만 출마를 포기하고 뉴욕시장 업무에 매진해왔다. 뉴욕 시장으로 일하면서도 그는 파워맨이었다. 미국 경제수도 시장으로서 연방 최고지도자급의 위용을 보인 때문이다. 그는 총기규제 등 문제에서 진보적인 입장으로 연방의회에 맞서기도 했다.

그는 일벌레로 유명하다. 8월에 성공비결을 묻는 질문에 “가급적 소변을 참고 휴가도 최소한 짧게 가는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바람에 사람들을 아연 실색하게 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뉴욕시장을 지내는 12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된 휴가를 가지않았다. 바하마에 개인 별장이 있지만 주말에 이용하는 정도일 뿐 장기 휴가는 가지 않았다.

그는 10월 30일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퇴임 뒤 계획을 묻는 질문에 “여자친구와 2주 동안 하와이와 뉴질랜드로 여행을 갈 것”이라고 말했다. “골프도 치고 스페인어도 배울 생각”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1993년 아내와 이혼한 후 뉴욕주 은행감독관 다이애나 테일러와 교제 중이다.



자선사업도 전략적·창의적으로블룸버그는 기부천사로도 유명하다. 그는 자신이 세운 블룸버그 재단을 통해 거액을 꾸준히 기부해 왔다. 2011년 3억1100만 달러, 2010년 3억3200만 달러, 2009년 1억5000만 달러, 2007년 4700만 달러, 2006년 6000만 달러, 2005년 2억4000만 달러를 각각 기부하거나 기부를 약정했다. 이는 알려진 금액일 뿐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그는 2001년부터 2010년까지 카네기재단에 매년 500만 달러에서 2000만 달러를 익명으로 기부해 왔다. 그가 내놓은 기부금은 암 투병가족을 돕는 비영리단체에 지원됐다.

그는 돈만 내놓는 데 그치지 않았다. 자선사업도 전략적으로, 창의적으로 꼼꼼하게 펼쳐왔다. 공중보건·예술진흥·정부혁신·환경·교육의 5개 분야로 나눠 기부금 포트폴리오를 형성했다. 그가 특히 관심을 기울이는 건 공중보건, 그 중에서도 담배로 인한 질병을 막는 일이다. 특히 금연운동에 집념을 보여왔다. 2002년 뉴욕 시장으로 취임한 이후에는 담배 판매나 흡연을 규제하는 각종 정책을 추진했다.

3월에는 뉴욕의 상점에서 담배가 아예 눈에 띄지 않게 하라는 진열금지 조례를 내놓기까지 했다. 골목 가게에서 대형 수퍼마켓까지 모든 상점은 담배 종류 상품을 캐비닛, 서랍, 카운터 아래, 커튼 뒤 등 손님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보관하게 하는 내용이다. 담배 진열 금지는 미국에서 최초다. 블룸버그는 주로 어린 세대가 담배에 중독되는 것을 초기에 막으려면 이런 조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블룸버그는 시장 재임 중 뉴욕시의 담배 세율을 전국 최고 수준으로 올렸으며 식당·술집·공원·해수욕장에서의 흡연을 모두 금지했다. 가끔은 세금으로 담배의 악영향에 대한 광고까지 해왔다. 담배 쿠폰을 주거나 단골 고객에 대한 할인, 최저 가격 제안 등 담배에 대한 모든 판촉행위도 단속한다. 담배 구매 제한 연령을 21세로 올려 뉴욕시를 미국에서 담배 구매 제한 연령이 가장 높은 대도시로 만들었다.

이런 담배 규제 정책의 일부는 법원에서 퇴짜를 맞기도 했지만 블룸버그는 꾸준히 금연정책을 펴왔다. 그는 특히 개인재산 6억 달러 이상을 기부해 전 세계적으로 금연운동을 벌여왔다. “나는 전 재산을 나눠주고 가야 한다고 강하게 믿는 사람이며, 최선의 재정계획은 장례업자에게 줄 수표 한 장만 남기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블룸버그의 말이다. 그가 왜 존경 받는 글로벌 파워피플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지를 잘 알려주는 대목이다.

블룸버그는 유대인 사회의 영웅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최근 ‘유대인 노벨상’으로 불리는 상금 100만 달러의 제네시스 상을 제정하고 그를 제1회 수상자로 선정했다. ‘탁월한 업적을 통해 유대인들의 근본 가치를 실현한 비범한 인물’이라는 수상 기준에 맞아서라고 한다. 블룸버그는 내년 초 이스라엘에서 열릴 수상식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로부터 상과 상금을 받은 뒤 상금 100만 달러를 기부할 자선 단체를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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