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연 블랙록자산운용 한국법인 대표
최만연 블랙록자산운용 한국법인 대표
블랙록자산운용은 애플·맥도널드·마이크로소프트· GE 등 글로벌 기업 1대 주주다. 전 세계 30개국, 약 1만3000명의 임직원을 거느린 거대 기업이다. 이런 블랙록자산운용이 한층 커진 한국 시장에 발맞춰 한국법인을 이끌 적임자로 최만연 대표를 내세웠다. 장면 하나. 1995년 봄, 미국에서 IT 열풍이 막 피어나던 시기다. 뉴욕 월스트리트는 IT 기업의 IR 행사가 줄을 이었다. 인텔이 펜티엄 CPU로 586 시대를 열었고, 윈도95를 출시하며 마이크로소프트가 PC업계 돌풍을 일으킨 때이기도 하다. 미국 IT 기업이 빠르게 성장해가던 그해 여름, 중남미발(發) 위기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멕시코가 IMF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아메리카 대륙 전반을 투자처로 삼았던 한국 증권사 주재원은 ‘냉·온탕’을 오가야 했다. 이 와중에도 미국 IT 기업은 성장을 계속했다. 하루에도 2~3배 널뛰기했던 멕시코 페소화는 외환시장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얘기다.
장면 둘. 1998년 여름 영국 런던에 있는 한 로펌 사무실.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은 8명의 금융 전문가들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 마주 앉았다.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된 우크라이나의 채권 처리를 논하는 자리였다. 외환보유고 20억 달러가 전부였던 우크라이나 재무부에서 나온 대표단과 1억5000만 달러를 회수해 가야 하는 한국투자신탁 협상단이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맞섰다. 일주일로 정했던 협상 기간은 어느새 두 달을 끌었다. 마침내 ‘크로스 디폴트(연쇄지급불능)’를 발동케 하겠다며 배수진을 친 한국 채권단의 승리로 끝났다. 대다수 채권도 3개월 뒤 돌려받아 이자까지 붙여 돌려줄 수 있었다.
최만연 블랙록자산운용 대표가 대륙을 오가며 겪었던 스토리 중 일부다. 블랙록자산운용 본사가 2013년부터 한국법인 대표를 찾기 위해 인터뷰한 수백 명 가운데 그를 택한 이유였다. 그만큼 글로벌 경험을 몸소 겪으며, 위기관리 능력을 갖춘 이를 찾고 있었다. 최 대표는 2014년부터 블랙록자산운용의 한국법인 대표를 맡고 있다.
블랙록자산운용은 글로벌 1위 자산운용사다. 블랙록이 운용하는 자산은 지난해 기준 4조6500억달러(약 5426조) 규모로 지난해 우리나라 총예산(376조원)의 15배 가까운 수준이다. 최근 공모펀드 시장에서도 블랙록자산운용의 상품이 글로벌 시장의 흐름을 가장 빨리 반영했다. 지난해 바닥을 모르고 추락했던 금값·유가 등 원자재 시장이 반등하며 들썩였다. 펀드평가사 KG제로인에 따르면 5월 12일 현재 지난 3개월 수익률 기준 전체 공모펀드 4610개 중 블랙록자산운용의 ‘블랙록월드골드’가 1위(39.3%)를 차지했다. 현재 금 펀드 말고도 에너지와 각종 금속류에 투자하는 광업주 펀드에서도 블랙록자산운용 상품이 단연 수익률 1위다. 최 대표의 진두지휘 아래 블랙록자산운용 한국법인도 지난해부터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최 대표는 “직원들이 발로 뛴 덕분”이라고 했지만, 1990년부터 실질적으로 해외 투자를 시작한 그의 이런 경력을 굳게 믿는 이들 덕이 컸다.
1985년 최 대표는 당시 한국투자신탁에 들어가며 투자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어 1989년 회사 최초로 설립된 해외투자부에서 운용역을 맡았다. 1994년에는 뉴욕에 펀드매니저로 파견 나가는 기회도 잡았다. 최 대표는 1998년까지 뉴욕에서 해외 펀드를 직접 운용했다. 최 대표는 1980년대 기억을 다시금 더듬으며, 해외 투자 얘기를 이어갔다. “당시 한국투자신탁에서 만든 ‘석류세계로’ 펀드에 공모한 자금 5000만 달러로 미국과 남미 지역에 주로 투자했다.”
보란 듯이 펀드 운용을 하겠다던 패기도 잠시, 그는 1994년 말 멕시코 구제금융 위기가 터지면서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당시 중남미 투자의 최대 시장은 멕시코였다. 구제금융 위기가 터지자 달러당 페소 가치가 하루 만에 70% 사라지기도 했다. “멕시코 위기에 밤잠을 설친 날이 숱하게 많았다. 1달러당 3페소 하던 게 10페소까지 뛰었다.” 이른바 1995년 멕시코 페소화 가치가 폭락했던 ‘테킬라 파동’이 중남미 경제를 휩쓸고 지나갈 때였다. 그는 당시 자금의 40%를 중남미 시장에 투자하고 있었다. 멕시코의 대표 통신사 주식은 물론 칠레 와인회사, 브라질 국영 정유사 페트로브라스도 그의 중남미 투자리스트에 있었다. 최 대표는 “멕시고 경제위기 조짐이 보일 초기에 많은 주식을 팔아 치웠지만, 손실은 상당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하늘이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운 것만은 아니었다. 펀드자금의 60%는 미국 기업 주식에 담고 있었다. 최 대표는 뉴욕 한복판 월스트리트에서 열리는 IR 행사에 부지런히 참석하면서 미국 IT 기업 주식을 많이 보유한 터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90년대를 주름 잡던 미국 인텔·마이크론 등 글로벌 기업을 매수한 덕에 큰 손실은 면했다.” 그의 말처럼 미국은 1995년 이후 연평균 실업률이 30년 만에 최저 수준인 4.1%로 떨어졌다. 인플레는 연 3% 미만을 유지했고, 경제성장률은 4.2%에 달했다. 뉴욕증권시장도 다우지수, 나스닥지수, S&P 500지수 등이 일제히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기염을 토했다.
더 큰 반전도 있었다. 환율 효과였다. 원금을 날릴 뻔한 펀드에서 두 배 가까운 수익을 낸 것. 최 대표는 “한국이 1997년 11월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원화 가치가 폭락한 덕분에 달러 자산이었던 펀드가 두 배 가까운 수익을 낸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멕시코 구제 금융 위기에다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채권 회수를 위해 영국 런던으로 떠났던 두 달간의 출장은 리스크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계기였다”고 덧붙였다.
최 대표는 글로벌 기업, 통화, 다양한 상품 등 해외 국가·지역별 분산투자의 위력을 몸소 느낀 해외 투자 분야 ‘1세대 개척자’나 다름없다. 아직도 당시 미국 몇몇 기업의 티커(증권 거래소 전신기에서 시시각각으로 알려오는 변동 시세)를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그는 해외 시장의 변화에 빠르게 반응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금리 동향, 고용실적 지표, 각국 중앙은행의 움직임 등을 90년대부터 매일 챙겼다. 그만큼 해외 시장은 수많은 투자 정보와 기회가 널린 곳이었다.”
멕시코 외환위기, 러시아 모라토리엄 등 다양한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그는 특유의 뚝심과 ‘개인투자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론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한국에서 해외 투자팀장을 맡아 활동하던 그는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최 대표는 2000년 전길수 현 슈로더투신운용 대표와 함께 슈로더투신운용 설립 멤버로 합류하면서 직무를 ‘운용’ 분야에서 ‘마케팅’으로 바꾼 것. 해외 운용분야는 최 대표가 15년 가까이 쌓은 전문 분야였기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유를 물었다. “내가 겪었던 해외 시장 경험을 많은 이에 알릴 기회라고 생각했다. ‘마케팅 본부장’이란 직함으로 여러 기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해외 투자의 중요성을 설파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외국계 자산운용사 ‘마케팅’ 분야에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마침 한동안 위기였던 이머징 마켓에 ‘저평가’ 바람이 불면서 투자자가 몰리기 시작했다. 2007년 이전까지 전세계 슈로더 운용자산의 3%에 불과했던 한국 슈로더투신운용의 운용자산이 불과 일 년 만에 2조 원에서 15조원까지 늘었다. 한 해 동안 10조원 이상 세일즈한 것. 덕분에 다른 외국계 자산운용사가 한국 시장을 남달리 보게 됐다. 당시 한국의 치솟는 위상을 반영하듯 “본사에 협조를 구하면 곧바로 전문가가 날아왔다. 국내 투자 업계도 해외 시장에 눈을 뜨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펀드 프로세스’ 구축도 함께 진행했다. 시장에 구미에 맞는 펀드를 신속하게 내놓기 위해서였다. 당시 외국계 펀드가 새 펀드를 내놓으려면 최소 6개월이 필요했지만, 최 대표는 한 달이면 충분했다. “해외에서 직접 운용하고 IR 행사에도 홀로 찾아다닌 경험 덕분에 어떤 상품을 봐도 운용 메커니즘이 금방 눈에 들어왔다. 그만큼 좋은 상품을 알아보는 것은 물론 상품을 설명하는 일에도 재미가 붙었다.” 실제 그의 노력 덕분일까?
최 대표는 그러나 지금까지의 그가 이룬 성과보다 ‘진정성 있는 인간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대구 출신인 그는 일찌감치 아버지를 잃고 넉넉하지 못했던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시절 그에게는 두 다리 뻗을 수 있는 곳도 변변치 않아 선배나 지인의 집을 전전하기 일쑤였다. 힘들었던 학창 시절 얘기로 시작했지만 그는 물심양면 도와준 이들을 얘기할 때면 활짝 웃었다. 묵을 곳을 흔쾌히 마련해주고 영어 실력까지 일취월장하게 해주었던 외국인 목사 부부, 대학 장학금을 놓칠 때면 등록금을 챙겨주셨던 최재선 교수, 미국 근무를 지원해준 이근영 사장(전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과 허과현 당시 한국투신 운용역 부장(현 한국금융신문 발행인), 한국투자신탁부터 슈로더투신운용까지 30년 가까이 물심양면 멘토 역할을 자처해 준 전길수 사장도 있었다. 그는 “오랜 시간 진실한 인연을 새기는 일이 최고의 성공비결”이라고 강조하며 “블랙록자산운용에 와서도 가치를 공유하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했다. 특히 멘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는 상하직원들 간의 원활한 소통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눈을 뜨고 잘 때까지 3분의 2를 직장에서 보낸다. 회사에서 직원끼리 이해하고 배우는 일은 시장 동향 정보 하나 외우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수년간 적자를 이어온 블랙록자산운용 한국법인도 최 대표가 온 지 일 년 후인 지난해부터 흑자전환을 이어가고 있다. 최 대표는 “똘똘 뭉쳐진 직원들이 발로 뛴 덕분”이라며 웃었다.
블랙록자산운용으로 자리를 옮긴 뒤 최 대표가 바빠진 이유는 또 있었다. 블랙록자산운용은 펀드상품을 파는 것보다 솔루션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기존 운용사가 특정 상품부터 권하는 ‘프로덕트 푸쉬’ 방식에서 고객 자산을 어떻게 굴릴까에 대한 방안부터 찾는 ‘포트폴리오 어드바이저’ 역할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최 대표는 “블랙록자산운용 특유의 솔루션 서비스를 하루빨리 한국 시장에 선보이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펼치고 있는 서비스가 아시아 시장에서도 동일해야 한다는 블랙록자산운용의 철학, 이른바 ‘ONE 블랙록’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블랙록자산운용이 글로벌 시장에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노력은 자연스레 글로벌 분산 투자(리스크 관리)를 강조하는 말로 이어졌다. “트렌드를 따라 한 시장·한 상품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시기는 지났다. 한국 투자자들의 시야가 그만큼 넓어져야 한다.” 한국 시장에 투자하는 것은 전체 포트폴리오의 일부로 하는 대범함도 갖춰야 한다는 소리였다.
실제 블랙록자산운용의 ‘블랙록솔루션(BlackRock Solutions)’은 블랙록의 5500조원에 달하는 자산 운용 부문과는 별개로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포함한 컨설팅 서비스와 소프트웨어를 다른 금융회사에 제공하는 사업 부문이다. 매년 상당한 매출을 올리는 블랙록자산운용의 신성장 사업 분야다.
최 대표는 내친김에 한국으로 서비스 확대 적용은 물론 취급 상품도 더 다양화할 참이다. “현재 블랙록자산운용은 글로벌 관련 펀드 19종만 국내에 선보였지만, ‘ONE 블랙록’의 기치 아래 블랙록만의 노하우를 담은 한국 투자자에게 적합한 상품을 개발해 빠른 시일 안에 선보일 것입니다.”
- 글 김영문 기자·사진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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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둘. 1998년 여름 영국 런던에 있는 한 로펌 사무실.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은 8명의 금융 전문가들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 마주 앉았다.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된 우크라이나의 채권 처리를 논하는 자리였다. 외환보유고 20억 달러가 전부였던 우크라이나 재무부에서 나온 대표단과 1억5000만 달러를 회수해 가야 하는 한국투자신탁 협상단이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맞섰다. 일주일로 정했던 협상 기간은 어느새 두 달을 끌었다. 마침내 ‘크로스 디폴트(연쇄지급불능)’를 발동케 하겠다며 배수진을 친 한국 채권단의 승리로 끝났다. 대다수 채권도 3개월 뒤 돌려받아 이자까지 붙여 돌려줄 수 있었다.
최만연 블랙록자산운용 대표가 대륙을 오가며 겪었던 스토리 중 일부다. 블랙록자산운용 본사가 2013년부터 한국법인 대표를 찾기 위해 인터뷰한 수백 명 가운데 그를 택한 이유였다. 그만큼 글로벌 경험을 몸소 겪으며, 위기관리 능력을 갖춘 이를 찾고 있었다. 최 대표는 2014년부터 블랙록자산운용의 한국법인 대표를 맡고 있다.
블랙록자산운용은 글로벌 1위 자산운용사다. 블랙록이 운용하는 자산은 지난해 기준 4조6500억달러(약 5426조) 규모로 지난해 우리나라 총예산(376조원)의 15배 가까운 수준이다.
블랙록월드골드, 국내 공모펀드 중 수익률 1위
1985년 최 대표는 당시 한국투자신탁에 들어가며 투자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어 1989년 회사 최초로 설립된 해외투자부에서 운용역을 맡았다. 1994년에는 뉴욕에 펀드매니저로 파견 나가는 기회도 잡았다. 최 대표는 1998년까지 뉴욕에서 해외 펀드를 직접 운용했다. 최 대표는 1980년대 기억을 다시금 더듬으며, 해외 투자 얘기를 이어갔다. “당시 한국투자신탁에서 만든 ‘석류세계로’ 펀드에 공모한 자금 5000만 달러로 미국과 남미 지역에 주로 투자했다.”
보란 듯이 펀드 운용을 하겠다던 패기도 잠시, 그는 1994년 말 멕시코 구제금융 위기가 터지면서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당시 중남미 투자의 최대 시장은 멕시코였다. 구제금융 위기가 터지자 달러당 페소 가치가 하루 만에 70% 사라지기도 했다. “멕시코 위기에 밤잠을 설친 날이 숱하게 많았다. 1달러당 3페소 하던 게 10페소까지 뛰었다.” 이른바 1995년 멕시코 페소화 가치가 폭락했던 ‘테킬라 파동’이 중남미 경제를 휩쓸고 지나갈 때였다. 그는 당시 자금의 40%를 중남미 시장에 투자하고 있었다. 멕시코의 대표 통신사 주식은 물론 칠레 와인회사, 브라질 국영 정유사 페트로브라스도 그의 중남미 투자리스트에 있었다. 최 대표는 “멕시고 경제위기 조짐이 보일 초기에 많은 주식을 팔아 치웠지만, 손실은 상당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하늘이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운 것만은 아니었다. 펀드자금의 60%는 미국 기업 주식에 담고 있었다. 최 대표는 뉴욕 한복판 월스트리트에서 열리는 IR 행사에 부지런히 참석하면서 미국 IT 기업 주식을 많이 보유한 터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90년대를 주름 잡던 미국 인텔·마이크론 등 글로벌 기업을 매수한 덕에 큰 손실은 면했다.” 그의 말처럼 미국은 1995년 이후 연평균 실업률이 30년 만에 최저 수준인 4.1%로 떨어졌다. 인플레는 연 3% 미만을 유지했고, 경제성장률은 4.2%에 달했다. 뉴욕증권시장도 다우지수, 나스닥지수, S&P 500지수 등이 일제히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기염을 토했다.
더 큰 반전도 있었다. 환율 효과였다. 원금을 날릴 뻔한 펀드에서 두 배 가까운 수익을 낸 것. 최 대표는 “한국이 1997년 11월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원화 가치가 폭락한 덕분에 달러 자산이었던 펀드가 두 배 가까운 수익을 낸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멕시코 구제 금융 위기에다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채권 회수를 위해 영국 런던으로 떠났던 두 달간의 출장은 리스크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계기였다”고 덧붙였다.
최 대표는 글로벌 기업, 통화, 다양한 상품 등 해외 국가·지역별 분산투자의 위력을 몸소 느낀 해외 투자 분야 ‘1세대 개척자’나 다름없다. 아직도 당시 미국 몇몇 기업의 티커(증권 거래소 전신기에서 시시각각으로 알려오는 변동 시세)를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그는 해외 시장의 변화에 빠르게 반응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금리 동향, 고용실적 지표, 각국 중앙은행의 움직임 등을 90년대부터 매일 챙겼다. 그만큼 해외 시장은 수많은 투자 정보와 기회가 널린 곳이었다.”
멕시코 외환위기, 러시아 모라토리엄 등 다양한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그는 특유의 뚝심과 ‘개인투자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론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한국에서 해외 투자팀장을 맡아 활동하던 그는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최 대표는 2000년 전길수 현 슈로더투신운용 대표와 함께 슈로더투신운용 설립 멤버로 합류하면서 직무를 ‘운용’ 분야에서 ‘마케팅’으로 바꾼 것. 해외 운용분야는 최 대표가 15년 가까이 쌓은 전문 분야였기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유를 물었다. “내가 겪었던 해외 시장 경험을 많은 이에 알릴 기회라고 생각했다. ‘마케팅 본부장’이란 직함으로 여러 기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해외 투자의 중요성을 설파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외국계 자산운용사 ‘마케팅’ 분야에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이머징 마켓 상품, 10조원 넘게 팔아
‘펀드 프로세스’ 구축도 함께 진행했다. 시장에 구미에 맞는 펀드를 신속하게 내놓기 위해서였다. 당시 외국계 펀드가 새 펀드를 내놓으려면 최소 6개월이 필요했지만, 최 대표는 한 달이면 충분했다. “해외에서 직접 운용하고 IR 행사에도 홀로 찾아다닌 경험 덕분에 어떤 상품을 봐도 운용 메커니즘이 금방 눈에 들어왔다. 그만큼 좋은 상품을 알아보는 것은 물론 상품을 설명하는 일에도 재미가 붙었다.” 실제 그의 노력 덕분일까?
최 대표는 그러나 지금까지의 그가 이룬 성과보다 ‘진정성 있는 인간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대구 출신인 그는 일찌감치 아버지를 잃고 넉넉하지 못했던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시절 그에게는 두 다리 뻗을 수 있는 곳도 변변치 않아 선배나 지인의 집을 전전하기 일쑤였다. 힘들었던 학창 시절 얘기로 시작했지만 그는 물심양면 도와준 이들을 얘기할 때면 활짝 웃었다. 묵을 곳을 흔쾌히 마련해주고 영어 실력까지 일취월장하게 해주었던 외국인 목사 부부, 대학 장학금을 놓칠 때면 등록금을 챙겨주셨던 최재선 교수, 미국 근무를 지원해준 이근영 사장(전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과 허과현 당시 한국투신 운용역 부장(현 한국금융신문 발행인), 한국투자신탁부터 슈로더투신운용까지 30년 가까이 물심양면 멘토 역할을 자처해 준 전길수 사장도 있었다. 그는 “오랜 시간 진실한 인연을 새기는 일이 최고의 성공비결”이라고 강조하며 “블랙록자산운용에 와서도 가치를 공유하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했다.
‘ONE 블랙록’, 종합솔루션 서비스 한국도 선보인다
블랙록자산운용으로 자리를 옮긴 뒤 최 대표가 바빠진 이유는 또 있었다. 블랙록자산운용은 펀드상품을 파는 것보다 솔루션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기존 운용사가 특정 상품부터 권하는 ‘프로덕트 푸쉬’ 방식에서 고객 자산을 어떻게 굴릴까에 대한 방안부터 찾는 ‘포트폴리오 어드바이저’ 역할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최 대표는 “블랙록자산운용 특유의 솔루션 서비스를 하루빨리 한국 시장에 선보이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펼치고 있는 서비스가 아시아 시장에서도 동일해야 한다는 블랙록자산운용의 철학, 이른바 ‘ONE 블랙록’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블랙록자산운용이 글로벌 시장에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노력은 자연스레 글로벌 분산 투자(리스크 관리)를 강조하는 말로 이어졌다. “트렌드를 따라 한 시장·한 상품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시기는 지났다. 한국 투자자들의 시야가 그만큼 넓어져야 한다.” 한국 시장에 투자하는 것은 전체 포트폴리오의 일부로 하는 대범함도 갖춰야 한다는 소리였다.
실제 블랙록자산운용의 ‘블랙록솔루션(BlackRock Solutions)’은 블랙록의 5500조원에 달하는 자산 운용 부문과는 별개로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포함한 컨설팅 서비스와 소프트웨어를 다른 금융회사에 제공하는 사업 부문이다. 매년 상당한 매출을 올리는 블랙록자산운용의 신성장 사업 분야다.
최 대표는 내친김에 한국으로 서비스 확대 적용은 물론 취급 상품도 더 다양화할 참이다. “현재 블랙록자산운용은 글로벌 관련 펀드 19종만 국내에 선보였지만, ‘ONE 블랙록’의 기치 아래 블랙록만의 노하우를 담은 한국 투자자에게 적합한 상품을 개발해 빠른 시일 안에 선보일 것입니다.”
- 글 김영문 기자·사진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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