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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이 될 생명연장의 꿈

악몽이 될 생명연장의 꿈

연기금·보험회사 관련 파생상품 탓에 금융위기 재연될 수도



현대의학은 생명연장의 꿈을 착실히 현실화하고 있다. 그러나 금융시장으로 들어서면 그 꿈은 악몽에 가까워진다.

악몽의 수위에 대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을 지닌 앨런 그린스펀은 “경제교과서와 시장의 수요공급 법칙을 송두리째 뒤흔들 강력한 힘”이라 표현하기도 했는데, 어떤 가공할 위험이 숨어있어서 그럴까.



그린스펀 “수요공급 법칙 송두리째 흔들 강력한 힘”인간의 기대수명이 지금보다 3년 더 길어진다고 해보자. 연기금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국제결제은행(BIS)의 8월과 12월 보고서에 따르면 이 경우 15조~25조 달러로 추산되는 글로벌 연기금의 지급 의무액은 1조4000억~3조 달러 가량 늘어난다.

연기금은 늘어난 지급 의무액만큼 운용수익을 더 내거나, 신규 연금 가입자를 확보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고스란히 장부에서 3조 달러의 구멍이 생긴다. 흔히 말하는 ‘장수(長壽) 위험’이다. 예상치 못한 지급 의무액이 늘어남에 따라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투자한 자산을 3조 달러어치 더 내다 팔아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그럼 연기금이 자산시장에서 뺀 돈은 연금 가입자의 손을 거쳐 얼마나 자산시장으로 되돌아올까? 할아버지 할머니의 약값·밥값·방값·라면값 등등을 빼고 나면 몇 푼 안될 거다. 그래서 사실 암치료제나 AIDS치료제가 개발됐다는 재료는 시장을 자지러지게 해야 정상이다. 연기금도 두 눈 뜬 채 모든 위험을 떠안을 순 없다.

그래서 등장한 파생시장이 ‘LRTM(Longevity risk transfer Market, 장수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한 시장)’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LRTM은 지난 7년 간 총 1000억 달러어치 계약을 이뤄냈다 한다.

물론 연기금이나 보험회사만 장수 리스크를 안고 있는 게 아니다. 퇴직연금제를 둔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해당 리스크를 분산시키려는 움직임도 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최근 작(作)으로는 GM과 프루덴셜 사이의 파생계약을 들 수 있다. GM은 푸르덴셜과 계약을 통해 퇴직 연금에 대한 노출을 줄였다. 40억 달러의 비용을 치르고 4만2000명의 퇴직자가 오래 살 위험을 제거한 거다. 이들이 예상보다 더 오래 살면 그 비용은 푸르덴셜이 치러야 한다.

도처에 깔려 있는 장수 리스크를 특정 금융회사가 모두 떠안을 순 없다. 미국의 월가가 그 빈틈을 내버려둘 리 없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2011년 골드먼삭스·도이치방크·JP모건이 내놓은 ‘Death Derivatives(죽음 파생상품)’라는 구조화 상품모형이다. 이들의 사업모델은 장수 리스크를 분산시키고 싶어하는 연기금과 보험사로부터 수수료를 받고 맞춤형 ‘죽음 파생상품’을 만든 뒤 이를 인수하고자 하는 국부펀드나 헤지펀드 등에게 파는 거다. 일종의 거간꾼 역할이다.

블룸버그 보도에 따르면 2012년 2월 도이치방크는 첫 거래를 성사시켰는데 네덜란드계 보험사인 아혼과 120억 유로 규모의 관련 스왑계약을 했다. 계약성사 직후 도이치방크는 해당 리스크를 다시 변동배당형 상품으로 구조화해 투자자들에게 넘겼다. 네덜란드 인구통계로부터 산출한 인덱스에 근거해 보험 가입자들이 얼마나 빨리 죽느냐에 따라 이 상품의 배당수익이 달라진다. 보험 가입자들이 터무니 없이 오래 살면 투자자들은 손실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런 구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모기지를 기초자산으로 이리 끼워 넣고 저리 끼워 넣어 다양한 파생상품을 만든 뒤 전 세계 금융시장을 한방에 훅 보내버린 2008년 미국의 모기지 파생상품과 닮아 있다. 장수 리스크 분산을 위한 파생시장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미국 내에선 당국의 자본 요건이 강화돼 월가의 투자은행들이 밀어붙이기 힘들어졌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다만 장수 리스크는 앞으로 줄어들기보다 늘어날 것이며 이를 분산시키려는 연기금과 보험사, 기업의 욕구는 커질 수밖에 없다. 그 틈새를 탐욕이라는 악마가 언제든 비집고 들 수 있는 환경이다.

BIS는 연기금 등의 장수 위험 분산을 돕기 위해 특수한 형태의 스왑시장과 헤지수단, 채권 등이 등장하고 있는데, 당국이 주의 깊게 대응해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준하는 리스크를 확대 재생산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장수 리스크로 인해 생겨나는 전반적인 손실은 향후 전 세계 금융시장을 위협할지 모른다고도 했다.

글머리에서 소개한 그린스펀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는 연준 의장 퇴임을 앞둔 몇 달 동안 “국채발행 물량이 증가해 10년물을 비롯한 중장기물 국채 금리가 상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금리는 오히려 떨어졌다. 연기금들이 국채를 대거 쓸어 담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린스펀은 이유를 알았다고 말했는데 “세상은 늙어가는 중이며 고령자들로 인해 시장과 경제 법칙은 다시 만들어 지고 있다”고 했다.

인구학이 말하는 것은 고령화 이슈가 금융시장을 뒤덮을 만큼 막대하다는 거다. 노동가능인구의 감소로 2030년쯤 미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증가 속도는 과거 50년 평균치에 크게 미달할 것(미국사회과학원의 분석)이다. 늙어버린 인구로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기에 성장률은 장기 하향 곡선을 그릴 수밖에 없다. 세계의 성장엔진이라던 중국도, 바다 건너 유럽도 예외가 아니다.

늘어난 노인인구로 자산시장 내 분위기도 바뀌고 있다. 노령층은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재산을 지키기에 급급하며 이로 인해 고정금리 자산에 대한 수요는 지속적으로 늘어 시장금리는 하락하고, 물가도 떨어진다. 디플레이션 위험을 치유하기 위해 중앙은행들은 돈을 퍼붓지만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지난 5년 간 선진국의 물가추이가 말해주고 있다.

유럽중앙은행 부총재를 지냈던 루카스 파파데모스는 “저금리 추세의 지속은 빈번한 디플레이션과 민간섹터의 무분별한 부채 증식, 그리고 이에 따른 버블이라는 돌림 노래를 만들어 낼 것”이라 우려했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은 “중앙은행들의 전통적인 수단은 고령화 경제에서 쓸모 없을지 모른다”고 진단했다.

중앙은행들의 비전통적인 돈 풀기는 세상을 어디로 인도하고 있을까. 그들이 ‘버블 생성-버블 붕괴’ 주기를 단축시키고 충격파(진폭)를 키우고 있다는 지적은 고령화 시대를 앞둔 세계에선 일정 부분 타당성을 갖는다.



2008년 금융위기 부른 모기지 파생상품과 닮아시라카와 마사아키 전 일본은행(BOJ) 총재는 “1990년부터 2000년까지 일본의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2배로 늘었음에도 정책당국자들은 인구변화가 경제를 얼마나 궁지로 몰아갈지 뒤늦게 알아차렸다”면서 “아울러 인구변화가 갖는 함의를 통찰하는 데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회고한 바 있다. 어쩌면 그 결과, 아베 신조 총리와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BOJ) 총재와 같은 극단적 인물이 나타나게 됐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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