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대결
끝나지 않은 대결
이번 겨울 영국 경매계에서 두 역사적 행성의 보기 드문 배열이 나타났다. 지난 11월 런던 크리스티 경매소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의 그림 두 점이 팔렸다. 12월 17에는 처칠의 다른 유화 작품 15점이 소더비에서 경매에 들어간다. 처칠의 작품 판매 사상 한번에 이렇게 여러 점이 경매에 부쳐지는 건 처음이다. 한편 지난 11월 영국 슈롭셔의 멀록 경매소에서는 2차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 전 독일 총통의 미술 작품 3점이 경매에 부쳐졌다.
한때 문명 세계의 운명이 이 두 남자의 의지 대결에 달렸던 적이 있었다. 최근 들어 이 두 사람의 예술적 노력에 대한 평가를 통해 이들이 남긴 유산이 또 다시 시험대 위에 올랐다.
미술품의 가격 결정에 작품의 진정한 가치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작가의 평판(명성 또는 악명)이다. 이들 작품의 판매는 그 극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소더비 경매에 나온 작품들은 처칠의 막내딸인 고(故) 메리 솜스의 저택에서 발견된 유품 중 경매에 부쳐진 256점(처칠의 공문서 송달함과 사진, 가구, 시가 저장 상자 등 다양한 가정용품이 포함됐다) 중 일부다.
처칠의 생가인 블렌하임 팰리스의 전경을 담은 그림, 유명한 블렌하임 태피스트리를 그린 그림, 정물화, 차트웰(처칠이 좋아했던 시골 별장)의 화실을 묘사한 그림, 프랑스의 풍광이 담긴 풍경화, 카르카손 성벽을 그린 그림(처칠이 딸 메리에게 처음으로 준 그림이다) 등이 포함됐다. “1920년대 초부터 1950년대 말까지 처칠의 화가 경력 40년에 걸친 작품들이다.” 소더비의 프랜시스 크리스티가 말했다. “이 그림들은 처칠에겐 매우 개인적인 의미를 지닌 작품들이지만 객관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작품이다.”
처칠이 그린 그림들은 한 화가의 작품으로서의 가치와 주요 정치인이 남긴 기념품으로서의 가치를 따로 떼어 생각하기가 특히 힘들다. 그의 작품은 일부 전문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다. “피카소는 ‘처칠은 다른 일을 안 하고 그림만 그렸어도 꽤 넉넉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에서 조각가와 화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처칠의 손녀 에드위나 샌디스가 말했다. 1947년엔 처칠이 필명으로 영국왕립미술원에 출품한 그림 한 점이 전시회에 채택됐다. 저명한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도 그의 작품을 칭송했다. 하지만 처칠은 늘 자신의 그림이 취미에 지나지 않으며 일종의 테라피일 뿐이라고 말했다.
반면 처칠의 재능에 비판적인 견해를 지닌 사람들도 있다. 런던의 미술상 크리스 비틀스는 “난 미술만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윈스턴 처칠의 대단한 숭배자”라고 말했다. “그는 화가보다는 벽돌공으로 더 뛰어난 재능을 지녔었다.” (처칠은 차트웰의 텃밭 주변에 손수 벽돌 담을 쌓는 등 실제로 벽돌 쌓는 솜씨가 꽤 좋았다.) “그의 그림은 색깔이 탁하고 우중충하다”고 비틀스는 말을 이었다. “붓질을 너무 많이 해서 작품을 망쳤다.”
반면 히틀러 작품의 평범성에 대해서는 이론이 별로 없는 듯하다. 멀록의 경매를 주선한 역사 문서 거래상 리처드 웨스트우드-브룩스조차 그의 작품들을 하찮게 여길 정도다. “히틀러는 인체를 제대로 묘사하지 못했다.” 여자의 누드를 스케치한 그의 작품을 두고 웨스트우드-브룩스가 말했다. “그는 비엔나 미술학교에 지원했다가 낙방한 일을 평생 한으로 여겼지만 이 그림을 보면 얼굴이 없고 신체비율도 엉망이다.”
거리 풍경을 담은 히틀러의 수채화가 관광지에서 파는 무미건조한 복제화 같다고 내가 말하자 웨스트우드-브룩스도 동의했다. “맞다! 히틀러는 1차대전 후 비엔나에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관광객들에게 팔 이 작은 풍경화들을 그렸다. 실제로 그는 이 풍경화 중 다수를 우편엽서에서 보고 그렸다. 히틀러가 당시 가옥에 페인트 칠을 하는 도장공으로 일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돌았다. 실제로 그는 일감을 구하려고 비엔나의 부잣집 대문을 두드리고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요동치는 요즘의 경제 상황에서도 처칠의 그림들은 꾸준히 괜찮은 가격에 팔려나간다. 최근 런던 크리스티 경매소에서 팔린 두 작품 중 하나는 추정가보다 조금 낮은 22만9551달러에, 다른 하나는 추정가 중 제일 낮은 축에 속하는 26만7157달러에 팔렸다. 지난 10년 동안 Artnet.com에 올랐던 처칠의 그림 48점 중 경매사들의 추정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팔린 작품은 9점에 불과했다. 16점은 추정가 범위 안에서, 23점은 예상보다 더 높은 가격에 팔렸다. 사실 2005년 말부터 2007년 여름까지는 처칠 작품의 붐이 일었다. ‘차트웰: 양이 있는 풍경’이 소더비에서 100만 파운드라는 기록적인 가격에 팔렸다. 당초 추정가 15만~20만 파운드를 훨씬 뛰어넘는 액수다.
처칠은 1915년 내각에서 사임 당한 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차대전 중 해군장관으로서 서부전선의 교착상태 타개를 위해 감행한 갈리폴리 상륙작전이 실패로 끝난 데 대한 책임 때문이었다. 이 일로 그는 유명한 ‘블랙 독(black dog)’ 우울증을 얻었다(‘검은 개’라는 뜻으로 처칠이 평생 안고 살았던 지독한 우울증을 이렇게 부른 데서 유래해 우울증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단어로 자리잡았다). 당시 처칠이 자신의 사촌이 그린 수채화에 관심을 보이자 그의 어머니는 곧바로 그에게 유화 물감 한 세트를 사주었다.
처칠이 2차대전 기간 동안 완성한 그림은 단 한 점뿐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1915년부터 1950년대 말까지 50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 중 그가 좋아했던 차트웰 별장을 묘사한 작품들을 제외한 대다수는 여행 중 그린 풍경화다. 처칠은 외국 여행에서 돌아오면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동안 그린 그림을 보여줬다. 요즘 사람들이 휴가 여행에서 돌아오면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듯이 말이다.
지난 10년 중 6년 동안 경매에서 낙찰된 처칠의 그림은 2~3점에 불과했다. 하지만 2014년 한 해 동안은 18점이나 팔렸다. 국제 금융위기가 시작된 2007~2010년에는 작품가가 경매사의 추정가 범위 안에 머물렀지만 그 후로는 급등했다. 최근 그의 그림은 작품 당 보통 10만~50만 파운드를 호가한다.
프랜시스 크리스티는 12월 중 열리는 소더비의 경매 결과도 낙관적으로 예상한다. “그림의 출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그녀는 말했다. “이 그림들은 처칠과 그의 가족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차트웰을 주제로 한 그림들은 금붕어 연못을 그린 작품과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자주 보기 어렵다.”
크리스티와 소더비 측에 따르면 두 회사 중 어느 쪽도 히틀러의 작품을 주요 매물로 여기지 않는다. 웨스트우드-브룩스는 나치 당수였던 히틀러의 작품을 거래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난 역사와 관계된 것이면 무엇이든 판다”고 그가 설명했다. “히틀러나 제3제국(나치 독일)과 관계된 물건들은 그 중 아주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신기한 건 히틀러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스탈린이나 마오쩌둥과 관련된 물건들을 팔 때는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안 갖는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히틀러의 그림은 처칠의 작품에 비해 가격이 10분의1에도 미치지 못했다. 5년 전 웨스트우드-브룩스는 히틀러의 작품 13점이 포함된 경매를 주선했다. 모두 추정가보다 높은 가격에 팔렸지만 가장 비싼 작품(히틀러의 작품으로는 보기 드문 유화)이 2만 달러도 채 안됐다. 아트넷에 오른 히틀러 작품 판매 소식은 단 두 건이다. 그 중 하나는 2009년 이탈리아 투린의 산타고스티노 경매소에서 팔린 도시 풍경 수채화로 판매가는 예상보다 훨씬 낮은 2만2434달러였다. 다른 하나는 병사의 모습을 담은 연필 스케치로 2013년 독일 포르츠하임에서 4만 달러가 채 안 되는 가격에 팔렸다.
하지만 최근 웨스트우드-브룩스는 유럽에서 제3제국의 미술에 대한 관심이 차츰 고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인들 사이에서 나치 시대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긴 것을 그 원인으로 지목했다. 네덜란드에 있는 ‘저먼 아트 갤러리’는 제3제국의 그림 여러 점을 매물로 내놓았다. 웨스트우드-브룩스의 견해를 확인해주기라도 하듯 11월 22일에는 독일 뉘른베르크의 한 경매소에서 히틀러의 수채화 한 점[‘뮌헨의 옛 등기소(Old Registry Office in Munich)’]이 16만 달러에 팔렸다. 추정가의 6배가 넘는 가격이다.
결국 작품의 가치를 짐작하게 하는 건 그들 작품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그 당시의 상황과 배경이다. 그런 배경은 처칠과 히틀러, 두 사람의 인생에서 그림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드러내준다. “어린 시절 차트웰에서 가족이 화목한 시간을 보낼 때 이젤 앞에 앉은 할아버지 뒤에 서 있었던 게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이라고 샌디스가 말했다. “할아버지는 꽉 찬 인생을 한껏 즐겼다. 할아버지 자신이 꽉 찬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처칠이 미술에 진정한 재능을 지녔었는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붓을 들었다. 음울하고 가난에 찌들었던 젊은 시절의 히틀러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는 화가가 되려던 꿈이 좌절되자 분노에 찼고 자신의 평범성을 끝내 인정하지 못했다. 이런 대조는 세계사에 참담한 결과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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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문명 세계의 운명이 이 두 남자의 의지 대결에 달렸던 적이 있었다. 최근 들어 이 두 사람의 예술적 노력에 대한 평가를 통해 이들이 남긴 유산이 또 다시 시험대 위에 올랐다.
미술품의 가격 결정에 작품의 진정한 가치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작가의 평판(명성 또는 악명)이다. 이들 작품의 판매는 그 극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소더비 경매에 나온 작품들은 처칠의 막내딸인 고(故) 메리 솜스의 저택에서 발견된 유품 중 경매에 부쳐진 256점(처칠의 공문서 송달함과 사진, 가구, 시가 저장 상자 등 다양한 가정용품이 포함됐다) 중 일부다.
처칠의 생가인 블렌하임 팰리스의 전경을 담은 그림, 유명한 블렌하임 태피스트리를 그린 그림, 정물화, 차트웰(처칠이 좋아했던 시골 별장)의 화실을 묘사한 그림, 프랑스의 풍광이 담긴 풍경화, 카르카손 성벽을 그린 그림(처칠이 딸 메리에게 처음으로 준 그림이다) 등이 포함됐다. “1920년대 초부터 1950년대 말까지 처칠의 화가 경력 40년에 걸친 작품들이다.” 소더비의 프랜시스 크리스티가 말했다. “이 그림들은 처칠에겐 매우 개인적인 의미를 지닌 작품들이지만 객관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작품이다.”
처칠이 그린 그림들은 한 화가의 작품으로서의 가치와 주요 정치인이 남긴 기념품으로서의 가치를 따로 떼어 생각하기가 특히 힘들다. 그의 작품은 일부 전문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다. “피카소는 ‘처칠은 다른 일을 안 하고 그림만 그렸어도 꽤 넉넉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에서 조각가와 화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처칠의 손녀 에드위나 샌디스가 말했다. 1947년엔 처칠이 필명으로 영국왕립미술원에 출품한 그림 한 점이 전시회에 채택됐다. 저명한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도 그의 작품을 칭송했다. 하지만 처칠은 늘 자신의 그림이 취미에 지나지 않으며 일종의 테라피일 뿐이라고 말했다.
반면 처칠의 재능에 비판적인 견해를 지닌 사람들도 있다. 런던의 미술상 크리스 비틀스는 “난 미술만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윈스턴 처칠의 대단한 숭배자”라고 말했다. “그는 화가보다는 벽돌공으로 더 뛰어난 재능을 지녔었다.” (처칠은 차트웰의 텃밭 주변에 손수 벽돌 담을 쌓는 등 실제로 벽돌 쌓는 솜씨가 꽤 좋았다.) “그의 그림은 색깔이 탁하고 우중충하다”고 비틀스는 말을 이었다. “붓질을 너무 많이 해서 작품을 망쳤다.”
반면 히틀러 작품의 평범성에 대해서는 이론이 별로 없는 듯하다. 멀록의 경매를 주선한 역사 문서 거래상 리처드 웨스트우드-브룩스조차 그의 작품들을 하찮게 여길 정도다. “히틀러는 인체를 제대로 묘사하지 못했다.” 여자의 누드를 스케치한 그의 작품을 두고 웨스트우드-브룩스가 말했다. “그는 비엔나 미술학교에 지원했다가 낙방한 일을 평생 한으로 여겼지만 이 그림을 보면 얼굴이 없고 신체비율도 엉망이다.”
거리 풍경을 담은 히틀러의 수채화가 관광지에서 파는 무미건조한 복제화 같다고 내가 말하자 웨스트우드-브룩스도 동의했다. “맞다! 히틀러는 1차대전 후 비엔나에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관광객들에게 팔 이 작은 풍경화들을 그렸다. 실제로 그는 이 풍경화 중 다수를 우편엽서에서 보고 그렸다. 히틀러가 당시 가옥에 페인트 칠을 하는 도장공으로 일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돌았다. 실제로 그는 일감을 구하려고 비엔나의 부잣집 대문을 두드리고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요동치는 요즘의 경제 상황에서도 처칠의 그림들은 꾸준히 괜찮은 가격에 팔려나간다. 최근 런던 크리스티 경매소에서 팔린 두 작품 중 하나는 추정가보다 조금 낮은 22만9551달러에, 다른 하나는 추정가 중 제일 낮은 축에 속하는 26만7157달러에 팔렸다. 지난 10년 동안 Artnet.com에 올랐던 처칠의 그림 48점 중 경매사들의 추정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팔린 작품은 9점에 불과했다. 16점은 추정가 범위 안에서, 23점은 예상보다 더 높은 가격에 팔렸다. 사실 2005년 말부터 2007년 여름까지는 처칠 작품의 붐이 일었다. ‘차트웰: 양이 있는 풍경’이 소더비에서 100만 파운드라는 기록적인 가격에 팔렸다. 당초 추정가 15만~20만 파운드를 훨씬 뛰어넘는 액수다.
처칠은 1915년 내각에서 사임 당한 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차대전 중 해군장관으로서 서부전선의 교착상태 타개를 위해 감행한 갈리폴리 상륙작전이 실패로 끝난 데 대한 책임 때문이었다. 이 일로 그는 유명한 ‘블랙 독(black dog)’ 우울증을 얻었다(‘검은 개’라는 뜻으로 처칠이 평생 안고 살았던 지독한 우울증을 이렇게 부른 데서 유래해 우울증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단어로 자리잡았다). 당시 처칠이 자신의 사촌이 그린 수채화에 관심을 보이자 그의 어머니는 곧바로 그에게 유화 물감 한 세트를 사주었다.
처칠이 2차대전 기간 동안 완성한 그림은 단 한 점뿐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1915년부터 1950년대 말까지 50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 중 그가 좋아했던 차트웰 별장을 묘사한 작품들을 제외한 대다수는 여행 중 그린 풍경화다. 처칠은 외국 여행에서 돌아오면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동안 그린 그림을 보여줬다. 요즘 사람들이 휴가 여행에서 돌아오면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듯이 말이다.
지난 10년 중 6년 동안 경매에서 낙찰된 처칠의 그림은 2~3점에 불과했다. 하지만 2014년 한 해 동안은 18점이나 팔렸다. 국제 금융위기가 시작된 2007~2010년에는 작품가가 경매사의 추정가 범위 안에 머물렀지만 그 후로는 급등했다. 최근 그의 그림은 작품 당 보통 10만~50만 파운드를 호가한다.
프랜시스 크리스티는 12월 중 열리는 소더비의 경매 결과도 낙관적으로 예상한다. “그림의 출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그녀는 말했다. “이 그림들은 처칠과 그의 가족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차트웰을 주제로 한 그림들은 금붕어 연못을 그린 작품과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자주 보기 어렵다.”
크리스티와 소더비 측에 따르면 두 회사 중 어느 쪽도 히틀러의 작품을 주요 매물로 여기지 않는다. 웨스트우드-브룩스는 나치 당수였던 히틀러의 작품을 거래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난 역사와 관계된 것이면 무엇이든 판다”고 그가 설명했다. “히틀러나 제3제국(나치 독일)과 관계된 물건들은 그 중 아주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신기한 건 히틀러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스탈린이나 마오쩌둥과 관련된 물건들을 팔 때는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안 갖는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히틀러의 그림은 처칠의 작품에 비해 가격이 10분의1에도 미치지 못했다. 5년 전 웨스트우드-브룩스는 히틀러의 작품 13점이 포함된 경매를 주선했다. 모두 추정가보다 높은 가격에 팔렸지만 가장 비싼 작품(히틀러의 작품으로는 보기 드문 유화)이 2만 달러도 채 안됐다. 아트넷에 오른 히틀러 작품 판매 소식은 단 두 건이다. 그 중 하나는 2009년 이탈리아 투린의 산타고스티노 경매소에서 팔린 도시 풍경 수채화로 판매가는 예상보다 훨씬 낮은 2만2434달러였다. 다른 하나는 병사의 모습을 담은 연필 스케치로 2013년 독일 포르츠하임에서 4만 달러가 채 안 되는 가격에 팔렸다.
하지만 최근 웨스트우드-브룩스는 유럽에서 제3제국의 미술에 대한 관심이 차츰 고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인들 사이에서 나치 시대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긴 것을 그 원인으로 지목했다. 네덜란드에 있는 ‘저먼 아트 갤러리’는 제3제국의 그림 여러 점을 매물로 내놓았다. 웨스트우드-브룩스의 견해를 확인해주기라도 하듯 11월 22일에는 독일 뉘른베르크의 한 경매소에서 히틀러의 수채화 한 점[‘뮌헨의 옛 등기소(Old Registry Office in Munich)’]이 16만 달러에 팔렸다. 추정가의 6배가 넘는 가격이다.
결국 작품의 가치를 짐작하게 하는 건 그들 작품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그 당시의 상황과 배경이다. 그런 배경은 처칠과 히틀러, 두 사람의 인생에서 그림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드러내준다. “어린 시절 차트웰에서 가족이 화목한 시간을 보낼 때 이젤 앞에 앉은 할아버지 뒤에 서 있었던 게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이라고 샌디스가 말했다. “할아버지는 꽉 찬 인생을 한껏 즐겼다. 할아버지 자신이 꽉 찬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처칠이 미술에 진정한 재능을 지녔었는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붓을 들었다. 음울하고 가난에 찌들었던 젊은 시절의 히틀러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는 화가가 되려던 꿈이 좌절되자 분노에 찼고 자신의 평범성을 끝내 인정하지 못했다. 이런 대조는 세계사에 참담한 결과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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