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파워피플[37] - 디즈니 되살린 혁신의 대명사
글로벌 파워피플[37] - 디즈니 되살린 혁신의 대명사
1월 16일 국내 개봉한 월트디즈니의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 2월 12일 현재 누적 관객수 800만명을 넘었다. 이날까지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으로 812만4132명을 기록했다. 한국 영화 애니메이션 전체 시장의 역대 관객수에서 3위에 올랐다. 기존 3위였던 ‘트랜스포머 3’(778만명)를 거뜬히 눌렀다.
지금 추세라면 역대 2위인 ‘아이언맨 3’(900만명)를 제치는 건 물론 1위인 ‘아바타’(1362만명)의 아성에도 도전할 것으로 관측된다. 영어 원제가 ‘프로즌(Frozen)’인 이 영화는 1억50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블록버스터다. 지난해 11월24일 미국 시장에서 개봉한 지 1개월이 조금 넘은 1월 초 제작비의 두 배 수준인 3억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2월 9일까지 수입이 3억6867만8000달러를 넘어섰다.
엔터테인먼트 경영에서 능력 인정 받아성공의 뒤에 밥 아이거(63) 월트디즈니 회장 겸 CEO가 있다. 2000년 사장, 2005년 CEO에 오른 아이거는 그동안 디즈니의 혁신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시대에 맞춰 현실성과 진정성이 느껴지는 스토리와 개성이 강한 강렬한 캐릭터, 거기에 디지털과의 과감한 결합을 통해 새로운 작품을 시도했다. 이런 장기적인 혁신과 과감한 체질 개선의 결과가 이번 ‘겨울왕국’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겨울왕국’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디즈니 장르 애니메이션의 확연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공주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은 이전과 일맥상통하긴 하다. 디즈니는 세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년) 이래 공주를 주인공으로 다룬 영화를 전매특허처럼 줄이어 내놓은 게 사실이다. ‘인어공주’(1989년), ‘미녀와 야수’(1991년) 등으로 전성기를 이뤘으며 ‘공주와 개구리’(2010년), 3차원(D) 작품인 ‘라푼젤’(2011년) 등도 그 전통을 이었다.
하지만 ‘겨울왕국’은 ‘공주와 왕자가 만나 행복하게 살았어요’라는 기존의 상투적인 줄거리와 결말에서 벗어났다. 대신 완전히 새롭고 현대적인 공주 이야기를 펼친다. 공주라기보다 젊은 여성들의 성장과 연대의 스토리다. 관객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정도로 개성 있고 호감이 가며 현실성 있는 캐릭터들이 공감이 가는 이야기를 펼친다. 관객들은 그러면서 나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게 된다. 나와는 상관없는 허황된 이야기라는 디즈니의 고전적인 캐릭터와는 영 딴판이다.
줄거리는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을 모티프로 삼았다. 하지만 내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캐릭터의 특성에 맞춰 현실성 있게 확 바꿨다. 원작은 눈의 여왕에게 붙잡혀 간 소년을 구출하는 소녀의 이야기지만 ‘겨울왕국’은 공주 자매의 자매애, 여성으로서의 연대에 초점을 맞춘다. 에렌델 왕국에는 언니 엘사와 동생 안나라는 두 공주가 있다. 언니 엘사는 손만 뻗으면 원하는 곳에 눈을 내리게 하고 얼음을 만드는 마법의 재주가 있다.
마법의 힘이 두려워진 엘사는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려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을 가둬버린다. 성인이 된 엘사가 왕국을 떠나면서 본격적인 모험이 시작된다. 왕자를 만나 사랑을 이루기위한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서다. 동생인 안나는 언니를 지키려고 사랑을 유보한다. 현대 여성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한 진취적인 줄거리다. 달리 말하면 기존의 디즈니 스타일을 완전히 버리고 현대적으로 진화시킨 것이다. 시각과 시선이 마초이즘에서 페미니즘으로, 남성 중심에서 남녀공통으로 변신한 셈이다.
공주의 나이도 현실적인 시각을 반영했다. 기존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인공 공주의 나이는 10대였다. 백설공주가 일곱 난쟁이의 오두막에서 지내다 독사과가 목에 걸려 잠에 빠질 때의 나이는 불과 14세였다. 인어공주 에리얼은 16살에 뭍에 나와 에릭 왕자를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인 오로라는 16살이었고, 라푼젤은 18살이었다.
19세에 왕자를 만나 결혼하는 신데렐라가 나이가 많아 보일 정도다. 하지만, 엘사는 대관식 때 나이가 21살이다. 패션감각도 현대적이다. 몸을 다 가리는 풍성한 고전 드레스를 입고 나왔던 기존의 공주나 주인공과 달리 엘사는 몸매를 강조하는 드레스 차림에 현대 젊은이 감각의 화려한 색조화장까지 한다.
미국 영화전문지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이런 대성공에 힘입어 아이거는 ‘겨울왕국’의 속편 제작도 구상하고 있다. 속편 제작을 꺼려온 디즈니 전통에선 엄청난 변화다. 아이거는 ‘겨울왕국’의 콘텐트를 테마파크, 연극, 뮤지컬, 비디오 게임 등 다양한 장르로 발전시킬 계획을 벌써 준비 중이다. 현대 경영에서 그토록 중요하다는 빠른 판단과 의사결정이다.
아이거는 사실 오랫동안 디즈니의 2인자로서 지금의 혁신을 준비해왔다. 잠시 그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자. 그는 유대인이다. 미국 미디어 업계에서 성골인 셈이다. 하지만 성공한 유대인은 많지만 유대인이라고 다 성공을 보장받지는 못한다. 뉴욕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이타카 대학 통신학부를 마치고 1974년 ABC방송의 일기예보 아나운서로 미디어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ABC에서 하나씩 계단을 올라갔다.
1990년 데니비드 린치 감독의 인기 시리즈물 ‘트윈 픽스’ 기획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면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는 1982~92년 ABC 엔터테인먼트 사장을 맡았으며 1993~94년 ABC 네트워크 텔레비전 그룹의 사장으로 일했다. 이후 ABC의 모기업인 캐피털시티스/ABC(현재 ABC)의 사장에 올랐다. 1996년 이 회사가 디즈니에 인수된 뒤에도 1999년까지 자리를 유지했다. 엔터테인먼트 경영에서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픽사·마블 엔터테인먼트·루카스필름 인수그러다 1999년 ABC의 회장과 디즈니의 국제부문 사장을 함께 맡게 됐다. 그의 능력을 시험한 마이클 아이스너 당시 회장은 2000년 그를 디즈니의 2인자인 사장 겸 COO(최고운영책임자)에 임명했다. 그의 전임자였던 아이스너는 1984년부터 2005년까지 21년 간 거대 월트디즈니 제국을 이끌었다. 물이 고이면 썩는 법. 아이스너가 디즈니를 이끄는 초기에는 과감한 경영으로 디즈니의 황금시대를 연장시켰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새롭게 등장한 경쟁사들의 도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3년 아이스너가 창립자 월트디즈니의 조카인 로이 디즈니를 72세의 고령이라는 이유로 이사회에서 배제하자 디즈니는 아이스너가 무능한 경영으로 일등 기업 디즈니를 망쳐놨다고 비난했다. 그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에선 시청자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으며 테마파크는 소극적인 운영으로 손님을 놓쳤다. 그 결과 디즈니를 탐욕스럽고 영혼이 없는 기업으로 전락시켰다고 대놓고 발언했다. 특히 대표 장르인 애니메이션과 영화까지 관객을 잃고 있어 디즈니가 희망 없는 기업이 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디즈니는 매출 부진으로 수 천명의 직원을 해고했다. 흥행 부진과 경영난이 겹쳐 이 같은 내부 분란까지 일어나지 디즈니는 할리우드의 문제아가 됐다. 자리를 조금이라도 더 유지하려는 아이스너의 욕심 때문에 아이거는 2000년 사장을 밭은 뒤 5년 간 2인자 생활을 거쳐 2005년 CEO 자리를 물려받을 수밖에 없었다. 2005년 아이스너가 로이 디즈니 등이 벌이던 ‘디즈니를 살리자’는 운동에 밀려 회사를 떠나면서 비로소 CEO로서 디즈니의 통수권을 움켜쥐게 됐다.
일단 최고에 오른 아이거는 대대적인 혁신에 들어갔다. 우선 화합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는 전임자와 달리 디즈니의 현실을 인정했다. 디즈니가 관객의 마음을 읽는 전통을 제대로 잇지 못해 영혼이 없고, 혁신을 제대로 못해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관계자들이 화합하지 못하는 데다 탐욕스럽다는 인상까지 관객들에게 주고 있음을 과감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곤 이를 개선해 명예를 되찾는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로이 디즈니를 설득해 ‘디즈니를 살리자’는 운동을 그만두게 하고 디즈니에 들어와서 함께 일하게 했다. 명예이사와 회사 고문으로 모신 것이다.
이듬해인 2006년 디즈니는 깜짝 놀랄 발표를 했다. 디지털 미디어의 대표 격으로 전통 애니메이션의 황제인 디즈니와는 다른 길을 걸었던 픽사를 74억 달러에 사들인 것이다. 1974년 루카스 필름의 그래픽 부서로 출발한 이 회사는 1986년 스티브 잡스 등이 참여하면서 컴퓨터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본격 디지털 영상기업으로 독립했다. ‘토이 스토리 1’(1995년), ‘토이 스토리 2’(1999년), ‘몬스터’(2001년), ‘인크레더블’(2004년) 등을 만들며 디지털 애니메이션의 새 시대를 열고 있던 업체였다. 이로써 디즈니는 고전 애니메이션에 디지털의 날개를 추가한 셈이 됐다.
이에 대해 로이 디즈니는 성명까지 발표하며 환영했다. “애니메이션은 월트디즈니 컴퍼니(디즈니사의 정식 명칭)의 심장이자 영혼이 돼왔다. 이제 밥 아이거와 이 회사는 픽사의 뛰어난 애니메이션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 전통을 포용하려고 한다. 참으로 멋진 일이다.”
아이거의 진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9년 엄청난 양의 캐릭터와 스토리를 지닌 마블 엔터테인먼트를 인수했다. 42억4000만 달러를 투입한 이 인수는 아이거의 새로운 승부수로 평가된다. 원래 디즈니 캐릭터는 매끈하고 귀여운 편이다. 귀족 분위기다. 이에 따라 디즈니의 콘텐트는 주로 권선징악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스토리도 지나치게 뻔해진다.
하지만 마블엔터테인먼트의 캐릭터들은 대부분 마이너리티이자 아웃사이더다. 통제불능이거나 구제불능이다. 지나치게 명랑한 디즈니 캐릭터와 달리 고민하고 고뇌한다. 성격이 삐뚤어진 캐릭터도 적지 않다. 그야말로 디즈니와 상극이다. 하지만 아이거의 결단으로 전혀 이질적인 두 가지가 결합하면서 디즈니는 캐릭터와 콘텐트를 보강할 수 있었다. 현실적인 느낌도 더 키울 수 있게 됐다.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종의 다양성을 확보한 것이다. 디즈니는 이로써 엔터테인먼트계의 강자로 다시 부상할 계기를 확보했다. 퓨전과 융합을 앞세워 엔터테인먼트에 창조적 변혁을 이뤄낸 것이다. 아이거는 이를 최대한 활용해 다양한 캐릭터·콘텐트 사업을 벌여 성공하고 있다. 영화·방송·게임·장난감·캐릭터 사업 등 수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고부가가치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분야 지적재산 제국 완성2012년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가 세운 루커스 필름까지 디즈니 제국에 편입시켰다. 디즈니의 명실상부한 엔터테인먼트 분야 지적재산의 제국을 완성한 것이다. 아이거는 2012년 존 페퍼에 이어 디즈니의 회장에 올라 명실상부한 디즈니의 황제에 올랐다. 캐릭터와 현대성, 그리고 디지털에 뒤졌던 디즈니를 그 분야 최고의 위치로 다시 돌려놓은 셈이다.
아이거 회장은 엄청난 연봉을 받는 경영인으로도 유명하다. 지난해 보너스를 포함해 3430만 달러의 급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겨울왕국’의 성공으로 올해 그가 가져갈 돈이 얼마나 더 늘지도 관심거리다. 또 그가 ‘겨울왕국’의 다음에 내놓을 창조적 엔터테인먼트 혁명이 어떤 모습인지도 관심을 끈다. 돈은 창조와 혁신의 뒤를 따라오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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