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발과 타협의 악순환은 이제 그만
도발과 타협의 악순환은 이제 그만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치달았던 남북 간 갈등이 극적으로 해소됐다. 지난 8월 22일 오후 6시 30분 경 판문점에서 대화를 시작한 남북 대표단은 43시간에 걸친 마라톤 협상 끝에 25일 0시 55분 합의를 이뤄냈다. 북한은 지뢰 폭발로 인한 한국군의 부상에 유감을 표하는 동시에 준전시상태를 해제하고, 한국은 확성기 방송을 조건부 중단하는 것이 골자다. 당국자 회담 개최·이산가족 상봉·적십자 실무 접촉 등 향후 남북관계 개선을 향한 단서도 마련했다. 지난해 말 남북 군사 당국자 접촉 이후 얻어낸 첫 대북 외교 성과다.
여러 전문가들은 회담 결과를 높이 평가했다. 북한의 유감 표명을 책임 인정이나 사과로 보긴 어렵지만, 그 정도를 이끌어낸 것만으로도 훌륭하다는 시각이다. 로버트 켈리 부산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어느 한쪽이 더 큰 이득을 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유보적인 시각을 전제하면서도 “천안함 폭침 이후 북한의 반응에 비하면 이번 공동성명은 괄목할 만한 변화를 보여줬다”고 분석했다. 또 한국이 “북한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를 얻어냈다고 호평했다. 참여정부 대북정책에 깊이 관여했던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역시 JTBC와 가진 인터뷰에서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켰고 그리고 남과 북 사이에 새로운 대화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 상당히 큰 의미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켈리 교수는 이번 회담의 성과를 박근혜 대통령의 공으로 봤다. 그는 “박 대통령은 북한측이 제시한 확성기 철거 시한을 무시하고 북한이 스스로 대화를 요청하도록 유도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 현정권의 대북정책이 가진 미덕이다.” 문 교수도 비슷한 입장이다. 그는 같은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돋보이는 건 원칙론을 버리고 현실론을 택했다는 데 있지 않았는가 생각한다”며 “그런 점에서는 남북관계가 상당히 희망적이라고 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원칙론과 현실론 사이의 줄타기는 박근혜 정권 대북정책의 기조다. 개성공단 재가동 협상 때도 그랬다. 2013년 4월 9일 개성공단 가동이 중단된 이래 남북은 약 5개월 동안 7차례의 실무회담을 거쳐 입장을 조율했다. 이번 지뢰 폭발 사고에서 책임 주체가 문제가 됐듯이, 당시에도 개성공단 가동 중단의 주체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한국은 개성공단 사태 재발방지의 주체를 북한으로 명시하려 했고, 북한은 이를 ‘남과 북’으로 표기하길 원했다. 오랜 협상 끝에 한국은 재발방지 주체를 ‘남과 북’으로 표기하도록 양보하는 대신 재발방지 약속을 문서화하고 북측의 피해보상을 받아냈다. 원칙론자로 잘 알려진 박 대통령의 기존 인상에 비춰보면 아주 실용적인 결과물이었다. 개성공단 재가동 협상과 이번 남북 고위급 접촉의 공통점은 하나 더 있다. 모두 북한의 도발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고, 그 과정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이끌어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개성공단 실무회담과 이번 고위급 접촉은 모두 이산가족 상봉·금강산 관광 재개 등 추가적인 관계 개선 조치로 이어졌다.
결과는 좋았지만 의문은 남는다. 어차피 이뤄질 관계 개선이었다면 왜 굳이 북한의 도발을 기다려야만 했을까? 남북 관계 개선이 북한의 도발 대신 한국이 주도하는 정책에서 시작됐다면 남북이 서로 비방할 일도, 한국에 투자하는 외국 자본에 공포를 불러일으킬 일도,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북한이 준전시상태에 돌입하고 병력을 배치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실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전망은 거의 없었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갈등이 고조된 지난 8월 23일 알자지라에 기고한 칼럼에서 “양측 모두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며 “현재의 긴장은 늘상 있었던 외교적 발레일 뿐”이라고 분석했다.
한반도 긴장 고조가 “발레”에 불과하다고 해서 위험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리드대학 한국학연구소의 에이단 포스터-카터 연구원은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란코프 교수의 비유를 들면서 발레의 큰 틀을 짜는 “안무가”가 전혀 없이 “상황이 벌어진 뒤에 임기응변으로 대응한다는 점에서 위험 요소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양측 모두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계산착오나 과민반응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발과 갈등 고조에서 긴장 해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장기적인 전략을 꾸려나가야 한다”고 포스터-카터 연구원은 주장했다.
한국 정부가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지금까지 먼저 나서서 제안한 내용 중에 북한이 곱게 받아들인 것이 없었을 뿐이다. 2013년 2월 25일 박 대통령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주창하며 취임한 직후, 3월 8일 북한은 남북 북가침 합의를 폐기한데 이어 4월 8일엔 개성공단 가동을 중단했다. 지난해 3월 28일 박 대통령이 독일에서 ‘드레스덴 선언’을 발표하자 북한은 곧장 비난하고 나섰다. 같은 해 12월에는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통일 준비위원회 회담을 제의한 것 역시 별다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드레스덴 선언을 향한 북한의 격렬한 거부 반응은 그동안 한국의 접근 방식이 왜 통하지 않았는지 보여준다. 박 대통령이 독일 순방 중에 대북정책 관련 선언을 하리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은 남북관계에 큰 진전이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분위기도 한창 좋을 때였다. 1월 1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서기가 신년사에서 “남북 관계 개선 분위기 마련”을 언급했고, 1월 6일 박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는 발언으로 화답했다. 이어 1월 16일엔 북한 국방위원회가 상호 비방중상과 군사 적대행위를 중단하자는 ‘중대제안’을 발표했다. 2월 12일 남북 고위급 접촉, 2월 20일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행사까지 관계 개선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지난 3월 28일 박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은 화룡점정이 될 듯했다. 남북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2000년 베를린 선언과 같은 효과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노동신문은 3월 30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야만행위’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박근혜는 유럽 나라들을 돌아치며 그 무슨 ‘통일’이니, ‘공동번영’이니, ‘교류’니 하는 낯간지러운 수작들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다”며 “겉으로는 미소를 띄우면서 속에는 독을 품고 우리를 해치려고 발광하는 박근혜의 그 뻔한 흉심을 우리는 낱낱이 꿰뚫어보고 있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심지어 “핵억제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핵실험”을 거론하기까지 했다.
전문가들은 북측이 드레스덴 선언을 체제 위협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핵문제 해결에 대한 진정성 있는 자세로 6자회담에 복귀하고 핵을 포기하여 진정 북한 주민의 삶을 돌보기 바란다”며 북한 비핵화를 촉구한 부분이 북한을 자극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북한이 “새로운 형태의 핵실험” 운운한 것도 그에 대한 반발이라는 것이다. 핵무기에 의존해 체제를 유지하는 김정은 정권의 입장에서 비핵화 요구는 심각한 위협이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통일학)는 당시 한 인터뷰에서 “핵문제는 남북관계에서 다룰 사안이 아니라는 북한 입장에도 박 대통령이 북핵 폐기를 촉구하자 강하게 경고한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을 자극했다고 여겨지는 또 다른 부분은 흡수통일을 암시한 대목이다. 선언문에는 ‘독일 국민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자유와 번영, 평화를 이뤄냈듯이 이제 한반도에서도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당시 한 인터뷰에서 “동독이 서독에 흡수된 독일 통일의 사례를 남북한에 빗대 얘기한 것은 북한에 부정적인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과 비교해 보면 북한의 분노를 이해하기가 쉽다. 그는 “우리의 당면 목표는 통일보다는 냉전종식과 평화정착”이라며 “북한은 우리의 참뜻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우리의 화해와 협력 제안에 적극 호응하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남북한 간에는 정경분리 원칙에 의한 민간경협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북한이 혹시라도 체제를 위협받는다고 느낄까 우려한 것이다. 정경분리 원칙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의 신뢰를 얻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 정부는 뒤로 빠지는 대신 민간을 앞세우고 민간인 방북 승인 조건을 대폭 완화했다”며 “1차 정상회담의 신호로 평가 받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베를린선언은 이러한 기초공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돌이켰다.
체제를 위협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낸 김대중 전 대통령과 달리 박근혜 정부와 여당은 비핵화를 촉구하거나 흡수통일을 연상케 하는 발언으로 북한을 자극했다. 지난 8월 10일엔 박 대통령이 통일준비위원회 토론회에서 “내년에라도 통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는 소식이 보도되면서 논란을 빚었다. 북한과의 관계가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황에서 통일을 언급한다는 건 흡수통일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통일준비위원회 측은 “통일 준비를 잘 하라는 취지에서 한 말”이라고 급히 진화에 나섰지만 북한이 이 발언을 좋게 받아들이리라 생각하긴 어렵다. 북한은 일찌감치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 위원회를 “흡수통일 전위부대”로 못 박아놓은 상황이다.
결국 문제는 한국의 장기 전략이다. 한국 정부가 북한 급변사태를 기대하고 흡수통일을 꾀하는 한 남북 관계 개선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번 회담의 성과 역시 언제 물거품이 될지 모른다. 정 전 장관은 한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의 대북 인식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은 북한의 붕괴를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인식 하에서는 남북관계 개선이나 협력보다는 체제통일, 흡수통일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남북관계 개선의 첫 단추를 끼워 보자는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다. 상대를 굴복시킨다는 관점에서 남북관계에 접근하면 아무 것도 못 한다. 박근혜 정부 외교·안보 정책의 핵심인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이니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니하는 것들은 북한과 함께하지 않으면 공수표에 불과하다.”
- 이기준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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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전문가들은 회담 결과를 높이 평가했다. 북한의 유감 표명을 책임 인정이나 사과로 보긴 어렵지만, 그 정도를 이끌어낸 것만으로도 훌륭하다는 시각이다. 로버트 켈리 부산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어느 한쪽이 더 큰 이득을 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유보적인 시각을 전제하면서도 “천안함 폭침 이후 북한의 반응에 비하면 이번 공동성명은 괄목할 만한 변화를 보여줬다”고 분석했다. 또 한국이 “북한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를 얻어냈다고 호평했다. 참여정부 대북정책에 깊이 관여했던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역시 JTBC와 가진 인터뷰에서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켰고 그리고 남과 북 사이에 새로운 대화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 상당히 큰 의미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켈리 교수는 이번 회담의 성과를 박근혜 대통령의 공으로 봤다. 그는 “박 대통령은 북한측이 제시한 확성기 철거 시한을 무시하고 북한이 스스로 대화를 요청하도록 유도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 현정권의 대북정책이 가진 미덕이다.” 문 교수도 비슷한 입장이다. 그는 같은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돋보이는 건 원칙론을 버리고 현실론을 택했다는 데 있지 않았는가 생각한다”며 “그런 점에서는 남북관계가 상당히 희망적이라고 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원칙론과 현실론 사이의 줄타기는 박근혜 정권 대북정책의 기조다. 개성공단 재가동 협상 때도 그랬다. 2013년 4월 9일 개성공단 가동이 중단된 이래 남북은 약 5개월 동안 7차례의 실무회담을 거쳐 입장을 조율했다. 이번 지뢰 폭발 사고에서 책임 주체가 문제가 됐듯이, 당시에도 개성공단 가동 중단의 주체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한국은 개성공단 사태 재발방지의 주체를 북한으로 명시하려 했고, 북한은 이를 ‘남과 북’으로 표기하길 원했다. 오랜 협상 끝에 한국은 재발방지 주체를 ‘남과 북’으로 표기하도록 양보하는 대신 재발방지 약속을 문서화하고 북측의 피해보상을 받아냈다. 원칙론자로 잘 알려진 박 대통령의 기존 인상에 비춰보면 아주 실용적인 결과물이었다.
반복되는 선도발-후타협
결과는 좋았지만 의문은 남는다. 어차피 이뤄질 관계 개선이었다면 왜 굳이 북한의 도발을 기다려야만 했을까? 남북 관계 개선이 북한의 도발 대신 한국이 주도하는 정책에서 시작됐다면 남북이 서로 비방할 일도, 한국에 투자하는 외국 자본에 공포를 불러일으킬 일도,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북한이 준전시상태에 돌입하고 병력을 배치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실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전망은 거의 없었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갈등이 고조된 지난 8월 23일 알자지라에 기고한 칼럼에서 “양측 모두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며 “현재의 긴장은 늘상 있었던 외교적 발레일 뿐”이라고 분석했다.
한반도 긴장 고조가 “발레”에 불과하다고 해서 위험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리드대학 한국학연구소의 에이단 포스터-카터 연구원은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란코프 교수의 비유를 들면서 발레의 큰 틀을 짜는 “안무가”가 전혀 없이 “상황이 벌어진 뒤에 임기응변으로 대응한다는 점에서 위험 요소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양측 모두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계산착오나 과민반응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발과 갈등 고조에서 긴장 해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장기적인 전략을 꾸려나가야 한다”고 포스터-카터 연구원은 주장했다.
한국 정부가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지금까지 먼저 나서서 제안한 내용 중에 북한이 곱게 받아들인 것이 없었을 뿐이다. 2013년 2월 25일 박 대통령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주창하며 취임한 직후, 3월 8일 북한은 남북 북가침 합의를 폐기한데 이어 4월 8일엔 개성공단 가동을 중단했다. 지난해 3월 28일 박 대통령이 독일에서 ‘드레스덴 선언’을 발표하자 북한은 곧장 비난하고 나섰다. 같은 해 12월에는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통일 준비위원회 회담을 제의한 것 역시 별다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드레스덴 선언을 향한 북한의 격렬한 거부 반응은 그동안 한국의 접근 방식이 왜 통하지 않았는지 보여준다. 박 대통령이 독일 순방 중에 대북정책 관련 선언을 하리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은 남북관계에 큰 진전이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분위기도 한창 좋을 때였다. 1월 1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서기가 신년사에서 “남북 관계 개선 분위기 마련”을 언급했고, 1월 6일 박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는 발언으로 화답했다. 이어 1월 16일엔 북한 국방위원회가 상호 비방중상과 군사 적대행위를 중단하자는 ‘중대제안’을 발표했다. 2월 12일 남북 고위급 접촉, 2월 20일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행사까지 관계 개선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지난 3월 28일 박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은 화룡점정이 될 듯했다. 남북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2000년 베를린 선언과 같은 효과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노동신문은 3월 30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야만행위’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박근혜는 유럽 나라들을 돌아치며 그 무슨 ‘통일’이니, ‘공동번영’이니, ‘교류’니 하는 낯간지러운 수작들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다”며 “겉으로는 미소를 띄우면서 속에는 독을 품고 우리를 해치려고 발광하는 박근혜의 그 뻔한 흉심을 우리는 낱낱이 꿰뚫어보고 있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심지어 “핵억제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핵실험”을 거론하기까지 했다.
전문가들은 북측이 드레스덴 선언을 체제 위협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핵문제 해결에 대한 진정성 있는 자세로 6자회담에 복귀하고 핵을 포기하여 진정 북한 주민의 삶을 돌보기 바란다”며 북한 비핵화를 촉구한 부분이 북한을 자극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북한이 “새로운 형태의 핵실험” 운운한 것도 그에 대한 반발이라는 것이다. 핵무기에 의존해 체제를 유지하는 김정은 정권의 입장에서 비핵화 요구는 심각한 위협이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통일학)는 당시 한 인터뷰에서 “핵문제는 남북관계에서 다룰 사안이 아니라는 북한 입장에도 박 대통령이 북핵 폐기를 촉구하자 강하게 경고한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자극하는 흡수통일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과 비교해 보면 북한의 분노를 이해하기가 쉽다. 그는 “우리의 당면 목표는 통일보다는 냉전종식과 평화정착”이라며 “북한은 우리의 참뜻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우리의 화해와 협력 제안에 적극 호응하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남북한 간에는 정경분리 원칙에 의한 민간경협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북한이 혹시라도 체제를 위협받는다고 느낄까 우려한 것이다. 정경분리 원칙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의 신뢰를 얻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 정부는 뒤로 빠지는 대신 민간을 앞세우고 민간인 방북 승인 조건을 대폭 완화했다”며 “1차 정상회담의 신호로 평가 받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베를린선언은 이러한 기초공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돌이켰다.
체제를 위협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낸 김대중 전 대통령과 달리 박근혜 정부와 여당은 비핵화를 촉구하거나 흡수통일을 연상케 하는 발언으로 북한을 자극했다. 지난 8월 10일엔 박 대통령이 통일준비위원회 토론회에서 “내년에라도 통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는 소식이 보도되면서 논란을 빚었다. 북한과의 관계가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황에서 통일을 언급한다는 건 흡수통일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통일준비위원회 측은 “통일 준비를 잘 하라는 취지에서 한 말”이라고 급히 진화에 나섰지만 북한이 이 발언을 좋게 받아들이리라 생각하긴 어렵다. 북한은 일찌감치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 위원회를 “흡수통일 전위부대”로 못 박아놓은 상황이다.
결국 문제는 한국의 장기 전략이다. 한국 정부가 북한 급변사태를 기대하고 흡수통일을 꾀하는 한 남북 관계 개선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번 회담의 성과 역시 언제 물거품이 될지 모른다. 정 전 장관은 한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의 대북 인식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은 북한의 붕괴를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인식 하에서는 남북관계 개선이나 협력보다는 체제통일, 흡수통일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남북관계 개선의 첫 단추를 끼워 보자는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다. 상대를 굴복시킨다는 관점에서 남북관계에 접근하면 아무 것도 못 한다. 박근혜 정부 외교·안보 정책의 핵심인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이니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니하는 것들은 북한과 함께하지 않으면 공수표에 불과하다.”
- 이기준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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